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북면 최숙자 1944년

很高兴认识你,我们玩得很开心
Hěn gāoxìng rènshí nǐ, wǒmen wán dé hěn kāixīn
어르신이 나를 보자마자 한마디 먼저 건네셨다. 반은 알아듣고 반은 흘려버렸다.
“만나서 반갑고 우리 좋은 시간 보내요” 라고 대충 알아들었다. 뭐 대략의 맥은 통했다.
어르신의 인생 강의를 한 수가 아닌 열 수는 배우고 돌아오는 길.
발걸음뿐만 아니라 뒤통수까지 꽉 차게 훈훈했던 시간이다.
중국어와 영어는 어지간히 한다고 하시며 당신이 소통하는 사람들이 고관대작이 아니니 그냥 저냥 필요한 말 정도 수준이라고 겸손의 미덕까지 보이셨다.
코뿔소처럼 우리도 각자의 삶 속에서 발자국을 남기며 산다. 어느 시간 어떤 곳에서 어떻게 살았는지 지금까지 걸어온 발자취를 통해 우리의 현주소가 결정된다. 누군가의 삶을 지금 눈에 보이는 단편적인 모습으로 판단하는 것이 아닌그가 살면서 남긴 발자취를 통해 이해해야 한다. 어르신의 발자국은 깊고 견고했다.

■ 오빠 등에 업혀 내려온 남녘땅

본시 함경도 사람인 나는 오빠 등에 업혀 남으로 남으로 내려오던 그날을 꿈인지 생시인지 구분할 수 없지만 내 인생의 시작은 참 별 볼 일 없었다. 그래도 칠십 넘어 이만큼 모양새를 갖췄으니 잘 살아낸 건지 운이 좋은 건지 그건 알 수 없다. 물론 둘 다라고 생각하면  오늘 하루가 더 즐겁겠지? 그때그때 열심히 살았고 어지간하면 투덜거리지 않았다. 원망의 씨앗을 뿌리지 않았더니 열매도 나름 튼실하다.

어머니의 고단한 삶을 굳이 말로하자면 구차하고 안쓰러운 마음만 일어나서 어린 시절엔 아버지에 대한 원망으로 부챗살이 올 때는 견딜 수가 없었다. 어머니는 영등포 시장에서 쌀장사를 하시고 아버지는 한학자셨다. 아버지는 여름날이면 하얀 모시옷을 입고 집을 나갔다가 어디서 뭐하는지 생사를 몰라 온 가족을 애타게 만들었다. 아버지는 2~3년 만에 한 번씩 오밤중에 머쓱한지 흠흠 기침 소리를 내면서 찾아와 한두 달 지내다 어느 날 갑자기 훌쩍 떠나셨다. 그 결에 우리는 2~3년 터울로 오종종 6남매로 자랐다. 나도 공부하고 싶은 마음은 많았지만 어머니께서 쌀장사 하시며 하루 종일 잰걸음으로 고생하시는 모습 보고 있자니 중학교 가고 싶다는 말이 입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일찌감치 방직공장에 들어가서 백열등 아래서 꾸벅꾸벅 졸아가면서 야근을 밥 먹듯이 하고 우리 머리 좋은 막내 남동생 공부시키며 유치원까지 보냈다. 지금 아이들이야 유치원이 당연한 과정이지만 1954년생인 남동생이 없는 집에서 유치원까지…. 당시는 행세 좀 하는 집의 아이들이 유치원을 다녔다. 나는 우리 남동생 공부 시키고 싶어서 내 몫까지 하라고 악착같이 뒷바라지를 했다. 

남동생의 유치원 소풍사진 : 방직공장일이 고단했지만  남동생 유치원에 보내면서 힘든 일상을 달랬다. 
남동생의 유치원 소풍사진 : 방직공장일이 고단했지만  남동생 유치원에 보내면서 힘든 일상을 달랬다. 

