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은초 작가

찔레꽃 붉게 피는 남쪽나라 내 고향 
언덕위에 초가삼간 그립습니다
자주 고름 입에 물고 눈물 젖어 이별가를 불러주던 못 잊을 사람아 
백난아님의 ‘찔레꽃’이다. 어르신이 즐겨 부르시는 노래, 어르신은 가수 지망생이셨다.
어린 시절 동네 가수로 소문날 만큼 흥이 많으셨다고 하시며 찔레꽃을 백난아님 보다 더 간드러지게 불러주셨다. 
이원면 1949년 이영숙 

■ 이제 추억이 된 아버지의 포마드 냄새

1949년 6남1녀 중 넷째 딸이자 고명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가수였다. 김정구, 현인 선생님처럼 일제강점기 때 유랑극단에서 활동하셨다. 우리 집에는 오르간, 트럼펫, 색소폰, 클라리넷, 바이올린 등 각종 악기가 있었다. 호기심 많은 내 눈을 사로잡기에 부족함이 없던 우리집의 보물들이다. 6·25전쟁이 터진 후 아버지는 인민군에 의해 신의주까지 끌려갔다가 가까스로 도망 나오셨단다. 전쟁이 끝난 후 우리 가족은 피란 내려왔던 대전에 눌러앉았고, 아버지는 당시 대전 외곽 장동 미군부대에서 노래하셨다. 그러면서 오빠들과 예닐곱 살밖에 안 된 나에게 미국식 영어를 가르쳐주셨다. 

아버지가 출근 준비하시면서 양복을 쫙 빼입거나 하와이안 셔츠를 입으셨는데 머리에 포마드 기름을 발라서 가르마를 정갈하게 만드셨다. 포마드 기름 냄새가 어찌나 진했는지 지금도 돌아가신 아버지 생각하면 코끝에서 포마드 냄새가 난다. 이젠 추억의 향이 되었다. 

■ 나의 첫 영어 회화, ‘기브미 껌’, ‘기브미 초코렛’

미군들은 우리 꼬마들에게는 호기심의 대상이었다. 쌀라 쌀라하는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말과 키가 크고, 코가 큰 미군들을 거리에서 만나면 무조건 다가가서 ‘기브미 껌’, ‘기브미 초코렛’ 하고 외친 것이 내가 처음 써먹은 영어였다. 어릴 때부터 성격이 활달하고 흥이 많은 집안의 피가 흘러서 남자 아이들과 같이 미군 뒤를 졸졸 따라다니기도 했다.

내 또래 여자아이들은 미군들이 무섭다고 집에 숨기도 했는데 나는 마냥 신기하기만 했다. 미군들은 많은 아이들 중 몇 명에게만 줄 수가 없으니 통상 닭 모이 주듯이 껌이며 초콜릿을 던져주었다. 어쩌다가 달려가서 하나라도 주워 먹는 아이는 그날 재수가 좋은 날이었다. 껌은 씹은 후에 집의 벽이나 기둥에 붙여놓고 끈기가 마를 때까지 뗐다 붙였다 여러 날을 씹었다.

초콜릿이나 과자 종이는 나무 조각 같은 것으로 다시 포장해서 아이들 있는 곳에 슬그머니 떨구어 놓고 “아니! 여기 웬 과자야!” 하며 친구들을 놀리기도 했다. 사진으로 기록된 6.25 사변 때 미군 트럭 꽁무니를 따라다니던, 땟국물 졸졸 흐르고 꼬질꼬질한 녀석들이  바로 우리 유년시절의 단면이다. 

■ 인생의 나침반, 신식 아버지

아버지가 하루종일 집안일만 하는 엄마를 가리키며 “너 엄마처럼 살래?” 물었다. 내가 고개를 흔들었더니 “너가 어른이 되면 세상이 달라져서 여자도 능력 있으면 돈 벌고 남자도 자기 마음에 드는 사람으로 골라서 시집가는 세상이 온다”고 하셨다.

그러려면 공부를 하든지 노래를 하든지 춤을 추던지 너가 잘하는 것 하고 싶은 것을 하라고 조언을 하셨다. 그 시대의 아버지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신식아버지셨다.
나는 노래하고 춤추는 게 너무 좋아서 공부보다는 전국에서 벌어지는 노래자랑을 찾아다니면서 무대에 서게 된다. 무대에 서면 내가 살아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가수로 이름을 알리는 건 피나는 노력과 운이 따라야 했다. 나도 누구 못지않게 노래를 잘한다고 생각했지만 기회는 쉽사리 오지 않았다.

■ 운명 같은 결혼, 역마살을 잠재우다 

가수가 될 기회는 좀처럼 오지 않았지만 친구들이 중매로 시집을 갈 때 나는 무대에 많이 서다보니 연애를 할 수 있는 기회는 다른 친구들보다 많이 주어졌다.

왜관에 공연 갔을 때 영동남자를 만나게 되었다. 충북영동사람이 김천에서 왜관의 부대에 식자재물품을 납품하고 있었다. 부대 위문공연장에서 나를 몇 번 보았는데 지인에게 연통을 넣어 나를 소개해 달라고 하여 우리는 만남을 갖게 되었다.

성실하고 근면한 남편은 호쾌한 내 모습이 좋았지만 우리는 전혀 색깔이 달라 결혼하고 부부싸움을 유난히 많이 했다. 하지만 폭풍우도 어느 순간 잠재워지고 남편은 사업이 궤도에 오를 때 아들에게 맡기고 우리 부부는 남편의 고향으로 돌아왔다.

영동에서 포도농사를 시작했다가 이원의 포도밭을 사게 되어 이원으로 터전을 옮겼다.

서울에서 대전으로 다시 전국을 다니며 노래하고 왜관에서 영동남자를 만나 결혼했다가 인생의 말미는 이원에서 보내게 됐다.

흔히 나 같은 사람을 역마살이 꼈다고 한다. 폭풍우 같던 내 인생을 고요하게 만들어준 남편이 지금은 고맙다. 조용한 항구에 정박한 배처럼 편안한 노후를 보내게 됐다.

■ 파도는 가라앉고 잔잔한 물결만 남다

나는 기분이 좋을 때도, 마음이 공허할 때도, 언짢을 때도 무조건 노래로 마음을 달랜다. 어느새 평정을 찾는 나를 보면서 노래를 사랑하는 나를 다시 발견하게 된다.
노래는 내 인생의 숨통 같은 존재다. 남편이 한창 미스트롯이 열풍일 때

“당신 최고령자로 한번 나가보면 어때?”라고 한마디 던졌는데 하여튼 남편이 내 노래 솜씨를 인정해준다는 것이다. 이제는 밖에서 노래 부를 일이 없지만 아니 안 하지만 남편은 내 노래를 즐긴다. 그래 대중이 아니면 어떤가, 단 한사람이라도 내 노래를 즐거워하는 이가 있으면 족하는 것이지... 

70년의 하루하루는 행복하고 때론 고단하기도 했지만 70년은 순식간에 지나왔다. 앞으로 내 인생이 얼마나 남았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지만 그저 희로애락이 내 곁에 머무를 때는 노래를 부르련다. 밤하늘의 별 같은 존재보다 시골 마을의 할매로 살아가는 즐거움이 따로 있다. 이 작은 행복에 젖어보니 무대에서 마이크를 잡았던 순간이 한 여름 밤의 꿈같다. 

오늘은 깊은 가을밤의 고즈넉함에 흠뻑 취하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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