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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내면 이정순 어르신(1929~) 구술생애사
안내면 이정순 어르신(1929~) 구술생애사
  • 옥천닷컴
  • 승인 2019.09.02 1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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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빠진 여인

 

내 나이 89. 사랑이 시작되었다. 사랑스러운 여인이 되고 싶다. 또박또박 정성들여서 글자를 쓴다. 너무도 늦게 만난 인연 앞에서 표현할 줄 아는 여인이 된다. 어렴풋이 막다른 곳에 서있는 것 같이 느껴지지만 남아 있는 인생을 그와 함께 즐기고 싶다. 살아온 인생 중에서 지금 난 가장 평온한 시간이다.

머슴까지 부리면서 살았던 친정 집. 생각해보면 야속하리만치 기억이 없다. 들판을 허덕이며 나물을 뜯던 기억이 왜 그다지도 서럽게만 생각나는 걸까? 입고 있던 옷을 그대로 입고 시집을 가던 날, 해님은 슬펐었는지 구름 뒤로 숨어 버렸다. 엄마가 되어 할미가 되어 있는 지금도 딸, 정순이를 시집보내던 어미의 마음은 아직도 이해 할 수가 없다.

17살 처녀. 19살 먹은 총각은 겨울이 다가오는 동짓달에 혼인을 한다. 결혼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거적같이 덮여진 집에서 시할머니 시부모님 시동생 시누이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식솔이 달려있는 집에서 신혼이 시작된다. 남편의 정이란 말은 과분한 말이었다.

혼인 3개월이 지났을 때 새 신랑은 얼굴도 익혀지기 전에 군대를 간다. 떠나는 남편의 주머니 속에 마음 몇 자라도 적어 넣어주고 싶었지만 표현할 수가 없었다. 글을 모르는 내가 원망스러웠다. 세월이 아주 많이 흘러 겨울은 또다시 내게 아픔을 주는 계절이 된다.

그 사람 앞에서 여자이고 싶다. 나도 여자였다. 여인이었기에 예쁜 것을 보고는 아름답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리움을 담은 글자로 전달하고 싶었다. 따듯한 햇살도 온 세상을 밝혀주는 태양도 나의 간절함을 대신하지 못했다. 칠월의 푸르름을 말하고 싶었고 뜨거운 태양아래 인심 좋게 불어주는 시원한 바람은, 당신을 향한 내 마음이라고 그 사람에게 전해주고 싶었다. 매미울음 소리를 편지지에 담아 고향의 냄새를 우체통에 넣어 멀리 보내고 싶기도 했다. 지금 내 가슴은 하얗다고, 당신이 너무 그리워서 마음이 노랗게 변했다고, 보고 싶어서 빨간 눈물이 흐른다고, 가슴은 파랗게 멍이 들었다고, 몽땅 연필을 꾹꾹 눌러가며 밤을 새워가면서 화려한 글 수()를 놓고 싶은 적도 있었다. 그러다 보면 기쁨도 슬픔도 아픔도 하얀 종이위에 방울방울 뚝뚝 떨어진다. 어떤 날은 화려하게, 어느 날은 시원하게, 보름달이 환하게 떠 있는 그 밤은, 하얀 베갯잇을 얼룩지게 했을지도 모른다.

아무도 듣지 못하게 혼자만의 하소연을 하듯이 중얼거린다. 밭을 매고 돌아오는 길, 코스모스는 고운 빛으로 줄을 서있다. 가냘픈 몸을 흔들며 시간 있으면 얘기 좀 하자는데바라만 볼 뿐 아무런 대꾸도 할 수가 없다. 괜히 바쁜 척을 하면서 돌아서려는데 어여쁘다고용기 내어 말해보라고 바람은 재촉한다. 어떻게 표현을 해야 맞는 것인지 배워보질 못해본 난, 마음을 몰라주는 바람소리가 원망스럽다.