■ 옥천 군북면의 서울 댁 

옥천 군북면에 살던 고모님이 중신을 해서 군북면으로 25살에 시집을 왔다. 서울에서 바라보던 옥천은 첩첩산중처럼 시골이었는데 결혼해서 맞닥뜨린 시골은 더 답답했다. 남편은 대전 인동에서 목재소를 했는데 옥천에서 어르신들 모시느라 대전까지 자전거로 출퇴근을 했다. 나는 아버님 농사일도 돕고 시할머니 병수발을 하면서 혹독한 시집살이의 홍역부터 치르게 되었다. 요즘이야 도통 여건이 안 되면 병원에 모실 수 있지만 그때 병원이 가당 키나 한가. 온전히 내 몫 이었다. 어머님의 짐을 내가 대물림하게 되었다.

돌아가시기 전 몇 달 동안 치매가 와서 대소변을 받아내는 과정은 고역스럽고 곤혹스러웠다.

시할머니 방에만 들어서면 역한 냄새에 구토는 당연하고 현기증이 날 정도였지만 어쩌면 내 모습이 될지 모른다는 생각에 시할머니를 안쓰럽게 안아드렸다. 사랑과 존경의 마음보다 새털처럼 가벼워져 뼈만 남은 채로 정신까지 잃어버린 한 여인에 대한 가련함이었다. 시할머니의 상여 뒤를 따르며 피를 토하듯이 울었지만 요령소리에 내 설움은 이내 묻혀버렸다. 시할머니는 그렇게 선산에 묻히셨고 내리 시아버님 시어머니 남편까지 상여를 타고 머나먼 강을 건너는 길을 배웅했다.

곧 내 차례가 오겠지만 아이들 성가시게 안하고 떠나려고 하루 만보씩 꼬박꼬박 걸으면서 정신도 가다듬고 근력도 키운다. 이렇게 살다 딱 3일만 굶다가 새벽 깊은 잠결에 그이들이 나를 기다리는 그곳으로 간다면 내 인생은 그야말로 성공이다. 

■ 옥천과 인동을 오가며 여장부로 일어서다 

어르신들 모시느라 등골이 휘었지만 시골 아낙으로 사는 데 바빠서 힘이 드는지 모른 채 하루하루 세월을 까먹고 있었다. 남편이 위암으로 떠나고 부모님도 가시고 내가 인동의 목재소를 물려받게 되었다.

4남매를 두었지만 다들 자기 업이 있어서 내가 맡게 되었다. 5년 전까지도 목재소를 운영했는데 인력이 부족하자 중국인부들을 채용했더니 나 몰래 자기들끼리 중국말로 속닥거리는 모양새가 영 편치 않았다. 나는 두말하지 않고 몰래 중국어를 배웠다. 6개월을 배우고 나니 그 친구들이 내 뒷담화도 하고 불만도 표시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다들 모여서 중국어로 떠들고 있을 때 중국말로 한마디 쏴주었더니 모두 놀래서 뒤로 넘어갈 판이었다.

30년 전의 인동은 먹고 살아보겠다고 발버둥치는 사람들로 꽉 찼다. 내가 갖고 있던 가게를 빌려주고 돈을 벌어 갚으라고 선심을 베풀기도 했다. 열이면 아홉은 떼어먹었지만 은혜를 갚은 한 사람 덕분에 나는 삶의 기쁨이 생겼고 나머지 아홉도 호주머니에 돈 꿰차고 내놓지 않은 모진 이는 없었다. 뜻대로 안 되니 도리가 없어 그곳을 떠나기도 하고 나중에 한 달에 얼마씩이라도 성의를 꼬박꼬박 보이는 사람들한테는 적당히 받고 그 정성이 가상해서 열심히 살라하고 더 이상 받지 않았다.

내가 악다구니 하면서 돈 내어놓으라 하면 돈도 못 받고 인심 잃고 사나운 관계가 되었을 것이 분명하다. 길거리로 내몰리는 상황이 아니면 이해하자는 생각을 굳힌 것도 그 시장판에서였다. 인생 공부 참으로 많이 했다. 나는 차용증 한번 받지 않았다. 못 받을 각오를 하고 빌려주었다. 

