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옛날 옥천의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1989년 옥천신문이 나오기 전 옥천 소식이 궁금하다고요? 옛날 신문을 파헤쳐 그 옛날 옥천 소식들을 속속들이 알려드립니다.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를 검색해보니 다행히 1920년도부터 옥천이란 키워드로 여러 기사가 나오더라구요. 그 중 흥미로운 기사를 찾아 독자 여러분께 알려드리고자 합니다. 100년 전 과거의 옥천에는 어떤 일이 일어났었는지 같이 읽어보아요. /황민호 기자

■ 도장노동야학 (1929년 2월 15일 동아일보)

충북 옥천군 청성면 도장리에는 삼개월 전 동내 향학이 충일함에 감동되어 유지의 분투 노력으로 노동야학을 신설하고 삼십여 무산 아동을 성심으로 교양한다는데 강사는 김용훈, 조대제, 육남수 등 삼씨인바 무보수라더라. 

▶ 천 곳곳에 야학이 있었고 지역 유지들이 이를 적극 도왔다는데 '노블리스 오블리제'가 절로 느껴진다. 

 

■ 잠실제공하여 야학원 설치 옥천 오동리서 (1931년 2월3일 동아일보)

충북 옥천군 군서면 오동리에서는 농촌문맹퇴치를 막으려는 목적으로 지난해 12월 중순에 리동우, 김기성씨의 발기로 야학을 설치하고 열심히 교수하는 중이라는데 학생은 남녀 40여 명에 달한다고 하며 교사 리동우씨는 교실이 협착한 것을 유감으로 알고 자기의 소유인 잠실을 무료로 제공하였음으로 일반의 칭찬이 높다 한다. 

▶ 각 마을별로 야학들을 세웠는데 마을 주민들이 돈을 보태서 학교를 세우고 교실을 빌려줄 정도로 지역사회의식이 높았구나고 새삼 느낄 수 있다. 

■ 영예의 전사 이인석 가정방문기 전사는 남자의 당연사 부군에 못지 않은 부인의 결의 용전분투에 각계 찬사 (1939년 7월9일 동아일보)

조선지원병으로 최초의 영예스러운 전사를 하여 모든 사람으로부터 그 용전분투에 칭송을 받은 이인석 군 가정을 본사대전지국으로 하여금 방문하여 위문토록 한 바 있었다. 이 곳은 옥천군 군서면 하동리로 이천천, 오오씨의 장남으로 소학교를 마친 뒤에 옥천농업실수학교를 졸업하고 동교 조수로 2년간 재근하다가 지원병으로 입영하였든 터였다.

이 군의 가정에는 양친과 남녀동생이 있고 이군의 처와 세살 된 딸이 있었다. 생활이 곤란함에도 불구하고 지원병을 지원하였던 터인데 이 군의 부인은 전선에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마는 남자의 당연한 일이오니 슬픈 것은 조금도 없습니다하고 부군에 못지 않은 굳은 뜻을 보였다. 

■ 고 이인석 군 유족 조문 (1939년 10월10일 조선일보)

충청북도의 한재 상황을 시찰하는 중인 김광척상은 9일 오후 5시 옥천군청에서 이 곳 출신으로 지원병 최초의 명예로운 전사를 한 이인석 상등병의 유족과 대면하여 간곡한 조문과 아울러 격려의 말을 주었다.

이 날 이군의 유족인 그의 아버지 이천천과 어머니 서일순 아내 유서분 등 세 사람은 서면 하동리에서 30리 길을 걸어 군청에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척상은 군청에 도착하자 곧 군수실로 이들을 불러드려 만나보고 간곡한 조문을 하여 감격스런 광경을 이루었다. 

▶ 전형적인 프로파간다이다. 일제시대 민족지가 어떤 모습을 보였는지 이 짧은 기사에 단연 확인할 수 있다. 옥천 출신 이인석은 일본제국주의와 자칭 민족지라고 말했던 조선일보, 동아일보에 의해 영웅화됐고 이를 계기로 일제는 조선지원병을 많이 모집하여 싸우게 하는 계략을 언론을 통해 만들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우리 옥천의 슬픈 역사이기도 하다.

아래 조선일보 기사는 조문을 가는 게 아니라 유족들을 군청까지 30리길을 걸어들어오게 만들어 조문을 했다는 해괴망측한 행위와 기사이다. 이에 대해 감격스럽다고 표현하다니. 근조 조선일보다. 

■ 옥천불상사, 사상자 7명 (1947년 9월5일 조선일보)

지난 2일 정오경 충북 옥천군 청산면 지전리에서 좌우 충돌이 생겨 사망자 2명, 중상자 5명을 내었다 하는데 원인은 옥천군 우익 모단체 계몽대가 강연차로 지전리에 도착하자, 이를 방해하고자 좌익산하각만체원들이 몰려와 구타한데서 발단된 것이라 하며 이 날 동원된 좌익의 수는 약 5천명에 달하였다 하는 바 사망자와 중상자는 모두가 우익 모 단체원이라 하는데 이 급보를 접한 옥천시에서는 즉시 기동대를 출동시켜 진압시켰다고 한다. 

▶ 옥천신문 2013년 옥천읍 문정리 마을탐방에 보면 이런 문장이 나온다. '구읍에서 서북청년단으로 활동했던 사람들이 청산의 좌익활동을 했던 사람들에게 곡괭이로 찍혀 돌아왔다더라'는 이야기가 이 기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당시 구읍에는 서북청년단 등 우익이 많았고 청산에는 좌익이 많았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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