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청호수난구조대 김서현 이사를 만나다
평범한 주부에서 119보다 빠른 구조대원으로

고요히 잔잔한 물결이 삶과 죽음을 가른다. 그 가운데 대청호수난구조대가 있다. 대청호수난구조대는 민간 봉사단체이자 소방청 소속 구조대로, 대청호 인근 지역에서는 119보다 빠른 출동으로 정평이 나 있다. 정회원 40여 명이 소속돼 있지만 실질적으로 즉시 출동이 가능한 ‘5분 대기조’는 단 5명. 그 중 유일한 여성 대원 김서현(48, 군북면 대정리) 이사가 있다. 그는 지난해 11월25일 개최된 ‘옥천군 자원봉사자 대회’에서 군수표창을 수상한 바 있다.
지난해 12월21일, 군북면 방아실에 위치한 대청호수난구조대 본부를 찾았다. 김서현 이사의 대변인을 자처한 김태원(46, 군북면 대정리) 대장과 김홍식(54, 군북면 대정리) 홍보이사와 함께, 주인공인 김서현 이사, 그리고 대청호수난구조대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 삶의 장르가 바뀌었다

큰 기복 없이 예측 가능했던 삶이 변수 가득한 삶으로 변했다. 2019년 봄 이후의 이야기다. 작은 가게를 운영하던 자영업자로, 이후에는 전업주부로 살았던 김서현 이사의 삶이 대청호수난구조대를 만나고 180도 바뀌었다. 야산에서 길을 잃은 조난자를 구하고, 실종자를 수색하고, 배를 직접 운전하기까지. 이전에는 상상도 못했던 일이다. “물을 좋아하지만 무서워해요. 수영도 못했는걸요.”

비상한 각오로 대청호수난구조대에 합류한 것은 아니었다. 남편의 지인이었던 김태원 대장을 통해 대청호수난구조대를 처음 알게 됐고, 김 대장의 봉사 정신에 감화되어 봉사를 하고 싶었다. 첫 시작은 대청호 정화 활동이었다. 그저 가벼운 마음으로 참여했다. 삶에 생기가 스미는 것 같았다. “사람들도 좋고, 배 타는 것도 좋고, 수중 쓰레기를 치우니 보람도 있고. 그냥 힐링이었어요.” 찐득찐득한 쓰레기를 걷어내자 물이 숨 쉬는 걸 목격했다. 환경을 보호해야 한다는 말이 마음 깊숙이 와 닿았다. “나무가 녹조의 원인이 된다는 걸 최근에 알았어요. 육지에서는 나무가 썩으면 영양분이 되지만 물속에서는 안 되는 거예요. 예전에는 대청호가 이렇게 더러운지 몰랐어요.”

그렇게 하루하루 대원들을 따라다니다 정식 회원이 됐다. 수중 정화 활동에 그치지 않고 구조 활동에도 동행했다. 대장과 대원들이 물속으로 들어가면 그들의 연결고리는 작은 물방울이 된다. “물 위에 떠오르는 물방울, 기포를 배 위에서 지켜봐요. 15분 내에 나올 수 있는지 보는 거죠. 안 그러면 구하러 가야 해요.” 그래서 그는 수영과 잠수를 배울 계획이라 밝혔다. 내 자신을 지키는 것보다 동료를 지키고 싶어서다. 적십자 응급처치 교육도 이수했다.

당장 동료를 구하지는 못해도 할 수 있는 일을 찾았다. 김서현 이사가 대청호수난구조대의 촬영감독이 된 것도 그래서다. 긴박한 구조 현장을 영상 기록으로 남기지 않으면 중요한 부분을 복기할 수 없다. “처음에 왔을 때 할 줄 아는 게 없으니까 순간순간 장면을 기록해야겠다 싶었어요.”

2020년 12월에는 김홍식 홍보이사와 설성환 사무국장, 이정심 이사와 함께 동력수상레저기구 조종면허 1급 면허도 땄다. “필기는 한 번에 붙었는데 실기에서 3번이나 떨어졌어요. 시험장이 멀리 있어서 고생 좀 했죠. 내가 이걸 왜 한다고 했지 후회도 잠깐 들었는데 막상 성공하니 뿌듯하더라고요.”

■ 실종자 최초 발견하기도

대청호수난구조대로 활동하며 누군가는 한평생 목격하기 힘든 일들을 자주 겪게 됐다. 재작년 10월, 금강3교에서 실종자를 3일간 수색했던 일은 특히 잊히지 않는다. 끼니는 김밥 한 줄로 때우고 제대로 쉬지 못한 채 주·야간 교대로 실종자를 찾았다. 실종자 가족의 애타는 마음을 알기에 김서현 이사도 배 위에서 작은 흔적이라도 찾고자 애썼다. 그러다 저 멀리 물에 떠 있는 사람 형체가 보였다. “실종자를 최초 발견한 것도 처음이고, 시신을 본 것도 처음이었어요.” 김태원 대장과 김홍식 홍보이사가 시신을 수습할 동안 그는 실종자 어머니와 끌어안고 한참을 울었다. 다른 것보다 무너지는 가족들을 곁에서 보는 일이 쉽지 않았다. 마음이 쓰여 이후 당시 출동했던 대장, 대원들과 함께 장례식장을 찾았다. 그 자리에서 유가족과 서로 눈물로 위로하며 고인을 애도했다.

