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교 넘치는 어느 가수의 노래마냥 나도 대전 찍고, 영동 찍고, 옥천 찍고, 제천 찍고, 옥천을 마지막으로 찍었다는 어머니. 철도원이던 남편 따라 여기저기 다니다보니 짐 보따리 몇 번씩 싸보셨다. 그렇게 여든 살을 넘고 인생의 우여곡절과 모진 풍랑을 다 넘었다고... 지난 시간을 회억해보면서 ‘고단했지만 그래도 살만했어’ 라고 방점을 찍어주셨다.

■ 증약 사는 나는 내 고향 비래리가 코앞이다. 

80년 넘게 멀리도 왔다 싶지만 나는 내 고향 비래동 코앞에 살고 있다. 나는 1940년 비래리에서 태어났다. 지금은 비래동이지만 그 옛날에는 비래리라는 이름으로 불리었다. 옆 동네는 더퍼리라고 지금도 더퍼리는 나이든 우리들에게 향수 같은 이름으로 남았다. 우리 농사짓고 살던 그 터에 지금은 다들 그렇듯이 아파트가 쭉쭉 들어섰다. 나는 3남매 중 막내였다. 

언니와는 영자 돌림으로 영분 영자로 이름을 나눠가졌다. 부모님은 농사를 지으셨다. 논농사 밭농사를 주로 지으셨고 나도 유년시절부터 부모님 일손을 도우며 큰 애기로 성장했다. 새참을 광주리에 담아 나르기도 하고 모를 심기도 하면서 시골살이 하는 여느 집 큰 애기와 별반 다르지 않은 10대의 일상을 나도 살았다. 그렇게 큰 애기로 부모님 슬하에서 어느덧 스무 살이 되었다. 지금은 스무 살이 되어도 마냥 어리광쟁이들이지만 우리 때는 인생의 기로에 서는 결혼이라는 운명과 만나는 두려운 시기였다. 언니가 시집을 가면서 언니의 결혼은 곧 나의 결혼으로 다시 이어졌다. 

■ 형부 왈, “아버님, 영동에 좋은 총각 있으니 처제주세요” 

어느 날 문득 형부가 친정아버지에게 “아버님 영동에 좋은 총각 있으니 처제주세요” 라고 아버지에게 말씀을 드렸다. 여자가 물건도 아닌데 그 시절에는 주니 마니 딸을 달라느니 그런 말들을 거침없이 썼다. 나는 쑥스럽고 부끄럽기만 했다. 형부에 대한 믿음으로 형부가 좋다는 사람이라면 볼 것도 없다며 선도 안보고 결혼을 했다. 내 나이 방년 스무 살. 결혼은 그렇게 성사되어 난 영동으로 시집을 가게 되었다. 혼례상에서도 쑥스러워서 남편 얼굴을 제대로 못 봤다. 여느 새댁들은 궁금한 마음에 몰래 훔쳐보기라도 한다더만 나는 그런 용기도 없었다. 그렇게 쑥스럽고 어색한 혼례를 올리고도 60년을 해로하면서 살고 있다. 그래서 해로하는 부부를 천생연분이라고 일컫나 보다. 

■ 휴...같이 성장하는 7남매, 넷은 시동생이요 셋은 우리 3형제 

비래동에서 태어나 20년을 살고 낯선 땅 영동으로 시집을 갔다. 남편은 철도원이었다. 시집가서 8년을 영동에서 살고 충북 제천에서 20년을 살았다. 철도학교가 있던 영주는 집안이 어려운 청년들에게 철도원이 되는 기회를 주던 산업화의 거점 지역이었다. 남편도 철도학교를 나와 철도원으로의 소박한 삶을 시작한 때였다. 어르신을 모시고 살았지만 시어머님이 일찍 돌아가셔서 시어머니 시집살이는 할 시간도 없었다. 하지만 세상에 공짜가 없어 시어머니의 빈자리를 내가 채워야 하는 짐이 나에게 남겨졌다. 남편은 5남매의 맏이여서 시동생이 6살, 9살, 12살 거기에 17살의 시누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 인생에 가족으로 찾아온 남편의 동생들, 부담으로 다가오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나도 엄마 품을 벗어난 지 오래지 않을 때라 나도 아직은 영글지 못할 때였다. 시동생들은 우리 아이들과 같이 자랐다. 우리 아들 셋, 정태 현태 규태. 다들 착해서 삼촌 고모들과도 잘 지냈다. 시어머님이 일찍 돌아가셔서 시동생과 시누에게 나는 엄마의 자리를 내어주어야 했다. 시동생이 우리 아들과 8년 차이다. 형님뻘이지만 그렇게 한 가족으로 성장했다. 같이 크면서 나는 우리 애들보다 시동생한테 더 정성을 들였다. 옷을 사 입혀도 삼촌부터 고모부터 그리고 우리 아이들이 대물림을 했다. 우리 아이들한테 먼저 좋은 옷 입히고 맛있는 것 더 주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았다. 내 배 아파 낳은 아이들이다. 하지만 시집 식구들 먼저 건사하는 게 도리라고 생각했고 우리 아이들도 성장하면서 보채지 않고 삼촌 고모와 어울렁 더울렁 잘 지내줬다. 기특한 녀석들이다. 

