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창숙(77, 옥천읍 금구리) 시니어기자
윤창숙(77, 옥천읍 금구리) 시니어기자

내가 일하고 있는 죽향초 구교사에서 창문을 통해 보이는 길 건너에는 작은 텃밭이 있다. 얼마 전 모두 더위로 헉헉대고 있었다. 그런데 그 더운날 풀이 무성한 밭에서 일하고 계시는 한 분이 보였다. 젊은 측에 속하는 노인이었다. 이른 아침부터 일을 시작한 것 같았다. 뽑힌 풀이 한쪽에 수북이 쌓여 있다.

한참 있다가 봐도 여전히 밭에서 일하고 계셨다. 한참만에 풀 뽑은 곳은 붉은 흙으로 덮인 땅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 곳에 무언가를 심고 계셨다. 무슨 작물일까? 김장철 배추나 무우일까? 그렇게 한참을 움직인 후에 잠시 그늘도 없는 땅에 앉아 쉬고 계셨다.

물을 들이킨 후 다시 일어서서 그 옆에 심어져 있는 거의 1m는 족히 되어 보이는 들깨 같기도 한 식물의 윗부분을 따주고 계셨다. 이렇게 뜨거운 햇빛과 풀과 씨름하신 후 일을 마친 그 분은 힘이 빠진 모습이었다. 걱정이 된다. 혹시 쓰러지시면 어떡하지?

나의 올케는 서울에서 약국을 하다 10년 전 시골로 내려가 살고 있다. 약국에 약을 지으러 오시는 분은 거의가 그 곳에 사시는 노인들이라고 한다. 허리는 굽어질 대로 굽어진 몸이고, 손가락 마디는 굵어져 잘 펴지도 못하는 분들이란다. 그래도 성치 않은 몸으로 농사를 지어 도시에 사는 자녀에게는 물론, 가끔 약을 지어주는 고마운 약사님이라면서 먹거리를 들고 오신단다. 그냥 받을 수 없어 약값을 받지 않으면 한사코 손사래를 치고 도망치듯 가신다고 했다. 

시골 노인들에게 약을 지어 주면서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마음 찡한 이야기를 가끔 나에게 전해준다. 한 예로 3일분치 약을 지어간 다음날 또 와서 약을 지어달라고 하신단다. 의사의 처방전이 있어야 지어드릴 수 있다고 해도 그냥 지어주면 되지 뭘 그리 까다롭게 그러냐고 우긴다고 한다. 아무리 설명을 해도 먹히지 않아 답답하다고 했다. 가져간 약은 몸이 너무 아파 다 먹어버렸다면서.

또 어떤 노인은 약을 손에 쥐고도 왜 안 주느냐고 묻는 것은 너무 자주 있는 일이라 이젠 그 정도는 예사롭단다. 심지어는 약값을 손에 들고 있으면서도 돈을 냈다고 우기는 것도 거의 매일 있는 일이라 했다. 어떤 할머니는 약을 안 가져갔다면서 집에 갔다가 다시 와서 자기 약 어디 있느냐고 '분명히 드렸다', '아니다'로 망을 하다 화를 버럭 내면서 "내가 이 약국에 다시는 안 올거다"라고 문을 쾅 닫고 가버리는 경우도 있단다. 그러고는 며칠 후 나타나시어 겸연쩍은 웃음을 지으시면서 장롱 속에 약봉다리 걸어둔 걸 깜박하셨다고. 

노인이 되면 생각지도 못하는 일들로 신체적인 이상만 있는 것이 아니라 기억력도 감퇴하는 것을 보면서 참 마음이 아프다는 말을 한다. 

이런 노인들이 농촌에서 아직도 그 힘든 농사를 짓고 계신다. 죽향초 건너편에서 일하던 분도 초로의 노인이었다. 이 분들이 생산한 농산물을 너무 쉽게 아무 생각없이 우리가 먹고 산다. 사실 나도 이곳으로 오기 전에는 그랬다. 참 부끄럽다. 

정책적으로 농사짓는 노년층을 실질적으로 도울 수 있는 방법이 있으면 좋겠다. 물론 미미한 도움을 주기는 하는 것 같지만, 큰 도움이 되지 않는 것 같다. 이 곳에서도 일시적 일자리로 몇 사람을 파견하는 것이 있다. 도움을 주러 가는 분도 대부분 노인들이다. 

농촌에 살지 않았던 내가 아직 구체적인 생각이 떠오르지는 않지만, 모두 머리를 맞대고 좋은 방안을 찾아야 할 것 같다. 

앞으로는 기후 변화의 심각함으로 농사에도 많은 문제점이 있지 않을까 한다. 올 여름 어떤 곳에는 폭우가, 또 어떤 곳은 극심한 가뭄으로 재난을 겪고 있다. 

거기에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곡물이 수출되지 않아 여러 나라에 곡물가가 급등한 것을 실제로 느끼고 있다. 

이런 것을 느낀 우리에게는 먹을거리를 생산하는 일이 아주 중요함을 깨닫고 소홀함이 없이 농사짓는 농촌과 노인들을 살릴 방안을 모색해야 곧 우리 모두가 살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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