정신없이 실종자 수색 작업을 마무리하고, 유가족들을 만나고 나니 그제야 스스로를 돌볼 시간이 주어졌다. 처음 겪는 탓에 트라우마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문득 문득 생각이 나요. 그 때 그 상황이요.” 시신을 직접 수습한 김태원 대장이나 김홍식 이사도 한동안 트라우마에 시달려야 했다. 김태원 대장은 거울이나 유리를 보면 흰자 없는 눈을 한 사람이 보였고, 김홍식 홍보이사는 샤워를 할 때 귀신이 머리를 감겨주는 것 같았다고 전했다. “그래서 저희가 고인의 명복을 빌고 당시 촬영한 영상을 반복해서 봤어요. 일부러 어두운 곳에서 혼자 보기도 하고. 트라우마를 극복해야 하니까요. 잠수하다가 쇼크가 올 수도 있거든요. 지금은 많이 괜찮아졌어요.”

2020년 여름, 보트 운전 중인 김서현 이사와 김홍식 홍보이사(왼), 김갑수 대원(뒤)
대청호 수중 수변 정화 활동 중인 김서현 이사와 깜대원
대청호 수중 수변 정화 활동 중인 김서현 이사와 깜대원

■ 두 번째 인생을 살다

혹자는 묻는다. 직업도 아닌데 봉사로 왜 이런 일을 겪어야 하느냐고. 수난 구조 활동을 하며 동료들이 위험할 뻔한 순간도 여럿 봤다. 그럼에도 그는 흔들리지 않는다. 봉사로써 느끼는 보람도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사람이다. “대청호수난구조대에 가면 마음이 편해요. 사람들이 좋거든요. 김태원 대장하고 김홍식 홍보이사하고 셋이서는 삼남매, 아니 삼형제라고 불려요(웃음).”

가족보다 더 가족 같을 때도 있다. 지난해 2월, 죽음의 문턱에 섰을 때 더욱 느꼈다. “운전하다 버스랑 교통사고가 나서 죽을 뻔했어요. 내장 파열도 있고 갈비뼈며 발목이며 부러지고. 제가 대전의 응급실에 있다는 걸 알고 대장이랑 홍식 오라버니가 대전에 있는 응급실을 다 가봤다고 하더라고요. 제 가족과 같이 밤도 새우고. 그 때 생각하니 또 울컥하네요.”

두 번째 삶을 얻게 된 후에는 더 열심히 봉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가 게으른 편이거든요. 교통사고 겪고 나서는 정말 열심히 살고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좋은 일 많이 해야겠다 생각했어요.” 지금도 회복하지 못한 몸이 마음을 따라주지 못해 아쉬울 뿐이다.

지난 가을에는 고향인 대전을 떠나 옥천에 정착하기로 결심했다. 남편은 그런 그를 늘 응원해준다. ‘위험한’ 일보다는 ‘좋은’ 일이라는 데 방점을 두고 든든한 지원군이 돼준다. “제가 갱년기가 일찍 왔거든요. 근데 대청호수난구조대에 들어간 뒤로는 표정이 밝아졌대요. 남편이 더 좋아해요.”

대청호수난구조대 김홍식 홍보이사, 김태원 대장, 김서현 이사가 방아실 본부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대청호수난구조대 김홍식 홍보이사, 김태원 대장, 김서현 이사가 방아실 본부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 예측 가능한 것은 단 하나 “계속 구조대원일 것”

이제 그는 대청호수난구조대에서 없어선 안 될 존재다. 여름에는 일주일에 6번, 최근에는 2번 이상 본부를 찾는다는 그는 ‘최고의 아군’이자 ‘섬세한 대원’으로 불린다. 김태원 대장은 농담을 섞어 그를 군기반장이라 칭한다. “대원들이 저한테 말하기 어려운 걸 대신 말해주기도 하고 우리 단체를 이끌어가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해줘요. 사비로 찬조금도 많이 냈어요. 저기 택배 보이죠? 저렇게 우리 대원들 필요한 거 택배로 막 시켜요. 창고에 안마기도 있는데.”

끝으로 봉사 표창 수상에 대한 소감을 묻자 김홍식 홍보이사가 “초심 잃지 않겠다고 하라”며 거들었다. 김서현 이사는 고개를 저었다. “초심은 이렇지 않았는데?”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했던 일이 어느새 삶의 큰 파이를 차지하게 됐다. “해야 한다는 마음가짐이었다면 못 했을 것 같아요. 솔직히 무섭잖아요. 그런데 나도 모르게 가 있는 거죠. 계속 봉사 하고 싶어요.”

대청호수난구조대에 합류하고 변수가 많아졌다. 무슨 일이 언제 생길지 모른다. 그럼에도 예측 가능한 것은 있다. 오늘도, 내일도, 먼 미래에도 그는 대청호수난구조대의 일원으로 활동하고 있을 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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