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성면사무소 앞 30년을 우뚝 지켜온 구멍가게
면사무소 여직원들의 부탁으로 가게 한 켠에서 점심밥을 차리기도
박옥란씨, “가게에서 함께했던 하숙생들 항상 보고싶어”

10살도 되지 않았을 적 자주 갔던, 전라북도 순창 금과면의 한 구멍가게가 기억 난다. 너무 조용해서 새 지저귀는 소리마저 크게 들리던 동네, 할머니 동네에 있던 그 가게를 나와 동생은 어른들 말을 따라 ‘구판장’이라 불렀다. 대형마트에 익숙해져 있던 탓에 살만한 것들이 별로 없을 걸 알았지만, 동생과 꼭 한번씩 들러서 무엇을 살 지 고민했다. 할머니 집은 지루하지만 구판장에 갈 때는 재밌었다. 가게 안 쪽 방에서는 동네 할아버지들이 막걸리를 마시고, 가끔 가게 앞에서 윷놀이 판도 벌어졌다. 그 작은 구멍가게에서 뿜어지던 소음이 좋았다. 중학생이 되던 무렵, 그곳은 사라졌다. 다시 그런 곳을 만날 수 있을까 고민하다 찾아 나섰다. 그리고 사라져버렸을 것이라 단정지었던 같은 모습의 구멍가게를 청성면과 군서면에서 발견했다. 드르륵 문을 열고 들어갔다. 들어서자 마자 보이는 과자들, 술이나 커피를 마실 수 있는 안 쪽 방까지 같은 구조였다.

■ 점심마다 밥을 차려 내놓던 구멍가게

지나가다 들렀다며 군청에서 일하는 공무원 안씨가 가게 문을 드르륵 열었다. 10년도 더 전에 청성면사무소에서 일했던 그는 지금 군청에서 일하고 있다. 청성에 일을 보러 온 참에 사장님 볼 겸, 가게 볼 겸, 이 곳에 들렸다고 했다. 

“여기 진짜 그대로예요. 예전에 여기서 일할 때 외상도 몇 번이나 했었는데… 하하. 어머니도 저를 기억해 주시더라고요. 기억 못하실 줄 알았는데, 고맙죠. 변한 게 하나도 없어요. 다시 와보니 정말 좋네요” 

30년 간 물건만 팔았다면 섭 할 정도로 몇몇 사람들의 삶의 일부를 책임졌던 구멍가게였다. 25년 전 즈음, 어느 날은 20살이 조금 넘어 보이는 면사무소 직원 셋이서 사장인 박옥란(84,청성면 산계리)씨에게 부탁을 하러 왔다. 구멍가게에서 점심밥을 해줄 수 있겠냐는 부탁이었다.

“젊은 여직원 셋이서 나이 많고, 계장 부장 되는 남직원들이랑 밥 먹기가 얼마나 불편 했겠어. 그래서 나한테 부탁을 한 거야. 그래서 이 곳에서 점심을 해주기 시작했지”

당시 청성면에는 오가는 차도 없고 길도 좋지 않았다. 그래서 청성면사무소, 학교, 농협직원, 소방관 할 것없이 청성에서 일하는 젊은이들의 식사 공간은 한정되어 있었다. 밥 먹는 시간만큼은 숨통 트이는 곳에서 먹겠다며 결국 다섯 명의 젊은이가 그 가게에 모였다. 그러나 그것이 시기의 대상이 될지는 몰랐다. 하루는 한 위생과 공무원이 식당 문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군 위생과에서 업무를 하던 그는 안절부절 못하며 “허가 없이 밥장사를 한다고 신고가 들어왔다”고 입을 열었다. 근처 몇 없는 식당들이 신고를 한 것이었다.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속상하고 화가 났다고 했다. 그 공무원도 마음이 아팠는지 여차여차해서 결국 식당 허가증을 받아내 그 이후에는 마음껏 밥을 차렸다. 그는 그 때 냈던 화가 아직도 미안했는지 “그 위생과 직원 이름이라도 좀 알아 놨으면 좋았을 텐데 아쉽다”고 말했다.   

■ 이름도 잊지 못한 그 때 그 하숙생들이 그립다

가게를 운영하며 만난 수많은 사람들 중, 기억에 남는 사람을 물어보니 그는 바로 이름들을 줄줄 읊었다. 이 곳에서 하숙을 하던 사람들이라 했다. 

