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부터 지금까지 50년, 우리의 소리인 ‘민요’를 지키는 파수꾼이 되다
“세월이 흐르고 흘러 만들어지는 묵은 소리가 바로 민요이지요”

우리의 소리를 지키는 파수꾼, 그들의 삶은 우리의 소리로 만들어진다

오랜 세월 우리 전통의 소리를 목이 터져라 부르는 이들이 있다. 또 누군가는 우리의 소리를 이곳저곳에서 알리기 위해 밤 낮으로 고군분투한다. 그런가 하면 또 어떤 이는 오랜 세월 장인의 정신과 올곧은 자세로 우리의 소리를 만들어낸다. 그들은 저마다 다른 곳에서 저마다의 방식으로 사라져가는 우리의 소리를 지키는 파수꾼이 되었다.

흐르는 세월의 풍파에 우리의 소리는 점점 역사의 뒷전으로 향하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급속도로 변화하는 혈기 왕성한 젊은 문화의 흐름에 이제는 설자리가 없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점점 사라지고 잊히는 것은 서글픈 일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우리의 소리를 지키는 이들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다행이다. 그들은 말한다. “우리의 소리가 지니고 있는 고유의 맥을 언제까지 지킬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고 말이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의 힘이 닿는 순간까지 우리는 우리의 소리를 지키는 파수꾼이 되겠다”고 그 마음을 한 데 모았다.

우리의 소리는 오랜 세월 쌓여온 민중의 ‘애환’이요, ‘한’이고, 가장 즐거운 순간의 ‘낙’이다. 항상 붙잡고 있자는 것은 아니다. 다만, 삶의 희로애락을 담은 우리의 소리를 한 번쯤은 기억하자는 것이다. 그리고 가끔 떠나보는 것이 좋겠다. 언제나 잊히지 않을 우리의 소리를 찾아서.

고향으로 돌아온지 올해로 10년, 민요연구소는 9년째 운영중이다.

 

올해로 9년, 민요연구소를 운영하는 김영숙 대표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임은/ 심 리도 못 가서 발병 난다’ 우리가 아는 가장 대표적인 ‘민요(民謠)’ 아리랑이다. 가사도 쉽고 길지도 않아 누구나 끝까지 부를 수 있는 대중적인 민요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어떻게 부르는가에 따라 그 소리와 울림은 천차만별이다. 때문에 그냥 음을 따라 부른다고 올곧은 민요가 되는 것은 아니다. 민요는 부르는 이와 듣는 이의 애환(哀歡)이요, 온몸으로 이끌어내는 한(恨)을 담은 소리다. 그러니 쉽게 배워질 리가 천부당만부당 하다. 오죽하면 영화 <서편제>의 소리꾼 ‘유봉’은 딸 ‘송화’의 한을 가득 머금은 소리의 완성에 집착하여 또렷한 두 눈을 멀게 하고 한 평생 안고 살아야 할 한을 틔워냈다. 영화이긴 하나,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소리에 대한 열망을 담은 그들의 삶을 한 번 감상해보자니 아주 없지도 않을 이야기는 아닐듯 하다. 비록 영화속 인물들의 이야기가 ‘창(唱)’을 다루는 이들의 삶이기는 하나, 한 시대의 ‘삶’과 ‘애환’을 담아난 다는 점에서 그 결이 다르지 않음이다.
 그렇다면 민요란 무엇인가? 민요는 말 그대로 민중들의 노래요, 누가 만들었는지 원작자를 모름과 동시에 오랜 시간에 걸쳐 구전으로 전해지고 또 전해지며 가꾸어진 민중들의 삶을 담은 소리다. <노랫가락>, <한강수타령>, <창부타령> , <한오백년> 등 지역마다 유명한 민요도 한두 곡이 아니다. 때문에 이러한 민중의 삶을 노래하는 것이 어디, 10~20년으로 전해지겠냐는 것이 ‘김영숙 민요연구소’ 김영숙(62,읍 문정리) 대표의 말이었다. 장장 50여 년, 한 평생 민요의 외길만을 걸어온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기로 했다.

서울을 비롯한 대도시에서 모르는 이가 없었을 만큼 누구나 알아주는 민요가수였다. 젊을 적에는 동경에서 활동을 만큼 유명했다. 지금은 우리 고장서 우리의 소리를 지키는 파수꾼이 되었다.
서울을 비롯한 대도시에서 모르는 이가 없었을 만큼 누구나 알아주는 민요가수였다. 젊을 적에는 동경에서 활동을 만큼 유명했다. 지금은 우리 고장서 우리의 소리를 지키는 파수꾼이 되었다.
서울을 비롯한 대도시에서 모르는 이가 없었을 만큼 누구나 알아주는 민요가수였다. 젊을 적에는 동경에서 활동을 만큼 유명했다. 지금은 우리 고장서 우리의 소리를 지키는 파수꾼이 되었다.
서울을 비롯한 대도시에서 모르는 이가 없었을 만큼 누구나 알아주는 민요가수였다. 젊을 적에는 동경에서 활동을 만큼 유명했다. 지금은 우리 고장서 우리의 소리를 지키는 파수꾼이 되었다.
서울을 비롯한 대도시에서 모르는 이가 없었을 만큼 누구나 알아주는 민요가수였다. 젊을 적에는 동경에서 활동을 만큼 유명했다. 지금은 우리 고장서 우리의 소리를 지키는 파수꾼이 되었다.
서울을 비롯한 대도시에서 모르는 이가 없었을 만큼 누구나 알아주는 민요가수였다. 젊을 적에는 동경에서 활동을 만큼 유명했다. 지금은 우리 고장서 우리의 소리를 지키는 파수꾼이 되었다.
영숙 대표는 중요무형문화재 29호 이은관 선생의 수제자였다.
영숙 대표는 중요무형문화재 29호 이은관 선생의 수제자였다.

