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퀴손으로 시 쓰고, [해바라기 씨] 낭송하다
지난 10월 12일, 2021 충청북도 문해주간 시 낭송회 열려

‘해바라기 씨를 심자/담 모롱이 참새 눈 숨기고/해바라기 씨를 심자/누나가 손으로 다지고 나면/바둑이가 앞발로 다지고/괭이가 꼬리로 다진다/우리가 눈 감고 한 밤 자고 나면/이슬이 내려와 같이 자고 가고/우리가 이웃에 간 동안에/햇빛이 입 맞추고 가고/해바라기는 첫 시약시인데/사흘이 지나도 부끄러워/고개를 아니 든다…’
어린이가 화자인 동시를 나이 여든이 넘은 할머니가 자장가 부르듯 읊는다. 음의 고저 없이 느릿느릿 안정적이다. 그가 읊는 정지용 시인의 <해바라기 씨>는 그리운 어린 시절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것만 같다.
시 낭송가는 안남 어머니학교 학생 김광자(81, 안남면 지수리)씨. 지난 10월12일 영동군와인터널에서 열린 ‘2021 충청북도 문해주간 시 낭송회’에 옥천 대표로 참여했다. 충청북도평생교육진흥원이 주최한 제3회 문해한마당 행사 중 한 프로그램으로, 김광자씨 외에도 충청북도 시·군 문해학습자 10명이 참석해 자작시 등을 낭송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날 김광자씨는 최우수 시인상을 수상했다. 지난 3일, 안남 어머니학교에서 색칠 수업을 하고 있던 그를 만나 수상에 대해 물었다. 그가 부끄러운 듯 손을 내저었다. “뭘 대단해요. 남이 지어놓은 거 읽은 건데.”

■ 꼬박 한 달, 앉으나 서나 시 생각뿐

그래도 그에겐 생경한 경험이자 어려운 도전이었다. 남들 앞에서 발표해본 경험이라곤 초등학교 때 발표와 교회에서 기도문을 읽었던 경험이 전부였다. 김광자씨를 추천한 안남 어머니학교 우을순 교사의 설득이 아니었다면 시도해보지 않았을 일이었다. “우을순 선생님이 우리 집에 몇 번이고 와서 도와줬어요. 시 낭송할 때 어디에서 쉬고, 어디에서는 목소리 높이라고 가르쳐줬어.” 나이를 먹으니 시를 외우는 일도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누워서, 앉아서, 서서, 거울을 보고도 시를 읽고 외웠다. 시를 익숙하게 읽어가는 데만 한 달이 넘게 걸렸다. 쉼 없이 연습한 덕일까. 행사 당일 무대에 올라도 크게 긴장되지 않았다. “아유. 기다릴 때가 더 떨렸어요.” 이날 행사에 참여한 사람들 가운데 시를 외워온 사람은 김광자씨가 유일했다. 그래도 그는 자작시를 지어온 다른 참여자들이 더 대단하다며 치켜세웠다. 어떤 자작시는 그의 마음을 적셨다. “손꾸락이 일을 하도 해서 갈퀴 같으다란 시를 누가 지었더라고. 나도 10년 호미질을 하다 보니 손가락이 휘었거든요.”

손이 갈퀴가 되도록 호미를 잡은 지는 10여 년. 안남면 지수리에 정착한 시간과 맞아떨어진다. 남편과 사별한 후 조카가 사는 옥천에 내려왔다. “조카가 안남에서 귀농해 사는데 옥천 좋다고 오라 그랬어요.” 그렇게 국화꽃을 시작으로 깻잎 밭을 작은 아들과 일구고 있다.

고생의 흔적이 역력한 손은 고된 농사 일 때문만은 아니다. 서울에서 남편과 아들 둘, 딸 하나를 키우며 전업주부로 살다가 47살에 약 5년 동안 분식집 장사를 했다. 장사를 관두고도 69세까지 식당 일을 하다가 쉬기를 반복했다. 생계를 위한 일이었지만 마냥 놀기 싫어서 일을 한 것도 있었다. “나는 노는 걸 싫어해요. 나이가 드니 골반도 아프고 해서 식당 일을 관둔 거지.”

■ 산능선이 그를 시인으로 만들었다

4년 전, 안남 어머니학교를 다니게 된 이유도 마냥 집에서 쉬고 싶지 않아서였다. “집에 있으면 지루해요. 테레비 보자니 눈 피곤하고, 앉아있자니 궁둥이 아프고, 드러누워 있자니 지루하고. 될 수 있으면 여기 나와요.” 안남 어머니학교를 다니며 그는 시인으로 거듭났다. “여진숙 선생님이 특별한 거 없이 생활 속에서 자기가 느낀 거를 쓰면 시가 되는 거라고 이해를 시켰어요. 배추나 고구마를 보고서도 글을 쓸 수 있다고요. 그냥 말하고 싶은 걸 쓰면 그게 시가 되는 거라고. 그래서 썼어요.”

