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면 칠방리에서 10년 째 목공방 ‘와일드터키’를 운영하는 전학승 씨
무작정 옥천으로 와 우연히 목공을 시작하다
“옥천에 조금이라도 일찍 오지 못한 게 후회될 정도로 만족스러워”

목공방 '와일드터키' 대표 전학승씨.

이원면 칠방리에 위치한 평범해 보이는 가정집 한 채. 집 근처로 다가가자 개 두 마리가 매섭게 짖어댄다. 집 왼편에는 나지막한 공방이 보이고, 나무 팻말에는 ‘와일드터키’라고 적혀있다. 

그곳에서 미색 모자를 쓰고 감색 앞치마를 두른 목공방 와일드터키 대표 전학승 씨(56)를 만났다. 그는 이제 옥천에 내려온 지 10년이 다 된 어엿한 옥천인이지만, 사실 그전까진 서울에서 태어나 45년 동안 수도권에서만 산 도시 사람이었다. 초·중·고를 모두 서울에서 졸업하고 경기도 성남의 대유공업전문대학교(현 동서울대학교)에서 전자계산을 전공했다. 우연히 아르바이트를 하며 알게 된 카페 일에 흥미를 느끼고, 전공과 전혀 관련 없는 호텔 일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대학을 그만뒀어요. 스물다섯인가 여섯에 지인의 소개로 호텔에 들어가게 됐죠.”

음료 파트를 맡아 바텐더로 일하던 학승 씨는 IMF가 터지고 나서는 호텔 일을 그만뒀다. 이후 경기도 안산에 PC방을 차려 운영했지만, 곧 ‘이 일도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친구가 사는 과테말라와 미국에 방문해 함께 지내며 일 년이 넘는 시간 동안 방황했다. 다시 한국에 돌아와서는 인터넷 쇼핑몰을 열고 차량용 GPS, 네비게이션 등을 판매했다.

그 무렵 학승 씨의 아버지가 크게 다쳤다. 넘어지면서 뼈가 부러졌는데 이 일을 계기로 병원 신세를 지게 됐다. 그의 아버지는 그렇게 두 달 만에 세상을 떠났다. 이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그는 또 다시 비보를 접했다. “사촌 형이 간암이었어요. 오래 투병 생활을 했었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두 달 만에 돌아가셨죠. 그리고 얼마 후 외삼촌도 폐암으로 돌아가셨어요.”

그 전까지, 학승 씨는 자신이 시골에서 살 거라곤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몸과 마음이 도시 생활에 완전히 최적화되어 있었다. “나도 공기 좋은 데서 좀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모든 장례가 6월에 끝이 났다. 그는 7월이 되자 운전대를 잡고 옥천으로 향했다.

 

목공방 와일드터키(왼쪽)와 전혁승 씨가 현재 거주 중인 집(오른쪽)
목공방 내부 모습

■ 무작정 내려간 옥천, 우연히 살고 싶은 곳을 만나다

학승 씨는 안산에서 PC방을 운영하던 시절 김천까지 국도를 타고 달린 적이 있었다. 그는 그 때까지 대전 밑으로는 어릴 때 부산 한 번, 고등학교 때 대구 한 번 가본 게 전부였다. 국도를 따라가다 보니 자연스레 옥천 앞을 지났다. 주위를 둘러보면서 생각했다. ‘와, 우리나라에 이렇게 경치가 좋은 곳이 있구나.’ 나이가 들어 공기 좋은 곳으로 떠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자, 가장 먼저 ‘옥천’이 떠올랐다. 

무작정 친구 세 명을 데리고 옥천으로 향했다. 톨게이트를 지나 제일 먼저 보이는 부동산으로 들어갔다. 그 날 공인중개사의 소개로 땅을 대여섯 군데 정도 봤고, 그 중에 지금 살고 있는 칠방리 땅도 있었다. 하지만 당시 공인중개사는 이 땅에 대해서는 그다지 자세한 설명이 없었다. 학승 씨도 한두 군데를 더 둘러본 후 더 묻지 않고 서울로 돌아갔다.

인연이란 게 뭔지, 서울로 돌아온 학승 씨는 그 때 본 칠방리 땅에 자꾸만 마음이 갔다. 그러나 당시엔 주소를 몰랐다. 같이 갔던 친구가 우연히 ‘그 때 그 동네 같다’며 인터넷 신문에 실린 땅 매물을 보여줬다. 매물로 나온 땅 주소의 지적도를 검색해 공인중개사와 함께 봤던 땅 주소를 역추적했다. “지적도를 보면 그 땅 주소뿐만 아니라, 가까운 옆 땅 주소도 적혀 있어요. 이 방향이겠다 싶어서 옆 주소를 쳐서 그 옆 주소를 알아내고. 그렇게 몇 번 해서 지금 사는 이 땅 주소를 알아냈어요. 아마 그 친구가 인터넷에서 발견하지 못했다면 부동산을 찾아가서라도 확인했을 거예요.”

