이명순 1943년 금구리

단박에 알아보았다. 어머니 댁을 찾고 있던 내 눈에 미소가 고운 어머니 모습이 한 눈에 들어왔다. 이명순 회장님이셨다. 처음 뵈었지만 나긋나긋한 말씨처럼 눈웃음도 미소도 어여쁜 어머니. 봉사단체에서 고추 따는 데 손을 보태고 오셨다면서 겨우 한숨 돌리고 교자상에 먹거리를 수북이 올려오셨다. 이야기도 풍성할 것을 미리 짐작할 수 있었다. 앨범을 펼치자마자 영화배우 같은 두 아가씨의 흑백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어머니와 여동생분이셨다.
“나는 내 동생 반도 못 따라가 우리 동생은 영화배우처럼 예뻤어”라고 동생을 치켜세우셨지만 여든이 넘어도 너무 고운 어머니의 젊은 날도 눈부셨다. 꽃은 어여쁨이 열흘을 못 가지만 어머니의 향기는 80여년의 세월 속에 고스란히 묻어왔다.
작년에 사고로 뇌수술을 하셔서 새로 태어난 것 같다고 말씀하시면서 그날의 이야기를 들려주셨는데 아찔했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인생의 희비는 예고도 없고 그저 찰나의 순간에 다가온다는 것을 또 한 번 깨닫는다. 어머니는 큰 수술 후에 회복되면서 또 5년간 나가던 봉사단체에서 손품과 발품을 보태고 계셨다. 베푸는 일이 몸에 밴 분이라 어쩔 수 없다. 어머니의 지난 삶 속에서도 곳곳에 어머니의 성품과 성정이 그대로 담겨있었다. 친정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아름다운 대물림이다. 

 

■ 군북면 자모리 마을의 일꾼

나는 19살까지 군북면 자모리에서 살았고 21살에 금구리로 시집을 왔다. 8남매 중 둘째, 명대 명순 명숙 명옥 명자 딸들은 ‘명’자 돌림이었다. 내리 딸 다섯이었으면 하늘이 무너질 일이었지만 중간 중간에 아들이 듬직하게 있어서 어린 시절에는 8남매가 한방에 꽉 들어차있었다. 

자모리는 예전부터 모범부락으로 소문날 만큼 부지런하고 인심이 좋았다. 다른 동네로 돈 꾸러 다니는 사람들이 없다고 할 정도로 마을이 여유있었다. 자모리는 식장산 동쪽 기슭 마을로 부추생산이 유명하다. 대전의 부추 시장 가격이 그날 자모리에서 생산, 출하하는 부추량에 따라 결정된다고 할 정도로 호시절이 있었다. 지리적으로는 대전시 동구 세천동과 접하고, 북쪽은 증약리와 인접한다. 또 마을 산기슭에 산뽕나무가 많아 누에를 치는 잠실이 있어 잠실이 자무실과 자모실로 불리어지다 자모리가 됐을 것이라고 짐작하는 이들도 많다. 한때는 은진  송씨와 경주 김씨, 경주 이씨가 많이들 살았다. 청년시절에는 자모리 사는 게 자랑일 만큼 우리 동네는 잘 사는 동네, 인심 좋은 동네였다. 그 뿌리가 지금껏 내려와서 고향 마을에 흠집 내지 않고 100세 인생의 8할을 살고 있다. 

■천하의 호인이셨던 친정 부모님 

친정아버님도 노인회장을 하셨던 분으로 당시 자모리는 100호가 넘는 큰 마을이었다.

모범부락으로 이미 소문이 났다. 부모님이 마을 일을 팔 걷어 부치고 하시느라 나도 당연히 그리 살아야 되는 줄 알았다. 친정아버지는 인심이 좋아 동네에 나그네가 들어와 고향 가는 노잣돈이 모자란다고 하자 먹여주고 그가 이발 기술자인 것을 알고 동네 사람을 다 모아주셨다. 이발을 해주고 노자 돈을 만들어가게 해주셨다.

