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장애인복지관, 매주 수요일 장애인 대상으로 하는 연극 수업 진행
역할 맡아 연기하고, 애드리브에 인물 재해석까지

도령 역 상호씨(왼쪽)와 채운 역 은자 씨(오른쪽)가 함께 호흡을 맞추고 있다.
도령 역 상호씨(왼쪽)와 채운 역 은자 씨(오른쪽)가 함께 호흡을 맞추고 있다.

‘역지사지(易地思之)’. 자신의 입장만 고집하지 말고 상대의 처지를 고려해보라는 의미다. 갈등은 단순히 ‘남을 돕겠다’는 이타적인 마음만으로 해결되지 않을 때가 있다. ‘내가 저 사람 입장이라면’, ‘저 사람의 일이 내 일이라면’이라는 역지사지와 연대를 통해 좀 더 효과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이런 이유로 연극을 만드는 사람들은 그 과정에서 다양한 사회 구성원들의 입장과 처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또, 자신에 대해서도 들여다볼 수 있다. ‘이 상황에서 나라면 어떻게 할까?’

옥천군노인장애인복지관(이하 복지관)에서는 매주 수요일 오후 1시부터 3시까지 장애인을 대상으로 하는 연극 수업이 열린다. 신청자는 총 12명으로 옥천에서 7명, 청성면에서 2명, 동이, 안남, 안내에서 각각 한 명씩 등록했다. 연령대도 20대 3명, 30대 3명, 40대 4명, 50대 2명으로 다양하다.

몸 풀 겸 진행된 '종이컵 쓰러트리기' 경기에서 파란 팀 형기 씨가 탁구공을 던져 종이컵을 맞추고 있다.

3일 복지관 202호에는 그 중 열 명의 수강생이 교육을 듣기 위해 모였다. 은자(30, 옥천읍 삼양리) 씨, 지연(34, 옥천읍 양수리) 씨, 희숙 씨, 상호 씨, 은종(51, 옥천읍 양수리) 씨, 영덕 씨, 영택 씨, 성복 씨, 갑기 씨, 형기 씨. 이들은 수업 전 자리에 앉아 서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점심 식사 직후라 강의실 안에는 나른한 기운이 감돌았다. 한국장애인복지관협회 소속 김선희 강사는 본격적인 수업에 앞서 잠을 깨우기 위해 몸을 쭉 늘였다. 수강생들은 팔 꼬기, 손 털기 등 가벼운 체조로 몸을 풀었고, 이후 종이컵 쓰러트리기 경기를 했다. 팀을 나누고 수강생들이 돌아가면서 탁구공을 바닥에 한 번 튀긴 후 종이컵을 맞춰 쓰러뜨렸다. 노란 선 앞에 선 수강생들은 진지한 눈빛으로 거리를 어림해가며 신중하게 공을 던졌다. 경기는 균형을 맞추며 팽팽하게 이어졌지만, 형기 씨와 영덕 씨의 선전으로 파란 팀이 승리했다. 경기가 끝난 후에는 승패와 상관없이 모든 수강생이 앞으로 나와 함께 뒷정리를 했다.

 

동네 사람 역을 맡은 성복 씨(왼쪽) 와 갑기 씨(오른쪽)가 서로 말을 주고 받고 있다.
동네 사람 역을 맡은 성복 씨(왼쪽) 와 갑기 씨(오른쪽)가 서로 말을 주고 받고 있다.

 

■ 수강생들 적극 참여…주어진 대사부터 애드리브까지 척척

몸을 움직이다 보니 수강생들의 얼굴에 다시 활기가 돌기 시작했다. 김 강사는 이제 본격적인 연극 수업으로 들어갔다. 먼저 오늘 수업에서 다룰 연극 줄거리부터 소개했다. 이야기는 우리 모두에게 익숙한 구절, “옛날 옛날 아주 오랜 옛날 어느 마을에 어린 소녀가 살았어요”로 시작했다.

소녀의 이름은 ‘채운’인데,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와 함께 산다. 막노동하는 아버지를 따라갔다가 이른 나이에 아버지를 잃은 양반집 도령을 만나게 된다. 서로의 아픔에 공감하며 채운과 도령은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채운이 아버지가 새엄마와 이복동생 옥자를 데려오면서 채운이의 삶은 고달파진다. 이를 지켜보던 동네 사람들은 수군대기 시작했고, 온갖 계략으로 채운이를 괴롭히던 새엄마와 옥자는 원님의 심판으로 쫓겨난다.