드디어 땅 주소를 알아냈다. 땅의 모양이나 앞에 난 길을 보니 틀림없었다. 인터넷 지도에 주소를 검색해 스카이뷰를 확인하니 역시나 맞았다. 이젠 땅 주인을 만나는 일만 남았다. 학승 씨는 등기부등본을 떼 땅 주인의 주소를 확인했다. 주인은 강원도 춘천시 모 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학승 씨는 서울에 남아 계약금 부칠 준비를 하고, 그의 어머니가 춘천으로 가서 당일 가계약을 성사시켰다. “막상 찾아갔는데 사람이 없을 수도 있잖아요. 그런데 어머니께서 웬만한 집은 일요일 오후에 다 쉰다며 전철을 타고 가셨어요. 그렇게 그 날 바로 계약을 한 거죠.”

 

앞으로의 꿈에 대해 질문하자 전학승씨가 생각에 잠겨 있다.

■ 모든 게 낯설었던 도시 남자, 우연히 목공을 시작하다

“좀 신기하더라고요. 아파트에선 층수가 높으니까 베란다 밖으로 저 멀리 산이 보이거나 밑에 집들이 보이잖아요. 근데 여기선 마당에 있는 제 차가 정면으로 딱 보이니까요.”

처음엔 적응하는 게 일이었다. 아파트에선 집을 나서 현관문을 닫으면 끝이었고, 그다지 관리할 것도 많지 않았다. 하지만 시골 주택은 끊임없이 관리를 요한다. “부지런해야죠. 마당에 돌멩이를 깔아 놓으면 그 사이로 풀이 계속 올라와요. 시멘트로 바르지 않는 이상 계속 자라거든요.”

학승 씨는 밤이 되면 동네가 완전히 암흑에 잠기는 것도 낯설었다. “서울에는 저녁 아홉 시, 열 시 돼도 놀만 한 곳이 많잖아요. 그런데 여긴 집에 들어와서 밥 먹고, 텔레비전 뉴스 한 번 보고 나면 할 게 없어요. 잠은 안 오고, 누워서 멀뚱멀뚱 있었죠.”

새로운 일거리를 찾게된 건, 우연히 집을 찾아 온 개 한 마리와 인연을 맺게 되면서부터다. 집을 짓는 두 달 동안 학승 씨와 어머니는 이장님의 배려로 마을회관 2층에서 살았는데, 그 때 이 개가 매일 집 짓는 현장에 출근했다. “처음엔 그냥 동네 개인가 싶었는데, 매일 아침 같은 시간에 나오더라고요. 주인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지만 매일 우리 집에 오니 먹이고 재우고 했죠. 그래서 나무로 만든 집을 만들어줬어요.”

평생 못질 한 번 해본 적 없던 그는 그렇게 목공을 시작했다. 하다 보니 개집 하나를 짓더라도 ‘어떻게 하면 더 멋있게 지을 수 있을까’ 고민이 됐다. 인터넷으로도 알아보고 각종 동호회, 카페에도 가입했다. 학승 씨는 기존 게시글을 훑을수록 궁금한 게 늘어났다. 활동 반경을 조금씩 넓히다가 4,5년 전 우연히 네이버 밴드 ‘함께하는 초보목공’을 알게 됐다. “나중에 보니 밴드 리더랑 공동리더가 옥천에 사는 거예요. 그러니 서로 왕래를 하고, 만나고, 일이 점점 커진 거죠.” 

전학승 씨가 목공 기계 사용법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처음엔 이런 공방도 없었어요. 이것저것 만들다보니 장비도 좀 넣어야겠고, 욕심이 생겼죠.” 공방 이름은 호텔에서 바텐더로 일하며 가장 좋아했던 술 ‘와일드터키’의 이름을 땄다. “술 중에 와일드터키란 술이 있어요. 병에 야생칠면조 그림이 그려진 버번위스키(옥수수와 호밀로 만든 미국 위스키)였죠.” 또, 그는 야생칠면조가 갖는 자연의 느낌이 옥천과 이어지는 것 같다고도 했다.

“저는 낙천적으로 살려고 노력해요. 모든 걸 긍정적으로, 여유 있게, 편하게, 순리대로 생각하려고 노력을 많이 하죠.” 서울에서 호텔 바텐더로 일하던 그는 이제 옥천에서 목공 밴드 회원들, 이웃들, 심지어 동물들과도 인연을 맺으며 평화롭게 살고 있다. 그는 “옥천에 조금이라도 일찍 오지 못한 게 후회될 정도로 만족하며 살고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앞으로의 꿈은 옥천에서 목공학원을 열어 많은 사람들이 목공을 접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시대가 발전할수록 목공은 누구나 하고 싶어 하는 분야일 거예요. 그런 사람들에게 널리 알리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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