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아시스 (전주 야호학교 교장/양수리)

나는 더듬거린다, 그는 죽은 사람이다.  
그 때문에 얼마나 많은 장례식들이 숨죽여야 했던가  
그렇다면 그는 누구인가, 내가 가는 곳은 어디인가  
나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으면 안된다. 
어디서  그 일이 터질지 아무도 모른다, 어디든지  가까운 지방으로 나는 가야 하는 것이다.  
이곳은 처음 지나는 벌판과 황혼, 내 입 속에 악착같이 매달린 검은 잎이 나는 두렵다. 

기형도 <입 속의 검은 잎>중 일부

기형도 <입 속의 검은 잎>은 죽음에 대한 욕망, 타나토스를 다룬 시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프랑스와즈 사강의 제목을 그대로 인용한 김영하의 소설을 전수일 감독이 영상으로 표현했지만 제목의 도발적인 색깔을 넘어서지 못했다. 자의든 타의든 인간의 조건은 에로스와 타나토스 사이에 끼여 있는 존재다. 삶을 향한 등불이 약해지면서 짙어지는 죽음에 대한 축축한 욕망에서 도망가기 위해 종교와 예술 그리고 사랑을 선택한다. 하지만 타나토스의 유혹에 넘어가기도 한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초창기 영화 <환상의 빛>은 수다스럽지 않아 좋다. 내 입맛에 맞는다고 할까. 95년 작품이라지만 <아무도 모른다>에서 보여준 무뚝뚝함이 이 작품에도 그대로 녹아있다. 말 수가 적은 사람들이 있다. 그들을 만나면 상상력이 좋아진다. 그의 눈빛 몸짓 표정 하나 하나를 예민하게 들여다봐야 제대로 그의 생각을 짚어낼 수 있다. 하나라도 놓치면 헛다리 짚는 꼴이 되고 나는 그의 마음의 깊은 변화를 못 읽는 무성의한 친구가 되는 셈이다.

직설화법의 친구들이 상처를 줄 때도 있지만 의뭉스럽거나 뒷끝이 찜찜하지 않아서 좋다. 하지만 간접화법은 독하게 입안 한구석을 차지하는 양파처럼 아무리 양치를 해도 개운치 않다. 상상력이 부족하거나 세심함이 적은 이들에겐 부담스러울 뿐이다.
 <환상의 빛>이 수다가 적은 사람들의 답답함을 닮았다는 건 아니다. 그냥 말수가 적은 영화들이 그럴 수도 있다는 거다. 이 영화를 본 관객들이라면 감독의 느린 말투와 침묵 그리고 사물이 돼버린 배우들이 얄밉게 보였을 것이다.

대사로 배우들의 속셈을 알아채기보다는 프레임의 빈 공간을 응시해야 한다. 아무것도 낚을 수 없는 민바늘 낚시 같은 지경이다. 화면의 편집은 매우 천천히 넘어가고 대상을 찾아가는 카메라는 결코 직접 들이대지 않고 겅중겅중 건너간다. 이야기는 찬밥 신세다. 남편의 갑작스런 자살과 다시 재혼한 여주인공. 화폭 위에 펼쳐 놓은 아주 단순한 구도. 여주인공의 괴로운 심경은 그녀의 침묵이 끝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뤽 베송의 <그랑부르>도 말 수가 적은 영화다. 주인공은 사람보다 돌고래가 편한 친구다. 인간의 폐활량을 넘어 버리는 바람에 경쟁을 하던 주인공은 질러 가려고 하다가 물 속에서 마침표를 찍는다. 심지어는 잠을 자다가도 수압을 느껴 코피를 흘린다. 결국 주인공은 임신한 약혼녀의 간절함에도 불구하고 바다 속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돌고래들이 다가오고 웃으면서 영화는 끝난다. 주인공이 물리적인 수압을 견디지 못하고 수장 되었을 거라는 상상력은 영화를 보는 태도와 맞지 않다. 중요한 건 육체의 물리적인 죽음이 아니라 영원과도 같은 하루에 맞먹는 상대적인 시간은 주인공이 물속에 머무는 시간을 아주 길게 엿가락처럼 휘게 한다는 점이다.

사랑하는 여인의 울부짖음에도 아랑곳없이 깊은 바다 밑으로 잠수하는 그랑부르의 주인공 지상보다 더 편한 무엇이 혹은 사랑보다 더한 무엇이 있을 거란 추측을 해볼 뿐이다. 혹은 지상이 너무 불편했거나. 영화 <그랑부르>는 개인적으로 기억에 오랫동안 지근거렸던 영화였다. 40대가 되어 알 수 있었다. 영화의 메시지는 ‘네가 원하는 곳으로 가라’. 40대에 간디학교를 선택한 건 늦었지만 그래도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환상의 빛>의 배경은 풍경 좋은 바닷가 마을이지만 을씨년스럽다. 주인공의 심리와 닮아있는 풍경은 너무 전형적이다. 내가 감독이라면 이런 영화를 만들고 싶다. 너무 눈부신 햇살. 그 햇살에 그대로 드러나 있는 주인공의 상처. 우울한 조명으로 주인공 내면의 풍경을 그려내는 건 너무 촌스러워.

그리고 마지막 남편의 대사는 사족. <아무도 모른다>의 마지막 장면에서 나오는 청승맞은 가사와 노래도 지나치게 친절하더니 여기서도 마찬가지다. 풀리지 않는 삶의 비밀을 <살인의 추억>은 미궁의 사건으로 은유화했고, 이 영화는 흑백에 가까운 단조로운 톤과 낡은 가구와 계단이 대신한다.

가령 남편의 자살을 궁금해하는 그녀에게 굳이 한마디 해준다면 “이 세상이 너무 불편한 옷 같아서 벗어버린 거지요” 타나토스에 대한 욕망을 지우지 못한 이들이 할 수 있는 변명이 따로 필요할까? <그랑부르>의 주인공이나 <환상의 빛> 주인공의 남편이나 혹은 숨막히는 삶의 현장에서 미끄러지는 사람이나 미끄러지고 싶은 사람이나, 변명을 갈음한다면,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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