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돌보미로 12년, 김순애 씨를 만나다
‘2021 사회복지 공모전’ 이야기 부문 우수상 수상

편집자주_ ‘지호… 삶의 용기와 희망을 불어넣어준 아이… 나는 하루하루 아이 돌보는 시간을 기다렸고 우리 가정은 늘 지호의 이야기로 시작해서 지호 이야기로 끝납니다.’
아이돌보미로 12년간 일해 온 김순애(76, 읍 마암리) 씨의 글 ‘하늘에서 온 나의 아들’ 중 일부다. 아이돌보미로 살며 겪었던 일, 그 과정에서 만난 한 아이 ‘지호’에 대한 이야기가 생생히 기록되어 있다. 그는 이 글로 지난해 12월 사회복지협의회가 개최한 ‘2021 사회복지 공모전’에서 이야기 부문 우수상을 수상했다. 한 해가 저무는 12월31일, 그를 만나 글에 담지 못한 깊은 이야기를 들어봤다. 

아이돌보미 김순애씨
아이돌보미 김순애씨

 ■ 29년 전 그 때에 머물러있다

‘내가 이 나이까지 겪어본 울음에는, 그 울음이 설사 일생의 반려를 잃은 울음이라 할지라도, 지내놓고 보면 약간이나마 감미로움이 섞여 있기 마련이었다. 아무리 미량이라 해도 그 감미로움에는 고통을 견딜 만하게 해주는 진통제 같은 게 들어 있었다. 오직 참척의 고통에만 전혀 감미로움이 섞여 있지 않았다. 구원의 가망이 없는 극형이었다. 끔찍한 일이었다.’

소설가 박완서가 쓴 일기문 <한 말씀만 하소서>에는 막내아들을 잃은 비통한 심정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참척이란 자식이 부모나 조부모보다 먼저 죽는 것으로, 세상 그 어떤 것과도 비견할 수 없는 참혹한 슬픔을 뜻한다.

김순애 씨도 참척의 고통 속에 살았다. 29년 전, 3남매 중 막내였던 아들이 20살 되던 해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생때같은 아들을 보내고 고통의 나날이 이어졌다. 죽어야 아들을 볼 수 있겠다 싶었다. 극단적 선택만이 구원이라 여겼다.

두 번의 시도는 실패로 끝났다. 마지막 세 번째 시도는 달랐다. 눈을 뜨니 중환자실이었고, 사흘이란 시간이 지나 있었다. 큰 아들의 뜨거운 눈물이 김순애 씨의 얼굴을 적셨다. “죽은 자식만 자식이고, 산 자식은 자식도 아니에요?” 원망과 슬픔이 뒤섞인 아들의 말 한 마디에 정신이 들었다.

이후 마음을 다잡고 손녀들을 키웠다. 막내아들을 결코 잊을 수는 없었지만 내 새끼 같은 손녀들을 보고 있으면 삶을 이어갈 수는 있었다. 그러나 손녀들이 다 자라 김순애 씨의 품을 떠나자 다시 우울함이 밀려왔다. 막내아들의 명일이 다가오는 가을이면 우울은 깊어졌다. “가을에 낙엽이 하나 둘 떨어지면 마음속이 텅 비고 쓸쓸해요. 잠이라도 자면 잊는데 잠도 안 오고.”

■ 파출부로 대하는 태도에 상처도

그즈음 아이돌보미란 직업을 처음 알게 됐다. 아이돌보미는 여성가족부의 아이돌봄 지원사업을 위해 고용된 종사자로, 양육공백이 발생한 가정을 찾아가 돌봄 서비스를 제공한다. “아는 동생이 내가 아이들 좋아하니까 한 번 해보라고 알려줬어요. 처음에는 자존심이 상했지. 그래도 밖에서 파출소장 사모님 소리 듣는 사람인데 나를 뭐로 보고 그러나….”

2007년에 시작한 아이돌보미 서비스가 당시만 해도 생소할 때였다. 자존심은 상했지만 ‘살기 위해’ 일을 시작했다. 2009년 2월, 충청북도 아이돌보미 양성교육을 수료하고 나이 60이 넘어 새 직업을 갖게 되었다. 그는 우리고장 1기 아이돌보미이기도 하다.

처우는 열악했다. 교통비도 없이 이원면과 동이면을 왔다 갔다 하기도 했다. 돈을 바라고 시작한 일은 아니었기에 감내할 수 있었다. 김순애 씨를 지치게 한 건 이용자들의 태도였다. “마치 파출부 부리듯 했어요.

우리는 아이를 돌보는 거지 집안일 하는 게 아닌데 설거지를 쌓아놓고 가는 거야. 나는 그럴 생각도 안 했는데 안방에 들어가지 말라거나 냉장고 열지 말라는 소리도 들었어요. 먹을 거 있어도 나한테 한 번 먹어보란 얘기를 안 해요.” 내 자식, 며느리처럼 생각하려고 해도 마음 속 상처는 아물지 않았다.