“자, 이 이야기로 연극을 만들어 볼 거예요.” 김 강사는 칠판 위 두 장의 종이를 가리켰다. 한 장은 ‘채운’, 또 한 장은 ‘옥자’라는 제목이 붙어있었다. “그 전에 인물들의 특징을 한 번 얘기해 봅시다.” 그러자 갑기 씨가 “채운이는 좋은 사람”이라고 외쳤고, 영덕 씨가 “참을성이 있다”며 덧붙였다. 지연 씨는 “배려심이 깊다”고 말했다. 김 강사가 “이번에는 옥자에 대해 말해보자”고 하자, 갑기 씨는 “나쁜 사람”, 은종 씨는 “샘이 많다”, 형기 씨는 “괴팍스럽다”고 답했다.

아버지 역 영덕 씨(왼쪽)와 시종 역 영택 씨(오른쪽)가 서로 대사를 주고 받고 있다.
아버지 역 영덕 씨(왼쪽)와 시종 역 영택 씨(오른쪽)가 서로 대사를 주고 받고 있다.

인물 성격 분석이 끝나고 캐스팅이 이루어졌다. “은자 씨가 채운이 하실래요? 도령은 오랜만에 오신 상호 씨가 한 번 해보시겠어요?” 그렇게 주인공 채운 역은 은자 씨, 도령 역은 상호 씨가 맡았다. 새엄마 역은 지연 씨에게로 돌아갔다. 김 강사는 지연 씨에게 당부했다. “웃음기를 빼고 해야 해요. 채운이한테 ‘밥 해와!’ 소리쳐야 하는데 계속 ‘흐흐흐’ 하면 안 돼. 알겠죠?” 옥자 역엔 희숙 씨, 채운 아버지 역엔 영덕 씨가 낙점됐다. 도령의 어머니인 마님 역할은 은종 씨가 맡았다. 도령의 시종은 영택 씨, 동네 사람은 성복 씨와 갑기 씨, 원님 역은 형기 씨가 하기로 했다.

무대는 강의실 중간에 마련된 공간이다. 각자 맡은 역할을 기억하고, 필요한 장면이 되면 무대로 나왔다. 대사는 김 강사가 알려주기도 하고, 상황에 맞게 수강생들이 애드리브를 넣기도 했다. 아버지 역을 맡은 영덕 씨는 “너 맨날 혼자 있고 그래서 내가 새장가를 가야겠다”는 대사를 금방 만들어냈다. 채운 역을 맡은 은자 씨 역시 “좋아요. 저도 엄마가 있으면 좋겠어요”라고 수줍게 받아쳤다.

하지만 전혀 다른 인생을 살아온 인물이 되어 연극을 한다는 게 모두에게 쉬운 일은 아니다. 동네 사람 중 할아버지 역할을 맡은 갑기 씨가 젊은이 역을 맡은 성복 씨를 향해 존댓말을 했다. “갑기 씨가 최고 어른이니까 반말로 해봐요. 물론 어른도 존댓말 할 수 있지만 이건 연극이니까요. ‘잘 지냈냐’ 해보세요.” 갑기 씨는 끄덕끄덕하더니 성복 씨를 향해 “잘 지냈어요?”라고 말했다. 김 강사는 “‘잘 지냈어요’ 말고 ‘잘 지냈냐’라고 해보자. 평소에 성복 씨한테 하는 것처럼 하면 된다”고 지도했다. 갑기 씨는 고개를 끄덕인 후 다시 역할에 몰입했다. “잘 지냈어요? 소문 들었어요?”

옥자 역 희숙 씨(왼쪽)가 새엄마 역 지연 씨(오른쪽)에게 투정부리는 연기를 하고 있다.
옥자 역 희숙 씨(왼쪽)가 새엄마 역 지연 씨(오른쪽)에게 투정부리는 연기를 하고 있다.

드디어 도령 역할을 맡은 상호 씨가 동네 사람들로부터 채운이가 구박당한다는 소식을 듣게 됐다. 김 강사가 “채운이가 너무 불쌍하다. 도와줄 방법이 없겠냐”고 상호 씨에게 물었다. 상호 씨는 “생각을 해봐야 한다”면서도 영택 씨를 불러 “우리 집에 떡 있지? 그걸 채운이 집에 갖다 줘. 꼭 채운이에게 줘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자 영택 씨는 떡에 ‘고기’라는 상상도 추가했다. 품 안에 무언가(아마도 떡과 고기)를 한 아름 안은 것처럼 팔을 둥글게 감고 엉거주춤 자세를 낮춘 뒤 채운이네 집으로 향했다.

마침내 도령이 어머니에게 채운이에 대한 마음을 고백했다. “채운이가 성격도 좋고 착하기 때문에 좋아하고 사랑해요. 결혼을 허락해주세요.” 상호 씨의 애절한 대사가 무대를 갈랐다. 하지만 마님 역을 맡은 은종 씨는 완고했다. “안 된다. 아무리 채운이가 착해도 우리 집안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다르게 생각을 해라. 네 앞날도 있잖니.”
한바탕 토론이 오간 후에야 겨우 은종 씨의 마음이 열렸다. 은종 씨가 도령 역의 상호 씨를 향해 물었다. “결혼하면 남들이 뭐라 하든 채운이 버리지 않고 잘 살 수 있겠냐?” 상호 씨가 고개를 끄덕이며 힘차게 대답했다. “예!”

