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_질풍노도같이 쉼 없이 달려온 삶, 여전히 미래는 회색이다. 무엇을 하면 좋을지, 어떻게 살면 좋을지 생각할 짬을 주지 않았다. 그나마 행복했던 유년시절이 지나면 대입수능에 대한 강박으로 6년이 훌쩍 간다. 그 다음은 대학을 가든 가지 않든 취업 시장에 내던져 진다. 진로에 대한 탐색, 고민 등은 어찌 보면 사치다. 무엇이라고 해야 된다는 ‘강박’이 온 몸이 몸서리치도록 스트레스로 다가온다. 조금 더 익숙한 직업군을 택하지만, 시험에 몇 년째 합격하지 못 하면 자신감을 잃어버린다. 이제 어떤 소속도 없이 사회에 툭 내던져진 그도 그랬다. 더 이상 ‘푸르른 봄’을 일컫는 청춘이 아니라 잿빛 ‘침묵의 봄’이었다. 말을 잃게 만들었지만, 기죽지 않는다는 그의 말에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옥천으로 다시 돌아온 20대 청춘을 익명으로 인터뷰했다. 

그는 “좋아하는 거나 잘하는 게 없으니 아버지를 따라 경찰이 되기로 했다”고 말했다. 마음을 울릴만한 계기로 경찰을 꿈꾸게 된 것이 아니었다. 그래도 경찰이 되기 위해 노력했다. 

“잘 하는 것과 하고 싶은 것들이 없어요. 아버지가 경찰인데요, 어릴 때부터 아버지를 보면서 경찰이라는 직업이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저도 경찰 시험 준비를 하고 있죠”  

1년 전, 대전서 자취를 시작했다. 경찰 시험 준비 때문이다. 경찰 학원에 다니며 공부했다. 하루 동선에 학원과 집, 그는 폐인처럼 공부만 했다. 그 시기에 2년 가까이 만나던 애인과 이별까지 했다. 기다렸다는 듯이 몸이 아프기 시작했다. 장시간 앉아 있다 발에 혈전이 생긴 것이다. 얼마나 아픈지 보다, 병이 생겼다는 것 자체가 그를 우울하게 만들었다. 열심히 준비했지만, 합격하지 못했다. 그리고 고향인 옥천에서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나고 자란 옥천은 편안했다. 친구들 대부분이 옥천을 떠났지만 그는 결국 옥천으로 돌아올 것 같다고 했다. 

“저는 옥천에서 평생 살라고 해도 살 수 있을 것 같아요. 읍에서 살면 차가 없어도 걸어 다닐 수 있고, 집값이 그리 비싸지도 않아요. 아마 옥천을 떠난 친구들도 나이가 들면 다시 옥천으로 돌아올 것 같아요”  

하지만, 고향에서의 달콤한 휴식은 오래가지 못했다. 
쉬고 있으니 불안했다. 어쩌면 그것은 ‘관성’인지도 모른다. 살아남으려면 무엇인가 해야 한다는 암묵적인 강박들이 스미었을지도 모르겠다. 쉬어도 쉬는 것 같지 않고 어딘가에 쫓기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서둘러 카페 아르바이트를 구했다. 

일을 한다는 사실만으로 조금의 안정감이 생겼다. 비로소 쉴 수 있는 자격을 얻은 것 같다고 말했지만, 일은 여전히 쉽지 않다. 

바닐라 라떼 스무 잔을 배달로 시킨 고객님에게 스무 잔이 맞는지를 확인하며, 마음속으로 ‘제발’을 수도 없이 외쳤다. 일이 너무 많아 축 쳐진 어깨로 일을 하면, 배달 주문이 들어오는 소리가 연신 들린다. 소리를 듣고 주문표를 확인할 때 긴장이 된다. 그 주문표에 적힌 숫자가 높으면 높을수록 스트레스도 올라간다.   

꿈은 없지만 목표는 있다. 서른다섯 살이 되기 전에 1억을 모으는 것이다. 하지만 다시 경찰 시험을 준비 하면 아르바이트로 모은 돈이 그대로 학원비와 자취비로 나가게 되기 때문에 가능한 목표인지 모르겠다고 웃었다. 그럼에도 그는 기죽지 않으려 한다.  

마음 한 켠을 차지한 이유 모를 짐들이 계속해서 몸을 보챌 때가 있다. 내가 살 집 하나 구하는 것조차 어려운 세상. 선택지는 적은데 해야 할 것만 같은 일들은 머릿속을 잔뜩 차지한다. 그는 생각대로 되는 게 하나 없는 인생이지만, 또 한 치 앞도 모르는 게 인생이라고 말했다. 그렇기 때문에 “잘 안 풀리는 사람이 있더라도 기죽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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