서로 의지하며 살았지만 아이들과 달리 내 마음속에 불편한 것들이 왜 없었을까. 시집살이 안한 여자가 없듯이 살면서 다 고단한 시간들이 있다. 남의 시선에 내 속내가 보일 리 없다. 나만의 애끓음이 있었다. 고만고만한 시동생들과 우리 아이들이 같이 성장하는데 힘든 일이 없었다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다 잊어야 한다. 나는 다 잊었다. 아픈 기억은 잊고 좋은 추억만 남겨두었다. 그 어려운 시절을 다들 보내고 잘 성장해서 사회인으로 한 몫을 다 해내고 있다. 

■ 자식처럼 돌보던 시동생한테 때마다 용돈 받는 형수

명절 때마다 시동생이 슬쩍 내미는 용돈에 고단했던 지난 시간이 한순간에 녹아내린다. 용돈을 받아서 맛이 아니다. 그 마음씀씀이에 지난 시간이 눈 녹듯이 녹아내리고 가슴한편이 따뜻해진다. 고마운 시동생이다. 돈 보다 더 귀한 마음을 알아준다는 것, 고마움을 나눌 수 있다는 것, 난 시동생의 그 마음에 내 인생이 귀하고 값있어진다. 때마다 나를 챙겨주는 시동생, 이젠 같이 늙어가며 노년의 친구처럼 다정한 사람들이다. 

대한민국에 시동생한테 때마다 용돈 받는 형수가 과연 몇이나 될까? 돈의 액수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그저 그 마음을 드러내는 정은 억만금을 주고도 살 수 없다. 돈으로 매길 수 없는 인간애의 가치가 있다. 고단한 시간이 인내와 만나면 달콤하고 온기 가득한 시절을 선물하는 인생의 이 아름다운 가르침을 나도 맛보게 되니 마냥 감사하다. 살면서 피할 수 없는 고단한 시간들은 다 잊어야 한다. 마음에 담고 있으면 나만 힘들다. 좋은 것만 기억하고 살아도 모자란 인생이다. 지금이 찬란한 봄날, 시동생도 감사하지만 우리 며느리 자랑은 두고두고 해도 모자람이 없다. 

■ 내 자랑, 자매 같은 우리 며느리들

며느리들도 셋이 동기간처럼 우애 있게 지내고 큰 며느리가 역할을 잘하고 있다.

딸 없는 우리는 세 며느리를 맞으며 딸을 얻었다. 우리 부부를 아이처럼 챙기며 해외며 국내 구경을 시켜주고 맛집을 앞다투어 데리고 다니느라 다들 손이 바쁘다.

휴대폰으로 검색을 하는지 열심히 들여다보고 지들끼리 여기나 좋네 저기가 좋네...우리는 그 모습을 구경하느라 내내 마음이 흡족하다. 여든이 넘어도 이렇게 눈부신 시간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 짐작도 못했다. 

남편의 얇은 월급봉투로 시동생들 우리 아이들 먹이고 입히고 살림하느라 몰래몰래 한숨도 쉬고 눈물도 짓던 그 시절을 이렇게 보상받다니... 바라지 않았기에 더 감사한 열매들이다. 

그저 하루하루 충실하게만 살아왔는데 넘치는 보상으로 오늘을 맞이한다. 대전에 사는 큰아들이 20분 거리 우리 집에 수시로 드나든다. 같이 살자고 하지만 나는 옥천이 좋고 20분이면 대전에 나갈 수 있는 우리 동네가 노년의 나에게 가장 큰 평화를 준다. 물론 건강이 따라줘야 우리 부부 시골 생활을 계속 할 수 있을 텐데... 나이 들어 한동네서 만나 가족이 된 이웃들. 누군가 안 보이면 걱정되고 좋은 일은 서로 축하하고 슬픈 일은 아픔을 같이 나눈다. 다시 청춘이 되었다. 아침이면 출근할 수 있는 노인정도 감사하고 더불어 그곳에 같이 모이는 우리 식구들은 더 감사하다. 인생의 찬란한 봄날이 바로 ‘지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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