사람 사는 정을 나누고 몸소 실천하면서 사신 분이다. 배우고 보고 자란 것이 부모님의 인정이라 나도 내 손길이 필요하다 싶으면 망설이지 않았다. 그래서 대수술을 받고도 봉사단체에 손 보탤 것이 보이면 내 건강 걱정보다 발걸음이 먼저 대문을 나서고 있다. 친정어머니도 마을 일을 팔 걷어 부치고 도울 사람 있으면 먼저 발 벗고 나서는 분이었다. 핏줄이 어디갈까 나도 어머니 성정을 닮았다. 

나는 자모리에서 4H 군북면 여부회장을 하고 동네의 학교 교사가 군북면 회장이었다. 동네 일꾼으로 일하는 게 즐거웠고 한창 젊을 때라 열심히 일했다. 농번기에는 부모들이 농사일로 바쁘다보니 아이들 돌보는 손이 부족해서 우리들이 임시 탁아소를 운영하면서 아이들도 챙겨주고 마을에 손 보탤 일은 주저하지 않았다. 그 시절을 생각하면 알아서 척척해낸 것을 보니 리더십도 있던 모양이다. 물론 아버지에게서 배운 가르침이다. 

■자모리 연가, 사랑이 꽃피던 청년 활동가의 인연

남편은 우리 동네 금구리의 20년 이장으로 유명하다. 남편과 나는 그 시절에 연애결혼을 했다. 남편이 옥천 4H 청년회장을 하면서 면 시찰을 나올 때 우리 동네에 들렀다. 남편은 나에게 첫눈에 반했다고 뒤늦게 고백을 했다. 스무 살 때였으니 복사꽃처럼 예뻤고 마을 일꾼으로 뭐든 열심히 하고 있을 때라 눈망울도 초롱초롱해서 내 모습이 어여삐 보였던 것이다.

남편은 우리 마을에 온 길에 우리 부모님께 인사하고 가야겠다며 슬쩍 우리 집을 넘보고 가기도 했다. 그 때는 회장이라며 공식적인 발걸음으로 보였지만 마음에 꿍꿍이가 있어서 우리 집에도 들린 것이다. 

4H 공문서를 그 때는 우편으로 주고받았는데 우리 집으로 보낼 때마다 은근슬쩍 사사로운 감정이 엿보이는 글들을 사브작사브작 넣기도 했다. 그리고 옥천군 연합회의 임원 소집할 때 농촌지도소에서도 만나면서 우리는 사랑을 조금씩 키워나갔다.

1962년 그렇게 슬그머니 키운 사랑으로 우리는 결혼을 하게 되고 내가 금구리로 나오면서 우리 자모리에서는 일꾼하나를 잃었다고 아쉬워했다. 그 후로 나는 금구리 사람이 되어 60여년을 살고 있다.

결혼할 당시 남편은 군복무 중이라 휴가 나와서 결혼을 했다. 나는 결혼 후에 애기를 업고 남편을 만나러 춘천까지 다녀오기도 했다. 옥천역까지 걸어가서 기차를 타고 서울 용산역에 내려서 다시 춘천행 기차를 탔다. 남편이 춘천역에 마중 나와서 손을 흔들고 있으면 눈물이 왈칵 쏟아지는 수줍은 새댁이기도 했다. 그때는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좋아서 애를 들쳐 업고 하루 종일 걸린 그 먼 길이 고단하지 않았다. 젊은 시절의 연가다. 

지금 이 집에서 신혼을 시작했는데 그때는 초가집에 쪽방 두 개에서 살림을 시작했다.

남편이 이장을 오래해서 나도 이장댁이라고 불렸다. 시집살이는 나도 또래의 친구들 마냥 고단한 세월이 있었다. 남편의 서모인 어머니를 모시고 있었는데 매일 잔소리를 듣는 게 여간 곤욕스럽지 않았다. 죽으나 사나 참고 살았다. 고단했지만 빵긋빵긋 웃는 우리 아이들, 내 손을 꼭 잡아주는 남편 보면서 세월을 견뎠다. 

■열심인 남편과 내조하는 아내, 우리는 원앙처럼 

남편은 모건장에 나가서 일을 시작했다. 모 이식하는 일터인데 열심히 했고 돈도 만져보고 싶은 마음에 다른 사업도 알아보면서 대전 나가서 모자를 가져다가 팔기 시작했다. 맥고모자를 가져와서 옥천장에 팔았는데 여름에 불티나게 팔렸다. 남편은 수년간 모자장사를 해서 모자장사로도 이름이 났다.