그럼에도 버틸 수 있었던 건 아이들 때문이었다. “내 손에 왔다 간 아이들은 남의 애가 아니고 내 손자, 손녀야. 길 가다 원피스 예쁘면 사다 입히고 그랬어요. 반찬 해서 갖다 주기도 하고. 어떤 달은 월급보다 나가는 게 더 많았어. 내가 살기 위해 애들에게 정을 준 거예요.” 그렇게 2020년 12월 말, 아이돌보미를 관두기까지 12년간 약 열다섯 가정의 아이들을 돌봤다.

특히 한부모가정의 아이들을 돌볼 기회가 자주 있었다. “이혼한 가정에 많이 갔어요. 어느 가정의 아이는 내 가방을 뒤져서 돈을 훔쳐가기도 했어요. 마트 가서도 물건 슬쩍 하고.” 그는 부모가 아이를 다 헤아려주지 못해 그런 것이라 여겼다. 그래서 혼내기보다 타이르는 방법을 택했다.

아이들이 그의 품 안에서 안정을 찾고, 변화되는 모습을 볼 때면 직업적인 보람을 느꼈다. “산만하고 사나웠던 아이들도 내가 토닥거리고 같이 놀아주면 순해졌어요. 아이들이 선생님이 아니라 할머니라 하고. 나만 기다리는 거예요.”

■ 먼저 간 막내아들을 봤다

어떤 만남은 운명이다. 지호와의 만남이 그랬다. 맞벌이 부모의 아이였던 지호가 만 8개월이었던 때 김순애 씨를 만났다.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보면서 그는 하늘나라로 간 막내아들을 떠올렸다.

“아들하고 너무 닮은 거야. 순한 성격도 닮은 거 같고.” 남편도 막내아들을 닮은 지호를 친손자처럼 대했다. 그 때부터 ‘우리 지호’로 하루를 열고 닫았다. 친손녀들이 질투할 정도였다.

‘지호가 두 발로 첫 땅을 내딛는 순간 두 볼을 비볐고… 어린이집에 입학하던 날 적응하지 못한 채 우는 아이를 안아주었고… 유치원에서 김치를 먹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함께 박수를 쳐주었고… 초등학교 입학하기 전 함께 학교를 거닐며 용기를 주었고… 8년이란 시간 동안 사계절을 함께 보냈습니다.’

그는 지호와 함께 보낸 시간을 이렇게 기록했다. “지호는 내 사부님이셔. 알파벳도 가르쳐주고, TV에 운동하는 걸 틀어줘요. 우리 할머니 운동해야 오래 산다고. 내가 무릎이 아프니까 엄마한테 비싼 차 사달라고 했다고 하더라고요. 어디 빵이라도 사왔다 하면 엄마아빠나 자기보다 할머니가 우선이야.” 김순애 씨는 인터뷰 내내 지호의 자랑을 늘어놨다. 지호로 인해 그는 “새 삶을 산 것 같다”고 말한다.

■ “부자든 빈자든 아이 돌봄은 국가가”

“선생님, 지호가 까탈스러워서 못하겠어요.” 지호가 초등학교 1학년이 되던 해, 무릎 상태가 악화되어 일을 그만두면서 지호와도 이별해야 했다. 이후 새 아이돌보미로부터 지호를 못 맡겠다는 연락을 받았다. 단 한 번도 까탈스럽다 느껴본 적 없는 순한 아이였기에 의아했다. 지호를 직접 보고서야 그 답을 알 수 있었다.

“할머니 보고 싶어서 참았는데 왜 안 왔느냐고, 그래서 화가 났다고 막 울더라고요. 새 선생님한테 어느 날에는 ‘제가 선생님한테 화를 내면 그 때는 아마도 제가 김순애 할머니를 보고 싶어서 그런 거니 조금만 참아주세요’라고 했대요.”

지호의 안정이 우선이었다. 그래서 수술한 지 얼마 안 돼 부은 다리로 한동안 지호 집에 갔다. 새 아이돌보미 선생님과 애착 관계를 형성하도록 도움을 줬다. 지호도 서서히 안정을 찾았다.

아이돌보미 일을 관둔 지 1년이 지났지만 지호와의 인연은 계속 이어가고 있다. 아파트 이웃인 덕분에 그는 지호가 보고 싶을 때마다 집 앞 편의점에 간다. “지호가 태권도 학원을 다니는데 그거 끝날 때쯤 편의점에서 만나서 간식도 사주고 그래요.” 지호의 생일은 김순애 씨 부부에게도 연례행사가 된 지 오래다. “우리 집에서 생일잔치 해주기도 하고. 케익 사고 미역국 끓이고 용돈도 주고….”

마지막으로 10년 넘게 아이돌보미로 일한 베테랑으로서 제도적 지원에 대해 묻자 그는 ‘지호네 집’ 이야기를 꺼내며 이용자 입장을 더 생각했다. “지호네는 아이돌보미 급여를 거의 다 부담해요. 정부가 지원해주는 게 없어.”

아이돌봄 서비스는 이용자 가구의 소득 수준에 따라 정부의 지원 금액이 달라진다. 김순애 씨는 소득 수준에 상관없이 국가가 돌봄서비스를 제공해야 한다고 말한다. “아이 낳으라고만 하지 말고 아이를 길러줄 수 있는 환경이 돼야죠.”

김순애씨가 휴대폰 배경화면 속 지호를 보고 있다.
김순애씨가 휴대폰 배경화면 속 지호를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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