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암

1960년대만 해도 한 마을에서 자전거를 탄 사람이 한 두 사람에 불과했다. 직장에 다니는 사람이 아니고는 자전거 소유자가 거의 없었다. 직장이라고 해 봤자 면사무소, 지서, 학교, 우체국이 고작이었다. 우체국 집배원도 가까운 거리는 도보로 배달을 했다. 

자전거 하나 사서 타고 다녀도 되련만 선듯 용기가 나지 않았다.

선배교사 두 명이 자전거로 출근을 하며 자랑을 해도 부럽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나 하고는 인연이 없는 일이라고 열심히 걸어서 출퇴근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퇴근 길에 태구 아저씨를 만났다. 태구 아저씨는 아버지 친구이며 우체국 집배원으로 평생을 살아오신 분이다. 어쩐지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다. “자네 아직도 걸어서 다니는구먼, 나는 새 자전거를 배급 받았네, 내가 타던 자전거는 아직 탈만 하니 타보겠는가”하신다. 너무도 고마운 일이어서 감사합니다 여러 번 절을 하고 돌아왔다. 다음날 유세차씨 자전거포에서 까만 칠을 한 자전거 한 대가 찾아왔다. 이렇게 해서 빨간 자전거는 산 넘고 물 건너 지매 우디미 골짝까지 마을마다 집집마다 새 소식을 전해주던 역할에서 한 젊은 교사의 애마가 되었다. 

빨간 자전거는 내 출퇴근 길을 돕는 데 충실했다. 읍내로 전근이 되어서도 30리길이 넘는 먼 길을 출퇴근 시켜주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검은 페인트가 조금씩 벗겨져 속내를 보이기도 하지만 빨간 생채기는 태구 아저씨의 사랑이 비치는 것 같아 가슴 아렸다. 

1970년대에는 자전거가 많이 보급되었다. 중학생까지도 자전거를 타고 통학을 하는 급변이 일어났다. 많은 사람들이 삼천리호 자전거로 삼천리를 누비는 시절이 되었다. 내 자전거는 가장 선임 자전거로 명망이 높았다. 고속도로가 생기고 모든 도로 교통망이 아스팔트 포장이 되고 시골마을 고샅길도 아스팔트가 깔리는 변화가 일어났다. 마이카 시대가 도래하는 준비 기간인 것 같다.

1990년대 나는 승용차를 샀다. 많은 사람들이 승용차로 출퇴근을 하던 때에 늦게야 자가용 족에 끼이게 되었다. 나는 문명의 이기를 접하는 데는 조금씩 망설이고 있다. 그 자전거는 잘 수리해서 필요한 사람에게 주었다. 그리고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 이미 고인이 되신 태구 아저씨의 사랑도 빨간 자전거에 대한 애착도 사라져 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동창회 안내장을 받았다. 보낸 사람의 이름이 어딘가 낯익다. 전화로 연락을 해 보니 태구 아저씨의 막내 아들이다. 반갑기도 하고 고맙기도 했다. 잊혀가던 인연이 이렇게 이어지는구나 생각하니 빨간 자전거에 얽힌 크나큰 사랑이 다시금 새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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