몇 백 원씩 받던 맥고모자인데 옥천장, 이원장, 안내장까지 자전거로 누비고 다녔다. 남편이 열심히 벌어다주면 나는 저축하고 허리띠를 졸라매면서 돈을 차곡차곡 모았다. 시작은 어려웠지만 살림 늘어나는 재미가 쏠쏠했다.

남편은 성실하고 수완도 좋아서 씨앗 장사도 같이 했다. 열무씨 배추씨를 팔았는데 한창 농사지어서 먹고 살 때라 장사가 잘 됐다. 밤중에 대전 중앙시장 나가서 씨앗을 가져오면 새벽에 눈 한숨 붙이고 아침 장에 나가서 팔았다. 우리 부부는 뭐든 열심히 했고 남편이 어떻게 번 돈인지 누구보다 잘 안다. 함부로 쓸 수 없었고 모아모아서 살림을 키워나갔다.

■옥천의 상쇠로, 어른으로, 내 삶도 깊어가고 있구나

한창 활동을 많이 하던 때, 나는 저녁을 먹고 바람 쐬러 잠깐 나가는 길이었는데 일어나보니 병원이었다,

남편은 내가 마실 나가서 늦게까지 기별이 없자 찾으러 나왔다가 대문 앞에서 쓰러진 나를 보고 기겁을 했다. 119를 불렀는데 도서관이 공사 중이라 앰뷸런스가 들어올 수 없어서 나는 들것에 실려서 병원으로 갔다. 남편은 속이 다 타들어갔다고 한다. 시골마을에 119 차가 앵앵소리를 내고 나는 들것에 실려 나갔으니 동네에서 이장댁 죽었다고 소문이 파다했다. 

내가 여러 단체에서 활동을 워낙 많이 하다보니 잠시 쉬라는 신호였는지 나는 퇴원 후에 몸을 사리면서 조금씩 일상을 회복하고 있다. 

사고 전에는 스포츠댄스, 풍물놀이, 봉사등 옥천의 행사장에 내 얼굴이 보이지 않는 곳이 드물었다. 재밌었고 우리 옥천을 유익하게 하는 일이라면 마다하지 않았다.

스포츠댄스 학원에 나갈 때도 나는 간식거리를 꼭 들고 다녔다. 대단한 먹거리를 준비하는 건 아니다. 그저 마음이지. 호박죽을 한 솥 끓여서 나눠먹고 고구마도 삶아가고 시루떡도 들고 나갔다. 배우는 즐거움도 있지만 먹는 재미도 빠질 수가 없다. 정을 나누는 시간들이 살가웠다. 부채춤도 오래했고 풍물연합회의 상쇠 담당이다. 옥천에서 행사 있을 때 상쇠인 나를 필두로 같이 움직인다. 내가 움직이지 않으면 행사를 치를 수 없다. 꽹과리를 치면서 내가 발걸음을 떼면 그때부터 시작이다. 

내 인생도 상쇠와 많이 닮았다. 좋은 일에는 앞장서기를 주저하지 않았고 몸을 사리지 않았다. 그리고 내 손품과 발품들이 모여서 마을을 위한 좋은 일들을 하나씩 이뤄나갔다.

우리 아이들도 다들 자기 자리에서 아쉬운 소리 안 하면서 잘 살고 있어서 그 또한 보통 뿌듯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막내는 시집 안 간다고 미국 가서 간호사 하더니 글쎄 한국 남자를 만났는데 제천 남자를 만나서 결혼을 했다. 아니 서울남자도 아니고 제천남자를 미국에서 만나 결혼을 했으니 부부가 천생연분이라는 말을 달리 쓰겠나. 우리 부부가 운명처럼 첫 눈에 반했듯이. 

바깥 날씨가 쌀쌀해서 인지 방안의 온기가 더욱 그리워지는 저녁이다.깊어가는 만추에 든든한 동반자인 남편의 이부자리를 봐주며 슬쩍 한 마디 건넨다.

 “여보, 사랑해요 고마워요!”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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