질투에 눈이 멀어 채운이에게 억울한 누명을 씌우려 했던 새엄마와 옥자는 쫓겨났다. 원님 역을 맡은 형기 씨가 무대 중앙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김 강사가 형기 씨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아무 죄도 없는 채운이가 억울해서 물에 빠져 죽으려 했어요. 이제 새엄마와 옥자에게 어떤 벌을 내릴까요?” 형기 씨는 새엄마와 옥자를 향해 “이 마을에서 내쫓아라! 다시는 마을로 돌아오지 못하게 하라!”며 현명한 판결로 극을 마무리했다.

연극이 끝나고 수강생들이 자리로 돌아갔다. 김 강사는 “예컨대 새엄마 역할을 해 보면 미워하는 마음에 대해 이해해볼 수 있다. 연극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이런 저런 역할을 하며 ‘내가 아닌 남’이 되어보는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의 목표는 ‘공연’이 아니라, 서로의 마음을 알아가며 ‘치유’하는 것이에요.”

도령 역 상호씨(왼쪽)가 마님 역 은종씨(오른쪽)를 설득하고 있다.

■ 전래동화의 재해석…힘들고 아파도 참는 게 좋은 사람?

옛날에는 채운이처럼 힘들어도 참고 아파도 참고 열심히 일만 하는 사람을 이상적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비슷한 줄거리의 전래 동화들이 많다. 그런데 실제로 동화 속 주인공들처럼 꾹 참고 살기만 하면 어떨까. 아마 우울증과 화병으로 제 명에 못 살지 않을까?

그래서 김 강사는 인물들의 성격을 한번 다르게 만들어보자고 제안했다. “새엄마가 ‘물 떠와!’ 이러면 ‘어머니, 너무 힘들어서 저 이따 떠오고 싶어요’라고 말해 볼 거예요. 새엄마가 옷을 뺏으면 ‘이건 제 옷이에요. 뺏지 마세요’라고 하는 거예요.”
아까 연극에서 새엄마 역할을 맡았던 지연 씨가 무대 앞으로 나왔다. 이번엔 새엄마가 아니라 채운 역을 맡는다. 대신 꾹 참는 채운이가 아니라 ‘할 말은 하는’ 채운이다. 대사를 맞춰줄 새엄마 역은 은종 씨가 맡았다.

김 강사의 안내에 따라 지연 씨와 은종 씨가 마주 앉았다. 새엄마 은종 씨는 지연 씨에게 손가락질했다. “너 예쁜 옷 입지 말고 저기 가서 까만 옷 입고 와.” 그러자 지연 씨는 그동안 채운이가 참아왔을 말들을 쏟아내며 달라진 채운 역을 멋지게 소화해냈다. 지연 씨는 단호하게 “싫다”고 외쳤다. “엄마, 왜 저만 일 시키고 옥자는 안 시키세요? 저도 예쁜 옷 입고 싶어요. 저도 같이 밥 먹고 싶어요. 여긴 우리 집이잖아요.”

무대에서는 이렇게 말을 잘하는 지연 씨지만, 실제로 집에서 혼날 때는 아무 말도 못 한다고 한다. “진짜로는 못하죠. 연극이니까 이렇게 하는 거예요.” 갑기 씨도 ‘형님이랑 싸울 때 때리지 말라고 할 수 있겠냐’는 질문에 대답이 없었다. 김 강사는 본인도 마찬가지라며 수강생들을 다독였다. “저도 현실에서는 못했을 거예요. 지금은 오히려 대드는 자식들을 혼내는 엄마이기도 해요.”

하지만 현실에서야말로 부당한 일에 ‘싫어요’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래서 김 강사도 수강생들에게 말한다. “그래도 진짜 아니다 싶을 때는 하지 마세요. ‘나는 이거 싫어요. 하지 않을래요’라고 말하는 거예요. 무조건 참는 게 좋은 건 아니잖아요. 그렇죠?”

20년부터 시작된 연극 수업은 코로나 때문에 21년 3월부터 제대로 진행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다들 말도 잘 안 하고 수업을 낯설어했지만, 이제는 말과 표정을 통해 생각과 감정을 전달하는 게 조금은 익숙해졌다. 김 강사는 “말을 안 하시던 분들도 표현력이 좋아지시는 걸 느낀다”며 “연극은 정신 장애와 발달 장애인분들이 즐겁고 재미있게 사회성을 기를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라고 말했다. “수강생들이 연극을 하면서 더 이상 사회와 유리되지 않고, 이제는 그 속으로 스며들기를 기대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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