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옛날 옥천의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1989년 옥천신문이 나오기 전 옥천 소식이 궁금하다고요? 옛날 신문을 파헤쳐 그 옛날 옥천 소식들을 속속들이 알려드립니다.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를 검색해보니 다행히 1920년도부터 옥천이란 키워드로 여러 기사가 나오더라구요. 그 중 흥미로운 기사를 찾아 독자 여러분께 알려드리고자 합니다. 100년 전 과거의 옥천에는 어떤 일이 일어났었는지 같이 읽어보아요. 

 ■ 구체적 실행을 결의 1923년 5월21일자 조선일보

형평사 지방대표 회의에서 각지에 지사와 분사를 두기로 하고 의연금이 당일에 이천원이 모여 경상남도 진주에 있는 형평사에서는 창립축하식을 성대히 거행하였다 함은 이미 보도한바 있다.

다시 지나간 14일에 진주청년회관안에서 지방대표 300여 명이 오히어림시의 장 신현수씨의 사회 아래에 장래 유지 방침과 여러가지 중요한 사항을 결의한 결과 사내에는 서무부, 재무부, 외교부, 교육부, 정행부의 다섯부를 두기로 하였으며 장래유지 방침에 대하여는 각 지방대표와 개인의 의연금으로 자본금을 삼아 영구히 사업을 실행하여 가기로 가결하였는데 현장에서 의연금이 2천200여원이나 답지하였으며

또한 상무위원 한 사람을 두고 매달에 상당한 수당을 지분하여 구체적으로 사무를 집행케하기로 하였으며 각도와 각 군에 지사와 분사를 설치하여 형평운동을 대대적으로 확장하고자 현장에서 부산, 대구, 논산, 옥천의 네곳에 지사를 설치하기로 결정하고 불원간에 제2 형평대회를 충청도 방면에서 열 계획이라 하여 그 다음에는 임원을 선정하고 하오 10시에 폐회를 하였는데 씨명은 아래와 같다더라. 

▶ '공평은 사회의 근본이요. 애정은 인류의 본령이라. 그럼으로 아등은 계급을 타파하여 모욕적인 칭호를 폐지하며 교육을 장려하여 우리도 참 사람이 되기를 기함이 본사의 주지니라. 우리도 조선민족 2천만의 분자이며 갑오년 6월부터 칙령으로 백정의 칭호를 없이하고 평민이 된 우리들이다. 애정으로 상부상조하여--- 공동의 존영을 기하고자 40여 만명이 단결하여---그 주지를 선명히 표방코자 하노라"

1923년 4월25일 경남 진주의 한 강당에서 백정 출신 지역 재력가와 깨인 양반 출신 지식인 등 80명이 모여 저울같이 공평한 사회라는 뜻의 형평사를 조직했다. 

진주에서 형평사가 만들어졌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전국적으로 형평운동이 불처럼 번져갔고 부산, 대구, 논산, 옥천에 지사를 설치했고 이어 정읍에 분사를 설치했다. 부산, 대구와 같이 옥천에 지사를 설치할 정도면 옥천에서도 형평운동의 불길이 거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형평사 운동에서 주목할 것은 이 운동이 처음부터 국제연대 투쟁을 추구했다는 것. 형평사의 선배격인 일본의 수평사는 형평사 창립대회에 축사를 보내오기도 했다. 이 기사를 보고 옥천의 형평사 조직과 형평운동에 대해서 자세히 알고 싶어졌다. 

 

■ 광부가 참사 충북 옥천에서 1929년 2월22일 동아일보

충북 옥천군 청산면 명티리 산야월명흑연광에서는 지난 1월20일에 광부 임재수, 사이라는 사람이 동료 사오언과 같이 광내에 들어가 각기 가스등을 켜고 작업하던 중 벽상으로부터 암석이 떨어져서 무참히 치어 죽었는데 동 광부들이 총출동하여 장례를 집행하였으며 광업소에서는 장비 80여원을 지출하였고 사망자 유족으로는 그의 처와 10세 미만의 유아 두 사람 뿐인데 잔명을 부지할 길이 없는바 동광업소주인 삼포씨의 알선으로 그 광업소부산본점에서는 위자금으로 일금 100원을 주기로 하였다더라. 

▶ 이곳에서 생산되는 흑연은 질이 좋기로 이름났으며 일제가 패망한 후에도 계속돼 197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광산촌에다 뜨네기들까지 들어와 3백호를 헤아리는 큰 마을을 이루었다.  

흑연광산이 번성했을 당시 청산장은 명티리 광산에서 월급이 안나와 사람이 나가지 않으면 장이 제대로 서질 않았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로 막강한 경제력을 자랑하기도 했다. 흑연광산이 사양화 된 것은 7O년대 중반을 지나면서부터. 광산이 사양화의 길을 걸으면서 마을은 급속도로 줄었고 90년쯤 완전히 폐광되었을 때는 현재와 같은 수준에 달해 있었다.

일제강점기 당시 청산면 명티리 월명광업소에서 생산된 흑연을 수레로 실어나르는 사진이 발견됐다.(2015년 3월27일자 '<발굴> 청산 명티리 신사참배 추정 장소 발견'기사 참조) 1982년 서문당 출판사에서 발간된 '사진으로 보는 독립운동 하권, 임정과 광복'편에 월명광업소 관련 사진이 있었던 것.

이 자료는 옥천향토자료전시관 전순표 관장이 소장하고 있었다. 사진 설명에는 '충북 옥천군 월명광산에서 흑염 광석을 우마차로 이송하고 있다.'고 적혀 있다. 여기서 흑염은 흑연의 오타로 추정된다. 이 자료를 옥천신문에 알린 전순표 관장은 "일제강점기 당시 월명광산에서 캐낸 흑연을 우마차에 실어서 영동 용산을 통해 영동 황간으로 운반 하던 사진"이라며 "청산과 청성지역은 옥천지역 광산의 보고다. 이러한 역사에 주민들이 많은 관심을 가졌으면 한다"고 전했다.

 

■ 비밀출판물 문제로 청년다수 검거 청년회 간부의 가택을 수색, 옥천서에서 대활동 1929년 12월24일 조선일보

충북 옥천경찰서에서는 지난 15일에 고등계형사가 옥천군 청산읍내에 급거 출상하여 동 주재소 소원과 한가지로 청산청년회 간부 김용석, 송행순, 전상각 삼씨 외 두 사람의 가택을 일일이 수색하는 동시에 모종의 비밀출판물을 다수 압수하고 다섯사람을 검거하여 익일인 16일 오전 9시에 자동차로 옥천서로 호송하는 등 아연대 활동을 시작하였는데 그 외에도 전 사건의 관계자를 잡으려고 영동서에 체포를 의뢰하여 동 서에서는 즉시 영동군 상촌면을 비롯하여 경북 김천방면까지 경찰을 출장케 하였다더라. 

▶ 혹시 독립운동의 일환이 아니었을까 추정해본다. 일제시대 비밀출판물로 청산 청년회 간부를 검거했다면 어떤 일이었을까. 기사에는 도무지 나오지 않는다. 당시 청산 청년회가 활발히 운영되었다는 것은 예상할 수 있지만, 어떤 출판물일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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