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창숙(77, 옥천읍 금구리) 시니어기자
윤창숙(77, 옥천읍 금구리) 시니어기자

내 선배 중 한 사람은 아주 재미있고 유쾌한 분이 있다. 어느 해인가 그와 만나기로 했다. 자기가 그날 일이 있으니 아예 자기가 일하는 곳 가까운 곳에서 보자고 했다. 그날 선배의 일은 예비군 교육과 관련된 것으로 처음 교육시작만 할 수 있도록 준비하면 그 이후 시간은 자유롭다고 했다. 그를 만나기 위해 교육하는 장소 가까운 곳에서 기다리면 된다고 해서 그렇게 했다. 나는 원래 학교 등교도 그렇고 약속도 대부분 내가 먼저 일찌감치 나가서 기다리는 게 습관화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선배가 약속된 시간보다 일찍 헐레벌떡 뛰어왔다. 그러고는 다짜고짜 내 손목을 잡고 저쪽으로 좀 가자. 누가 나를 부른다는 것이다. 영문도 모른채 "누가 나를 부르는데?" "글쎄 가보면 알아" 하면서 부지런히 빠른 걸음으로 나를 데리고 간 곳은 예비군 교육장이다. 어떤 중년 아저씨에게 "이분이에요"하고는 나의 선배는 가버렸다. 그 중년 남자는 "안녕하세요? 와주셔서 고맙습니다"라는 말과 동시에 예비군들이 엄청 많이 앉아 있는 교육장 안으로 나를 데리고 갔다. 

교육시작에 앞서 '국기에 대한 경례'와 '애국가 제창'이 있겠다고 마이크에 대고 이야기한다. 이게 뭐야? 왜 내 선배는 나를 이 곳에 서게 만들었을까? 순간 예비군 복장을 한 남자들만으로 족히 500-600명은 되어 보이는 큰 강당을 가득 메운 그들을 보니 가슴이 쿵쾅댔다. 그렇다고 '나 여기서 나갈 겁니다' 하고 말할 수도 없는 지경이다.

더구나 나의 선배가 데리고 왔으니 그의 입장을 생각해서도 그때 그 중년 남자는 예비군 모두를 일어서게 한 후 '국기에 대한 경례'를 크게 외쳤다. 나도 얼떨결에 국기를 향해 손을 왼쪽 가슴에 올렸다. 다음은 '애국가 제창'이다. 나에게 손으로 단위에 오르게 표시했다. 이 무슨 졸지에 지휘라니! 단상에 오른 나는 애국가의 4/4박자만 머리에 떠올랐다.

그 많은 예비군 남자들의 눈동자가 모두 나를 향하고 있음을 느꼈다. 나는 '동해물과 백두산이... '를 먼저 선창하고는 지휘했다. 그 지휘가 제대로 된 것인지 어떤지 생각할 틈도 없이 정신없이 손을 저어댔다. 그렇게 엉겁결에 새파란 서른 초반 나이에 그 많은 남자들 앞에서 꿈에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지휘를 하게 되다니. 

끝나고 강당 밖으로 나오자 나의 선배가 싱글거리며 나를 맞아주었다. 그러고는 한다는 소리가 "자기 정말 멋있게 잘 하더라" "뭐 언니한테 나 원수 진 거 있어. 골탕을 먹여도 유분수지. 이러는 법이 어디 있어" 하고 큰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강당 안에서 들을까봐 말도 못하고 그냥 눈만 흘겨댔다.

워낙 성격좋게 싱글벙글거리는 내 선배는 "저리가서 이야기 해줄게"하고 나를 데리고 강당을 벗어나 찻집으로 들어갔다. "사실 내가 오늘 너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했어. 야~ 애국가 지휘해주기로 한 사람이 소식도 없이 안 나타난 거야. 내가 얼마나 똥이 탔는지 아냐? 그래서 너를 시킨 거야.

담당 과장에게도 학교 때 걸스카웃을 한 사람이라 잘 한다고 말했더니 참 다행이라고 하며 불러오라고 했어. 암튼 상황이 그렇게 돼서 졸지에 세운 것이니 화내지 마. 알았지. 내가 대신 맛 있는 거 크게 쏠게"
휴유~ 지금 생각해도 아찔했던 난생 처음이자, 마지막인 지휘자 노릇을 하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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