■ 다른 것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나에겐 오로지 민요뿐

옥천으로 다시 돌아온 지 올해로 10년. 9살 무렵에 고향 옥천을 떠났으니 다시 돌아오기까지 50년이 걸렸다. 처음에는 후회도 많이 했다. 언제나 시끌벅적하고 화려한 서울의 삶, 그리고 언제나 각광받아오던 삶에서 벗어나 다시금 옥천으로 돌아온다는 것이 쉬운 선택은 아니었을 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최선을 다해 살아온 삶에 이제는 안식이 필요했다. 물론 지금은 9년째 민요교실을 운영하며 30여 명의 수강생을 가르치고 있을 만큼 옥천에 적응을 했다고. 한두레마을, 평생학습원, 전통문화회관을 비롯해 중·고등학교 방과 후 교실에도 참여하면서 옥천 곳곳에 우리의 소리인 민요를 알리고 있다. 

“옥천에 다시 온 지 얼마 안 되어서는 진짜 우울증이 오겠더라고요. 7~8시면 어두 컴컴해지고 사람들은 없지… 고향이긴 해도 아는 사람도 없지… 처음에는 괜히 왔나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도 그럴 것이 김 대표는 중요 무형문화재 29호 이은관 선생의 수제자였다. 서울서 젊은 시절 대부분 이은관 선생의 배움을 받았다. 국립국악원에서 열리는 행사는 물론이고 행사가 있는 곳은 어디든 불려갈 만큼 인기가 절정이었다. 오죽하면 일본 동경에서 스카우트가 되어 19년간 동경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20대부터 40대까지, 그 당시에는 계은숙 등의 짱짱한 스타들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었다. 

“어릴 때 처음 들었던 민요가 너무나 좋았어요. 이상하게 귀에서 계속 맴돌더라고요. 음악 시간만 되면 신이 나서 배운 민요를 따라 부르곤 했죠. 그때는 민요 이외에는 아무것도 눈에 안 들어왔어요. 오로지 민요만을 부르고 싶었어요”

김영숙 민요연구소 외관
김영숙 민요연구소 외관
김영숙 민요연구소 외관
김영숙 민요연구소 외관

■ 흐르는 세월에 소리는 묵는다

7~80년대는 말 그대로 민요가수의 전성기였다. 김 대표는 그 당시를 돌이키며 “그때는 정말 스타였다”며 따라부리기 어렵고 오랜 시간 투자를 해야 하는 창에 비해 민요는 누구나 따라 부르기 쉽고 접하기도 쉬웠기에 금세 대중화가 됐고, 오래부터 전해내려오던 옛 소리가 그 당시에는 누가 들어도 세련되고, 듣기 좋은 대중가요로 변모했다고 전했다. 일본에서 활동하던 시기에는 우리의 소리를 듣고 눈물을 흘리던 교포들도 한 둘이 아니었다고. 민요는 목이 터져야 한다. 뱃속 깊이,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끌어내는 소리를 목이 터져라 낼 때, 그때야 비로소 ‘노래’를 넘어 ‘민요’가 되는 것이다. 김 대표는 “민요는 평생 배워야 하는 거예요”라고 운을 뗐다. 요즘에 나오는 노래와는 다르게 민요는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깊이가 더 깊어지며 소리가 ‘묵는다’는 것이다. 

고향으로 돌아온지 올해로 10년, 민요연구소는 9년째 운영중이다.
고향으로 돌아온지 올해로 10년, 민요연구소는 9년째 운영중이다.

■ 나에게 민요는 전부다

힘든 일이야 어찌 없었겠나. 어느 날에는 무대에 올라 악수를 하던 중에 갑자기 관객이 끌어당기는 바람에 고꾸라져 크게 다칠 뻔하기도 했다. 또 한창 바쁜 어느 날에는 택시에 옷자락이 끼여 한참을 끌려가서 크게 다칠뻔하고도 무대에 올라 노래를 했다. 가슴은 철렁했지만 그래도 노래는 해야 했다. 충격이 컸기에 음이 하나도 맞지 않아 공연이 엉망이 되었다며 아마 실수를 해 본 것이 그때가 처음이었을 것이라고 김영숙 대표는 전했다.

“이런 일 저런 일 다 있었지만 그래도 나에게 민요는 전부예요. 이것 때문에 살죠. 언제나 노래를 배우길 참 잘했다고 생각이 들어요. 살면서 단 한 번의 후회도 없었어요.” 그는 말한다. 언제까지일지는 모르겠으나, 옥천에서 힘이 닿는 날까지 최선을 다해 우리의 소리를 알리고 싶다고. 그리고 그 소리를 널리 알려 대한민국 사람들 누구나 흥겹게 따라 부르며 즐기게 하고 싶다고 말이다. 우리의 소리가 점차 잊혀진다는 것은 참으로 아쉬운 일이다. 하지만 조금만 주변을 살펴보면 여전히 사라져가는 우리의 소리를 지키는 파수꾼들이 온 힘을 쥐어짜며 소리를 튼다.

주소 : 옥천읍 중앙로 75

전화 : 010-2977-8656

영업시간 : 오후2시~오후7시 (영업시간은 개인과 단체 일정에 따라 상이 / 주말휴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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