어느 날은 햇볕을 보고 시를 썼다. “봄의 햇볕은 따스함을 느끼고, 여름의 햇볕은 뜨거움을 느끼고, 가을의 햇볕은 쓸쓸함을 느끼고, 겨울의 햇볕은 건강함을 느낀다. 그런 시예요. 겨울에는 햇볕을 봐야 비타민D가 생긴다고 해서.”

산능선은 그의 시적 상상력을 풍부하게 만든다. “멀리서 보면 산 위에 얼굴의 형태가 있어요. 내 눈에는 그걸 느껴. 머리부터 눈 쑥 들어가고, 코 나오고, 입이 보이고, 턱 이렇게… 아, 신의 선물인가 보다 싶어요. <산 위의 얼굴>은 그런 산의 얼굴을 보고 만든 자작시다.

시를 특별히 좋아했던 건 아니었다. 사실 시를 접하고 익힐 기회가 없었다. “우리는 9남매였어요. 할머니도 계셔서 열두 식구가 살았으니 무슨 공부를 많이 했겄어. 아들도 못 가르치는 공부, 딸은 더 못 가르치지.” 국민학교를 졸업하고는 학교 근처에도 가지 못했다. 그는 집에서 그저 ‘밥 하는 사람’이었다. “나는 국민학교 때부터 주방에서 밥 했어요. 친정엄마는 나한테 맡기고 일하러 나갔어요. 학교 갔다 오면 설거지하고 동생들 업어주고.” 배고픈 서러움 때문에 그는 옛날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그 때는 어린이들은 내놓고 살았어요. 방정환 선생님이 어린이날 만들었다는 걸 알고서는 내가 기도했어요. 쌀밥 좀 배불리 먹었으면 좋겠다고. 어린이들 위하는 세상이 어서 왔으면 좋겠다고.”

형편이 안 돼 중학교에는 진학하지 못했지만 틈틈이 오빠들의 책을 뺏어 읽었다. ‘서사가 되려고 하느냐’는 어머니의 핀잔을 들었지만 배움의 욕심에는 끝이 없었다. “집에서 한문 500자 정도 외워서 터득을 했어요. 알파벳도 공부했어요. 근데 영어 단어는 혼자서는 못 하겠더라고.” 어릴 적 마음 한구석에는 이루지 못할 꿈이 자리 잡았다. “우리 때는 고등학교만 나와도 선생 할 수 있었어요. 그게 참 부러웠어. 남 가르치는 게.”

충청북도 문해주간 시 낭송회에 참석한 김광자씨와 안남 어머니학교 우을순 교사
충청북도 문해주간 시 낭송회에 참석한 김광자씨와 안남 어머니학교 우을순 교사

■ 점 마니아였던 할머니가 젊은이들에게

배고팠던 어린 시절 기억 탓일까. 정지용 시인의 <해바라기 씨>는 그에게 큰 감흥을 주지는 못했다. 마음에 와 닿는 정지용 시인의 시는 따로 있었다. “나는 할아버지 시가 좋아요. 할아버지가/담뱃대를 물고/들에 나가시니/궂은 날도/곱게 개이고/할아버지가/도롱이를 입고/들에 나가시니/가문 날도/비가 오시네. 그렇게 두 줄이여.” 그는 할아버지가 마치 앞날을 아는 것 같아 신기하게 느껴진다고 덧붙였다.

앞날을 미리 안다는 것은 축복일까. 한때 김광자씨는 점을 보는 걸 좋아했다. “옛날에 많이 봤지. 기억에 남는 이야기는 없어요. 하나도 안 맞았어. 결국 자기가 개척하고 용기가 있어야 해. 아무리 미리 안다고 해도 내가 자질이 없으면 소용없는 거여.” 젊은이들 사이에서 사주나 점을 보는 게 유행이라 하자 그는 이해한다는 듯 말했다. “미래가 막막하니까 혹시나 좋은 소리나 들을까 그런 거지. 용기도 없고 배짱도 없으면 발전이 없어. 나는 그런 용기가 없었어요. 소심해. 

‘갈퀴 같은 손’으로 다시 색칠을 이어갔다. 빛에 반사된 투명한 손톱이 반짝반짝 빛이 났다. “일 안 할 때 가꿔본다고 매니큐어 좀 발랐어. 내 몸 내가 가꿔야지. 일도 쉬엄쉬엄 하고.” 여생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즐겁게만 보내고 싶다. “즐겁게 보내고 싶어요. 그래서 (어머니학교에) 노래 가르쳐달라고 했어. 노래 가사를 다 잊어버리니까.”

김광자 어르신 시 낭송 영상 QR코드
김광자 어르신 시 낭송 영상 QR코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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