“힘들긴 했어도 참 재미났지. 그 때 20대였던 애들이 이제는 어디 가서 한자리들 하고 있을 거야”

타지에서 오게 된 면사무소 직원의 권유로 사장은 하숙생을 받기 시작했다. 한 두 명으로 시작했지만 10명이 넘는 하숙생으로 북적일 때도 있었다. 돈이 많지 않고, 타지에서 오고 갈 여건이 되지 않는 이들에게 이곳은 언제나 든든한 공간이었다. 그렇게 10여 년이 넘는 세월 동안 마냥 즐겁다며 많은 이들의 보금자리를 책임졌다. 하숙을 시작한 지 10여 년 즈음이 되었을 무렵에도 몸은 힘들었지만 즐거웠다고 했다. 

그러다 사람 하나 오가기 어려웠던 궁촌제에 길이 생기고 버스가 오가기 시작했다. 

“버스에 익숙해지려 하니까, 이제는 다들 승용차를 몰고 다니 더라고”

청성에 머물렀던 이들은 떠나고, 새로 오는 이들은 출퇴근을 하니 하숙집에는 오는 발자국보다 나가는 발자국이 더 많이 남았다. 그래도 가끔씩 찾아오는  하숙생들이 있다며, “커피 한 잔 씩 마시며 잠시 몇 마디 나누면 그보다 반가운 일이 또 어디 있겠냐”고 말했다.  

■ 50여년이 걸려서 그제야 이룬 꿈

30년 전 큰 딸과 사위가 200만원으로 가게를 차려주며 시작한 구멍가게, 하지만 자식들은 “이제 힘드시니 가게일 좀 그만뒀으면 한다”고 말한다. 그래도 그는 청성에서, 그리고 이 가게에서 세월의 모든 변화를 지켜보고 따라갔으니 이 자리에서 계속 있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는 어린 시절 있었던 이야기를 꺼냈다. 

아직도 기억이 쨍쨍하다고 했다. 8살이 되던 해에 광복을 맞이했다. 11살에는 만나는 사람들마다 ‘ㄱ’부터 ‘ㅎ’까지 쓰는 법을 물어봤다. 글을 쓰고 읽고 싶은데 알려주는 사람이 없으니 답답할 노릇이었다. 그렇게 1년을 여기저기 물어 봐가며 용을 쓰니 조금은 쓸 수 있게 됐다. 하지만 큰 책에 나온 소설 같은 것은 읽기가 어려웠다. 

“한 아저씨가 ‘ㄱ’부터 ‘ㅎ’까지 쓰는 걸 알려줬어. 막내동생 등에 업고 틈 나는 대로 맨날 한글 공부를 했지. 나는 글이 그렇게 알고 싶더라고”

19살이 됐을 때 그는 27살 먹은 남편과 결혼했다. 바깥일도, 집안일도 안하는 뭐하나 잘난 것 없는 남편이었다. 스스로가 나서 생계를 책임져야 했기에 물장사, 두부 장사, 막일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그 와중에 ‘글’은 그에게 도전하고 싶은 목표였다. 두꺼운 성경책을 두 번이나 따라 쓰며 문장 보는 연습을 했다. 

“내 또래들 중에 내가 글을 그나마 쓰니까, 교회에서 글 써야할 일이 생기면 나를 찾아줘. 그게 참 즐겁고 뿌듯해” 

시간이 한참 흘러 몇 년 전에는 복지관 직원이 가게에 와서는 글쓰기 대회가 있으니 살아온 수기를 한 번 써달라 부탁했다. 줄 간격이 넓은 초등학생 공책을 펴놓고, 일제강점기부터 남북전쟁 지나 결혼해서 온갖 고생을 한 이야기를 거쳐 남편이 일찍 세상 떠난 얘기까지 썼는데, 술술 써졌다고 했다. 그 수기는 3위에 올라 과천청사까지 가서 상을 탔다. 학교도 안 가고 혼자 배워 쓴 글이라 더욱 뿌듯 했다고 말했다. 

청성면사무소 앞에는 30년 전 그대로인 구멍가게가 있다. ‘아직도 있냐’는 말이 어색하지 않지만 동시에 ‘여전히 있음에 고맙다’는 말들도 따라붙는 곳이다. 구멍가게 안 난로 위에는 주전자가 놓여있고, 커피 물이 조용히 끓고 있다. 여는 시간과 파하는 시간이 분명치 않다. 그저 날이 밝으면 나가서 문을 열고, 날이 지면 문을 닫는다. 이제 물건 사러 오는 손님은 손에 꼽지만 오고 가는 주민들에게, 오랜만에 찾아온 손님에게, 이 곳은 지금도 숨통 트이는 곳이다.

 

주소 : 청성면 산계길 52-1
영업시간 : 해 뜰때~해 질때 / 연중무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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