글을 읽을 줄 모르는 까막눈을 간직한 채 살았다. 세상이 너무 깜깜했다. 지금은 아니다. 마음에 개안 수술을 한 듯이 환해졌다. 늦은 나이지만 그를 만났다. 글씨를 알게 되었다. 나에게도 글 애인이 생겼다. 나도 남들처럼 마음을 주면서 사랑을 표현하게 되었다. 이 정순이라는 내 이름을 쓸 줄도 읽을 수도 있다. 내가 살고 있는 동네, 안남로, 글자도 척척 읽으며 버스도 타게 되었다. 서툴지만 먼저 떠난 영감을 그리워하는 표현도 한다. 넋두리도 한다.

지난겨울은 슬픈 계절이었어요. 너무도 아프더라고요. 하얀 눈이 까맣게 보이네요. 큰 아들은 엄마보다 먼저 당신을 만나러 갔네요. 당신과 함께한 삼 개월의 신혼. 그 겨울은 아픈 계절이었어요. 어렸던 내겐 너무 버거운 겨울이었어요. 팔월의 날씨는 뜨거운데 아직도 가슴은 너무 시리고 아리네요. 뾰족뾰족 바늘처럼 하얗게 솟아나는 서릿발은 언제나 녹을까요. 제겐 겨울은 아픈 계절인가 봐요.”

하늘은 맑다.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다음 생이 있느냐고 물어 본다. 쓸쓸하다.

더도 바라지 않습니다. 더 바라게 된다면 이루어지지 않을까봐 겁이 납니다. 돌아가신 제 아버지 어머니의 딸로 다시 태어나라고 해도 받아들이겠습니다. 너무도 뵙고 싶으니까요. 사랑을 표현해 주지 않았던 무심한 영감을 다시 남편으로 또 한 번 맞이하라 해도 따르겠습니다. 생각해 보니 그만큼 성실한 사람도 없었으니까요. 지난날 제가 너무 부족한 아내였던 거 같기도 하니까요. 지금은 불쌍하기만 한 남편입니다. 자식들과의 인연을 다시 맺으라해도 그렇게 하겠습니다. 어미는 아직도 주고만 싶은 것이 너무 많으니까요. 부모님도 남편도 자식들도 제겐 소중한 인연입니다. 물질도 이정도만 다시 누려 보라해도 더 달라고 하지 않겠습니다. 지금처럼 다음 생애도 열심히 살면 될 테니까요. 그러나 컴컴한 세상은 싫습니다. 다음 생애는 제게 공부할 수 있는 인연을 주십시오. 그것만은 이루어지길 간절히 원합니다. 예쁘게 글자로 인생의 수를 놓아 표현 할 줄 아는 아름다운 여인으로 살아보고 싶습니다. 다시 한 번 그 사람 앞에서 여자로 살아보면 안 될까요?”

거울을 본다. 논두렁 밭두렁이 얼굴 곳곳에 그러져 있다. 머리털은 하얗다. 허리는 구부정하다. 생각해 본다. 남들은 일곱 살 때부터 학교를 가고 한글을 익혔다. 이 정순은 남들보다 다르게 살아간다. 자식들부터 가르쳐 놓고 여유 있는 황혼의 시간에 학교를 간다. 젖 달라는 아이도, 밥 달라는 아이도, 아침 등교 길에 보채는 자식도 없다. 오히려 용돈을 챙겨 주면서 두둑한 후원을 한다. 가방을 꺼낸다. 늦게 만나게 된 글 애인을 담는다. 학교 가는 길. 거리에 배롱나무 꽃이 만발해 있다. 도란도란 꽃들의 수다 소리를 들으며 떠나간 사람을 그리워한다. 보고 싶은 얼굴을 찾는다. 듣고 싶은 목소리를 생각하니 들려온다. 편안하다. 인생의 사계 중에서 89번째의 여름이 지나간다. 늦은 나이에 시작된 글자 사랑’ ‘글 애인과 함께 마을버스를 타러간다.

가방을 들고 학교로 가는 89세 여학생, 아니 소녀. 예쁘지 않으세요? 글자와 사랑에 빠진 여인, 아름답지 않나요?

 

이영순 작가
이영순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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