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농에의 꿈 한껏 부풀어
작년엔 우수마을로 대통령 표창도
나태 벗고 탈바꿈

옛날 옥천의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1989년 옥천신문이 나오기 전 옥천 소식이 궁금하다고요? 옛날 신문을 파헤쳐 그 옛날 옥천 소식들을 속속들이 알려드립니다.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를 검색해보니 다행히 1920년도부터 옥천이란 키워드로 여러 기사가 나오더라구요. 그 중 흥미로운 기사를 찾아 독자 여러분께 알려드리고자 합니다. 100년 전 과거의 옥천에는 어떤 일이 일어났었는지 같이 읽어보아요. 

지난번 새마을운동의 우수마을로 소개됐던 옥천읍 소정리에 이어 안남면 청정리가 소개됐다. 정부의 새마을운동의 프로파간다로 읽힐 수도 있지만, 그 시대의 시대상을 알 수 있는 기사이기도 하다. 마을을 바꿔보고자 서로 노력했던 협동과 연대의 시간이었기를. 지금은 또 많이 바뀌었다. 그 때 새마을운동의 불을 당긴 유동민씨가 계시다면 한 번 만나보고 싶다. 옥천신문 황민호 기자
지난번 새마을운동의 우수마을로 소개됐던 옥천읍 소정리에 이어 안남면 청정리가 소개됐다. 정부의 새마을운동의 프로파간다로 읽힐 수도 있지만, 그 시대의 시대상을 알 수 있는 기사이기도 하다. 마을을 바꿔보고자 서로 노력했던 협동과 연대의 시간이었기를. 지금은 또 많이 바뀌었다. 그 때 새마을운동의 불을 당긴 유동민씨가 계시다면 한 번 만나보고 싶다. 옥천신문 황민호 기자

옥천군 안남면 청정리, 58가구 268명이 살고 있는 이 마을에도 새마을사업은 환경조성단계를 넘어 소득증대로 내딛고 있다. 논밭은 이모작으로 좁은 경지를 최대로 이용해 보자는 주민들의 의지는 이 마을 어디서나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논과 밭에는 마늘, 담배, 감자 등이 이모작되고 있으며 1천500평의 뽕밭에도 두락 사이마다 약초와 깨 등이 심어져 있다. 울안과 담장 밑에는 이제 갓 이식해놓은 배나무, 대추나무 등이 줄줄이 자라고 있고 손바닥만한 빈터에도 해바라기며 배추밭이 일궈져 있다. 

■ 유실수가 내일 기약

곧게 뻗어나간 농로, 새로 개축된 주택이며 고샅촌락의 좁은 골목길, 5-10년후를 내다보고 마을 뒷산에 심었다는 무수한 유실수 등은 이 마을의 솟구치는 의욕을 나타내고 있지만, 새마을 바람이 불기 전인 70년 만해도 희망찬 마을은 아니었던 곳. 

"나태한 생활태도 때문에 빚더미에 묻혀 살면서도 농한기에는 술과 도박이 판을 치던 마을이었죠." 마을의 흉을 거침없이 털어놓는 주민들은 그만큼 현재의 건실한 생활태도에 자신을 갖고 있는 듯 했다. 

새마을지도자 유동민(57)씨는 당시 새마을 운동이 전국에 번지고 있어도 이 마을은 논두렁길 하나 닦자는데도 고개를 저을 만큼 폐쇄되고 완고한 마을이었다고 했다. 편리해진 농사일보다 당장 한치의 땅이라도 농로에 빼앗기는 게 싫다는 고루한 생각때문이었다. 

■ 새 담장으로 고쳐

그러나 유씨를 중심으로 뜻있는 주민들이 끈질긴 설득을 펴 농로를 새로 넓혀놓자 땅값도 오르고 농사능률도 높아져 차차 주민들도 마을개발에 관심을 보여갔다. 이때부터 유씨 등은 새마을 사업을 바짝 다그쳐 마을 안길 넓히기 하수구 개량을 해나갔고 농한기를 이용, 마을 담장 1천200미터를 모조리 헐어버리고 시멘트 블록으로 새담장을 쌓아갔다. 마을이 생긴 이래 최대의 역사였지만, 주민들의 부담과 힘으로 해낸 것이다. 

아궁이 개량, 부엌 개량, 소하천 개보수, 간이상수도공동빨래터 설치 등 한번 불붙기 시작한 새마을운동의 여파는 불과 2년 동안에 마을 환경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 딴 주민들도 개심

그 결과로 이 마을은 지난해 12월 우수새마을로 선정, 대통령 하사금 1백만원을 받게 되자, 주민들의 새마을사업에 대한 인식도 크게 달라졌다. 그 때 까지도 새마을사업에 대한 회의를 품었던 다른 주민들도 마을을 유복하게 만드는 사업이라는 생각으로 굳게 뭉쳐졌다. 

1백만원으로는 마을 앞산에 1천500여평의 뽕밭을 조성, 주민 공동으로 가꾸어 나갔지만, 봄, 가을로 두 달만 일하면 비교적 높은 소득을 올릴 수 있다는 뽕밭이었지만, 주민들의 일손은 한층 바빠졌다. 자기집의 농사일과 함께 뽕밭의 뒤치다꺼리를 하는 동안 협동정신도 높아졌다. 주민들은 마을 단위로 일해 나가는 습성을 익혀 농약살포며 시비 등도 모두 마을 공동으로 추진해 나갔다. 

■ 부인네들도 앞장

마을부인네들은 농사일로 바쁜 남자의 일손을 덜어주기 위해 뽕밭을 전담해 가꾸었고 필요한 잠구도 산에서 베어온 싸리나무로 스스로 밤을 새우며 장만해 나갔다. 5정보의 넓은 송정 저수지에는 8만여 마리의 잉어새끼를 넣어 3년 후 연간 3천만원의 소득을 예상하게 됐고 집집마다 한우, 돼지, 닭 등을 키우며 보다 알찬 살림살이의 기대에 부풀고 있었다. "벌여놓은 사업들, 해야할 일들이 너무 많아 이제 게으름을 피울 수 없게 됐다"는 주민들로 마을은 술과 도박이 사라진 새마을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개미처럼 일하여 부자마을 만드세"를 마을의 지표를 담은 표지판 밑으로 아침 일찍 줄지어 일터로 나가는 주민들의 밝은 표정에는 '잘 살 수 있다'는 굳은 신념이 새겨져 있다. 

경향신문 1974.9.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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