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옛날 옥천의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1989년 옥천신문이 나오기 전 옥천 소식이 궁금하다고요? 옛날 신문을 파헤쳐 그 옛날 옥천 소식들을 속속들이 알려드립니다.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를 검색해보니 다행히 1920년도부터 옥천이란 키워드로 여러 기사가 나오더라구요. 그 중 흥미로운 기사를 찾아 독자 여러분께 알려드리고자 합니다. 100년 전 과거의 옥천에는 어떤 일이 일어났었는지 같이 읽어보아요. 

 ■ 옥천의 두가지 문제, 면소와 우편소 이전 문제

충북 옥천은 현 역전과 구읍내와는 거리가 약 십수정인데 옥천면사무소는 현 구읍내에 있는 바 역전의 주민들은 면사소를 역전 부근으로 이전치 아니하면 불편이 심하다 하여 적당한 곳에 이전할 계획이라 하는 바 구읍내의 조선인 4백여 호 주민들은 군청과 금융조합, 등기소 등을 이미 역전으로 이전하여 구읍내가 적막한 가운데 이제 면사무소를 이전하면 시장도 이전하게 될 것이니 여차하면 사백년 역사의 구옥천읍은 근본적으로 파멸케됨이라하야.

과반수가 넘는 구읍 옥천주민들이 대회합을 하여 협의한 결과 위원을 뽑아 충남도지사에게 이전 반대 운동을 할 계획이라 하며 또 일편에서는 현재 옥천우편소를 구 금융조합가옥을 개조 건축하여 이전하고자 하는 중 역전부근 주민은 이를 반대하는 등 당국에 반대 이유를 진정하기로 한다더라.

▶ 1923년 7월31일자 동아일보

이 때부터 현 읍과 구읍 간 갈등이 본격적으로 불거졌나 싶다. 기차 역이 서면서 주도권을 신읍이 완전히 가져갔고 주요 기관 이전이 본격화되었는바 마지막에 면사무소까지 신읍으로 옮겨가려 하자, 구읍 주민들이 반발한 것.

대회합을 거쳐 400여 명이 서명을 했다하니 면사무소를 이전하면 구읍이 쇠락한다고 집단적으로 항의를 한 모양이다. 면사무소가 이전되면 시장도 이전되고 유동인구가 감소하면서 구읍의 경제가 바닥을 칠게 뻔했기 때문에 이런 항의나 나왔던 것으로 추정한다. 그리고 이에 대해 신읍 주민들도 만만찮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구읍으로 옮겨가는 우체국에 대해 적극 반대하는 등 신읍 중심을 주장했던 것이다. 구읍은 그 후로 쇠락의 길을 걸었고 지금도 신읍과 구읍의 단절이 지역사회의 중요한 과제이기도 하다. 옥천면은 1949년 8월 읍으로 승격했다. 그리고 현재 구읍과 신읍의 중간지점에 읍사무소가 만들어졌다.

우체국은 신읍 주민들의 반대가 먹혔는지 현재의 자리에서 100년을 구가했고 구읍에는 1980년대 후반에 우편취급국이 생겼으나 2015년 11월30일자로 폐국 조치됐다. 

 

■ 옥천 잠업 호황

충북 옥천군농회에서는 월30일 오전 9시부터 본 군내 산출한 봄 잠견공동판매를 개시한바 금년 봄에는 양잠 성적이 양호하여 동 15일까지 13일간 판매된 석수가 600석의 대금 4만7천272원인데, 작년과 비교하면 3배가 증가되어 양호한 성적을 정한바 군서, 군북 양면에서는 대전군으로 반 수 이상 수출되고, 청산, 청서, 청남, 안남 등 4개 면에서는 영동군으로부터 반수 이상 수출된 결과로 11년도보다 240석대 금1만6천272이원이 증가되었더라. 

▶ 1923년 7월6일자 조선일보

잠업이라 하면 요즘 세대들에게는 생소할 것이다. 잠사업이라고도 하는데 뽕나무를 재배하여 누에를 쳐서 생사를 양산하는 양잠업과 제사업을 가리키는 산업용어이다.

뽕나무를 재배하여 누에를 쳐서 고치를 생산하는 과정을 흔히 양잠업이라고 하고 생산된 고치를 원료로 공장에서 생사를 생산하는 과정인데 이걸 제사업이라고 한다. 옥천은 잠사업 중에서 양잠업을 했던 것이다. 생사라 하믄 고치에서 뽑아낸 실을 말한다.

여기서 눈에 띄게 봐야 할 것이 당시에 청산면, 청서면, 청남면이 존재했다는 것이다. 청산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까지 청산군이었고 그 안에 서면과 남면이 존재했다. 1739년 여지도서에 보면 남면은 서평리를 비롯하여 4개리 463호에서 15세 이상 남녀가 2천29명이 살았고 서면은 황음리(구음리)를 비롯하여 4개리 475호에서 15세 이상 남녀가 2천106명이 살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1914년 4월1일 군 통폐합과 청산군이 없어지고 옥천군에 합병됨에 따라 남면을 청남면, 서면을 청서면으로 부르고 옥천군에 속했다. 1929년 4월1일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청남, 청서 두 개 면을 합병하면서 청성면으로 부르게 된 후 현재에 이르는 것.

그렇기 때문에 23년 전 조선일보에서는 청서면, 청남면이 그대로 기재된 것. 그 때까지 옥천의 위상은 컸나보다. 잠업의 위상이 전국지에도 등장할 정도이니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잠업 자체가 생소한 말이 됐다. 격세지감이고 상전벽해다. 

 

■ 이씨의 자선

옥천군 옥천면 대천리에 사는 이강태씨는 가산도 풍족치 못한 처지이나 항상 자선사업으로 종사하여왔다. 근처 생활난으로 무수한 고통을 받고 있는 빈민을 위하여 마암, 대천, 양수, 금구 등 4개 마을의 빈민들의 올해 봄 세금 전부를 자담하여 납부하였음으로 인근에서는 이씨의 자선심을 막불칭송이라더라. 

▶ 1923년 5월7일

어려움 속에서도 선인은 나타나게 되어 있다. 대천리 이강태씨의 선행은 마을을 넘어 그 주변부까지 확산되어 전국 언론을 탈 정도였다면 많은 사람들이 이를 칭송함이 틀림없다. 아무리 일제치하라고 하지만, 이런 어려움을 알고도 세금을 걷었다니 기가 찰 노릇이다. 4개 마을 빈민들은 이강태씨가 스스로를 보호해주는 정부였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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