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옛날 옥천의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1989년 옥천신문이 나오기 전 옥천 소식이 궁금하다고요? 옛날 신문을 파헤쳐 그 옛날 옥천 소식들을 속속들이 알려드립니다.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를 검색해보니 다행히 1920년도부터 옥천이란 키워드로 여러 기사가 나오더라구요. 그 중 흥미로운 기사를 찾아 독자 여러분께 알려드리고자 합니다. 100년 전 과거의 옥천에는 어떤 일이 일어났었는지 같이 읽어보아요.

■ [1923년 4월7일자 동아일보]
- 옥천에도 경관의 악행
- 술 제조한 혐의로 남녀를 악형
- 대전지청 검사국에서도 활동

얼마 전에 충청북도 옥천군 깊은 산골에서 일본인 경관 한명이 조선인 경관 한명과 함께 아무 분수도 모르는 촌농민의 약한 부녀를 불러다가 사람의 입으로 말할 수 없는 폭행을 하고 또 불로 연약한 여자의 몸을 지졌다는 등 난폭한 행동이 있었다.

하여 그 관내인 대전지청 검사국에서는 가장 비밀리에 방금 그 사실을 엄중히 조사 중이라는 데 이제 모처로부터 탐문한 바에 의하면 음력 작년 십일월경에 옥천군 안내면 월외리 김유삼은 자기의 둘째아들 갑용의 혼인 때 사용할 술을 만들기 위하여 백미두말과 누룩곡자 다섯덩어리를 동면 도율리 김성녀에게 주어 한말 닷되 되는 술을 만들고 닷되는 비용으로 제하라 하였으나 김성녀는 이웃 정분에 이해를 따질 수 없다 하여 거절한 일이 있다는 바 이 것을 알게 된 옥천경찰서에서는 동월삼십일 오후 8시 경에 두 사람을 호출하여 김성녀에게 김유삼에게로부터 술만드는 삯으로 돈 삼원을 받지 않았느냐고 물었지만,

사실이 없다고 대답하매 사실 있는 것을 고백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덮어놓고 화젓가락으로 화로에 새빨갛게 달궈가지고 연약한 여자의 두부같은 두 다디를 지졌음으로 견디지 못하여 사람죽인다고 소시를 지르매 경관은 휴지로 그 여자의 입을 막어 소리를 지르지 못하에 하여놓고 숨이막혀 기절하여 업드러지자 그제야 아무말도 하지 말고 속히 집으로 돌아가라고 하여 내보낸 후에 김유삼을 또 불러다가 역시 먼저 와 같은 사매질을 한 후에 내어 보냈다는데 깊은 밤중이라 약한 여자는 경찰서 문턱을 베개삼고 까무러쳐 업드러져 있어 인사불성인 것을 김유삼이가 간신히 업고 그 근처 여관에서 밤을 세우고 그 이튿날 자기집으로 돌아가서 지금까지 여독으로 신음하는 중이더라. 

얼마나 억울했을까나. 이웃간 결혼 축하를 위해 술을 만들어준 것을 가지고 고문을 했다니 참 일제 치하라고 심각한 일이다. 기사에 따르면 술을 만드는 비용으로 닷되는 비용을 제하라 하였으나 이웃간의 정때문에 거절하고 그대로 해준 것을 보면 이해득실을 따지지 않았다. 그런데 이걸 가지고 고문까지 했다는 것을 보면 그야말로 악덕 경관이 아닐 수 없다. 이후 소식을 보니 이들 악덕 경관들은 집행유예나 징역 6개월을 받고 기소유예를 받았다고 한다. 솜방망이 처벌이 아닐 수가 없다. 고문을 당한 그 후손들이 이 사실을 안다면 기가 막힐 일이다. 

■ [1920년 5월12일자 동아일보]
- 열차에 역사
- 경부선 옥천역에서 모녀가 무참히 죽어

지난 5월9일 오후 3시58분쯤 되어 경성을 향하는 특별급행열차가 경부선 옥천에서 떠나 대전역 부근 철교를 진행할 때 나이 30여세 쯤 되는 풋나물 장사가 열살 남짓한 계집아이를 데리고 철교를 건너가다가 마침내 기차에 치여서 머리에 인 풋나물 광우리는 그대로 다리 아래에 떨어지고 모녀는 다 허리가 부러져 즉사하였다더라. 

■ [1922년 8월22일자 동아일보]
- 철교에 노파 하마터면 죽을 뻔

8월18일 오전 11시10분에 부산을 떠난 봉천행 급행열차기 오후 6시경에 옥천역을 지나 대전으로 진행하는 도중에 부산기점 160마일 40체인되는 곳의 삼양리 다리 위에 충북 옥천에 사는 78세 된 노파가 앉어 있는 것을 그 열차 기관사가 발견하고 비상기적을 불었으나 귀가 어두웠던 터라 조금도 움직이지 않음으로 기차를 정지하고 그 노파를 구원하여 무사히 대전까지 와서 경관에게 인계하였는데 그로 인하여 열차는 다소간 늦었다더라.  

경부선이 다니던 옥천은 늘 열차사고가 빈번했다. 불과 20년 남짓 과선교와 지하차도가 완공되기 전에는 일년에 한 두번씩 열차사고가 있었다. 기차가 지나가는 지역의 비극이다. 20년 젊은 모녀는 안타깝게도 유명을 달리했고, 22년에 할머니는 다행히 기관사가 기차를 정지시키면서 살았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지나가는 기차 때문에 목숨을 잃었을까 생각하면 지금도 아찔하다.  

■ [1921년 5월24일자, 동아일보]
- 옥천대화, 창고에서 불이 나, 집 여섯채가 전소

지난 20일 하오 2시께 옥천역 전에서 미곡장사 하는 김춘화의 창고에서 불이 났는데 정거장 소방조와 읍내 소방조가 현장에 출장하여 활동을 하였으나 수도가 멀어서 그 창고와 이웃집 다섯채가 전소되고 동 네시반에야 진화했는데 손해는 약 오천원에 달하였고 불난 원인은 그 근처에서 일하는 인부의 담배불 등으로 인한 듯 하며 목하 경찰서에서 조사중이라더라. 

수도가 멀어 불을 못 껐다니 그 당시의 소방 시스템이 얼마나 열악했는지 볼 수 있다. 미곡장사 하시는 김춘화씨는 화재 때문에 망연자실 하였겠다. 불이 옮겨붙은 이웃집도 화재로 집을 잃어 얼마나 힘들었을까나. 예나지나 자나깨나 불조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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