학교만 배우는 곳이 아니다. 세 사람이 걸으면 한명은 스승이고 난장판 같은 곳에서 오히려 진짜 배움을 얻는다. 책에서 얻는 배움은 바람 불면 휙 날아가지만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 배운 씨앗은 반드시 실한 열매를 맺는다. 세상의 이치다. 

사업을 확장하고 어엿한 여장부 소리를 듣자 못다한 공부가 하고 싶어졌다.

여장부로 치열하게 살던 시절
여장부로 치열하게 살던 시절

■ 환갑의 만학도에서 동치미같이 시원한 할미로

먹고살만해지면서 나는 만학도가 되었다. 중학교 고등학교 검정고시를 하고 영어 중국어를 배웠다. 지금도 배우는 것처럼 즐거운 일이 없다. 코로나 전에는 동네 노인정에서 형님들 밥도 해주고 같이 어울렁더울렁 지냈건만…

이제 코로나 거리두기가 없어진다니 마스크 단단히 쓰고 다시 모여 지난날의 즐거움을 찾아와야겠다.

지나고 보면 원망거리도 많고 설렘도 많고 기대도 많았던 인생이다. 어쩌면 욕심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난 하루하루가 아까웠다. 그래서 열심히 일하고 신나게 배웠다. 아이들이 부모의 뒷모습을 보고 자란다더니 나는 학교 공부를 도와주지는 못했지만 우리 4남매 모두 사회에서 자기자리를 잘 지키면서 내 자부심이 되었다.

나는 동치미처럼 시원한 노인네가 되고 싶다. 깊은 겨울 눈보라 휘몰아치고 세찬 바람이 땅속을 후벼 파는 그 땅 밑에 묻은 항아리에서 동치미가 익어간다. 

곰삭은 맛이 일품이다. 속 깊은 정을 가진 노인네가 되련다. 간장종지 만한 마음보를 갖고 일흔이 넘었다 하면 얼마나 가여운 인생인가.

때마다 흔들려 성을 내고, 참는 것이 바보인줄 아는, 어리석은 노인네가 되지 않으련다.

뜨거운 여름에 한 사발 들이키면 오장육부가 시원해지는 동치미, 한겨울에 마시면 얼음장같이 차갑지만 아삭아삭 깊은 맛에 한 입 깨물면 밥상을 제압하는 그런 동치미처럼 늙어가련다.

초라한 초가집이던 군북면의 내 신혼집이 이제 우리 가족의 주말 전원주택지가 되어 그 어려웠던 시절을 말끔히 보상해주었다. 아픈 기억은 묻고 그리운 추억만 집에 남겨두었다. 땅만 그대로 집은 탈바꿈을 했지만 곳곳에 시어른들, 남편의 냄새가 배어있다. 사랑하는 우리 가족의 이야기를 고스란히 품고 있는 집. 주말이 기다려지는 이유다. 

최숙자, 당신 잘 살았구려! 동치미 같은 여인 맞소!

엄마에게...

엄마, 전화통화 자주하지만 엄마에게 편지를 써본 기억이 가물가물하네요.

엄마는 우리에게 영웅 같은 분이에요.
여장부 이셔서 엄마가 목재소에서 대패질을 쓱쓱 하는 거 보면서 엄마는 무인도에 남겨져도 살아날 분이라고 생각했었어요. 아버지 돌아가시던 날 목 놓아 우시던 엄마가 
“이제 우리 어떻게 살라고 먼저 가느냐” 
하던 말이 아직도 생생해요. 무쇠 같던 엄마도 여자였구나 알았어요. 하지만 엄마는 우리에게 영웅이었듯이 아버지를 배웅하고 다시 엄마의 길을 뚜벅뚜벅 걷고 계시죠.
엄마의 외국어 깜짝쇼는 정말 대단해요 어느 날 중국말을, 어느 날 영어를 거침없이 하는 엄마를 보면서 나는 뭐하고 살았나 돌아볼 때도 있어요. 그래서 우리도 더 열심히 살려고 노력하구요.
엄마, 아직도 우리에게 든든한 최 여사님으로 건재해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사랑해요 최숙자 여사님...

미영 기준 순영 정준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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