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옛날 옥천의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1989년 옥천신문이 나오기 전 옥천 소식이 궁금하다고요? 옛날 신문을 파헤쳐 그 옛날 옥천 소식들을 속속들이 알려드립니다.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를 검색해보니 다행히 1920년도부터 옥천이란 키워드로 여러 기사가 나오더라구요. 그 중 흥미로운 기사를 찾아 독자 여러분께 알려드리고자 합니다. 100년 전 과거의 옥천에는 어떤 일이 일어났었는지 같이 읽어보아요. 

■ 육여사 친정집에 호랑이새끼 3마리(경향신문 1965년 7월17일자)

지난 14일 상오 10시쯤 박대통령 처가인 옥천읍 교동리 육종관씨 집 울안 나무밑에서 호랑이 새끼 3마리가 발견됐다. 이 호랑이 새끼는 육씨 집 고용인 장홍필(20) 군이 발견했다. 이 호랑이는 상자속에 가두어 놓았는데 인근 사람들에 의하면 밤 10시가 되면 어미 호랑이가  담을 뛰어넘어 방문살을 긁어대서 무서워 큰일이라면서 호랑이 처리에 골치를 앓고 있다. 

▶ 60년대만 해도 호랑이가 나타나는 것이 대수롭지 않았나보다. 경사나 화제라기보다 골치를 앓고 있다니 지금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다. 호랑이 찾아보기가 귀하니 말이다. 호랑이는 동물원에나 가야 볼 수 있는 동물이 됐다.

 

■ 밭갈다 유물발견 충북 옥천 삼국시대 것 항아리 등 58점 (동아일보 1964년 6월29일자)

삼국시대의 것으로 짐작되는 항아리, 접시, 솥 등 58종의 유물이 옥천읍 양수리 한태봉(48)씨네 밭에서 발굴되었다. 이 유물들은 지난 25일 한씨가 밭을 갈다가 발견, 27일까지 발굴을 계속하여 파낸 것인데 솥 13개, 놋그릇 한개, 대접 8개, 접시 35개 등 모두 58점으로 이중에는 무게 2관, 높이 1미터의 솥이 있는데 옥천교육청에서 충북도교육위에 감정 의뢰를 했다. 유물이 발굴된 지역 일대는 옛날 백제시대의 성터 또는 절터로 알려져 있다. 

▶ 유물은 옥천에서 많이 발견되었겠지만, 그 유물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감감무소식이다. 옥천에 박물관이 일찌감치 생겼더라면 도시 박물관에 빼앗기지 않았을텐데 말이다. 60년이 다 된 지금이라도 박물관 건립이 된다고 하니 다행스러운 일일까. 오래 전 발굴된 유물도 다시 돌아왔으면 좋겠다. 

 

■ 만물상 (조선일보 1968년 4월13일자)

충북 청성고교(아마 청산고의 오기로 보임) 2년생 이승재군은 신문배달로 공부를 하는 고학생이다. 이 군은 순전히 자기 힘만으로 '옥천어린이신문'을 주에 한번씩 만들어 옥천, 영동, 보은 등지의 두메산골 어린이들에게 무료로 돌리고 있다. 타블로이드판의 이 신문은 발행부수가 자그마치 3천여부, 주인공 이군은 이렇게 말한다. '밤을 세워 프린트한 신문을 아침 일찍 돌리고 다시 취재, 편집, 인쇄를 준비합니다.

남의 도움없이 신문을 만들다보니 때로는 학교에 내야 할 돈까지 써버리는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읽을거리와 새소식에 굶주리고 있는 두메의 어린이들이 제가 만든 신문을 기다리고 있을 것을 생각하면서 언제나 새힘이 솟곤 합니다. 갸락한 일이다.

19세 난 소년치고는 너무나도 갸륵한 마음씨요. 행동이다. 특히 많은 것에 굶주리면서도 그것을 달랠길 없이 자라고 있는 어린 싹들에게 관심이 돌아간 이 소년의 심정은 그대로 맑은 시냇물이요. 흐릴 줄을 모르는 거울 그 것이다. 이래서 우리는 아무리 세상이 메마르고 거칠다해도 한줄기 훈훈한 입김을 간직하면서 힘내어 살아보려는 의욕을 갖는다. 

▶ 60년대에 이런 학생이 있었다니 대단하다. 단순 신문 배달이 아니라 취재 편집 인쇄까지 다해서 보은, 옥천, 영동에 신문을 발간해 보냈다니. 이게 어떻게 가능했던 일이었을까. 이승재 학생은 1967년 9월 중앙청소년보호대책위원회가 청소년선도의 달을 맞아 12명의 모범청소년을 표창했는데 유일하게 충북에서 혼자 들어가 있다.

정말 대단한 청소년이다. 다른 신문에는 '옥천어린이'란 주간신문을 26회에 걸쳐 1천970부를 발간 같은 면의 각 국민학교 어린이에게 배부'라고 공적이 쓰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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