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장애인복지관 연극 수업에서 만난 유은종(51) 씨 인터뷰

노인장애인복지관에서 장애인 연극 교육을 받는 유은종(51)씨.
노인장애인복지관에서 장애인 연극 교육을 받는 유은종(51)씨.

“우리 같은 환자, 등신이니 병신이니 그렇게 부르는데요. 물론 평범한 사람들보다는 많이 못 하겠지요. 그래도 버러지 보듯 그렇게 손가락질하지는 마세요. 우리도 사람입니다.”

■ 적응하기 어려웠던 학창 시절부터 조현병 진단을 받기까지

유은종(51, 옥천읍 양수리) 씨는 옥천에서 태어나 삼양초등학교를 졸업했다. 그는 학창 시절 기억을 떠올리는 것이 즐겁지 않다고 했다. 어릴 적 머리에 부스럼이 나서 머리를 밀고 모자를 쓰고 다녔는데, 당시 계절용 모자가 따로 없어 사계절 내내 겨울 모자를 썼다. 통풍이 제대로 안 되니 머리에 난 부스럼은 어느새 종기가 됐고 상처는 더 심해졌다. 친구들은 그런 은종 씨를 보듬어주기보단 놀림의 대상으로 삼았다. 설상가상으로 출생신고를 잘못해 학교에 다니고 멈추기를 반복했다. 은종 씨는 초등학교 1학년생으로만 삼 년을 다녔다. 학교에 제대로 적응할 수가 없었고, 학창 시절 내내 친구들 사이를 겉돌았다.

이후 중·고등학교에 진학하지 않고 서울로 올라가 15년을 살았다. 옷 공장을 하는 작은 아버지 집에 얹혀살며 밥하고, 일하고, 세 살배기 사촌 동생을 돌봤다. 그 무렵 은종 씨는 ‘내 마음이 내 마음 같지 않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 어쩌면 정신 질환일지도 모르겠다고 여겨 다른 사람들에게 고민을 털어놓기도 했다. 하지만 이 사실을 알게 된 작은 아버지가 은종 씨를 불러내 손찌검을 했다. “왜 남들에게 그런 이야기를 하고 다니느냐.” 은종 씨가 집안의 체면을 깎아 먹는다는 것이다. “그때는 ‘정신 나간 소리’를 하면 병동에 가둬야 한다는 인식이 있었어요. 아파도 무조건 숨겼어요. 그러니 그게 병인지도 모르고 그냥 지나가 버렸죠.”

이후 옥천으로 돌아와 중장비 운전기사로 일하는 열 살 연상의 남편과 결혼했다. 예쁜 딸도 둘 낳으며 평범한 가정을 꾸렸다. 그런데 큰 아이를 출산한 후부터 알 수 없는 압박감이 가슴을 짓누르기 시작했다. 남들 하는 대로 아이 젖을 물리고 기저귀를 갈긴 했지만, 앞으로 이유식은 어떻게 해야 할지 육아와 병행하며 식구들 밥은 또 어떻게 차려야 할지 앞이 깜깜했다. 남편은 새벽에 나가서 밤에 돌아왔기에 아이를 같이 돌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럴수록 은종 씨의 증상은 점점 심각해졌다.

처음에는 자궁 쪽에 이상이 생긴 것 같다고 해서 옥천성모병원으로 향했다. 산부인과에서 입원하라고 해서 병실에 누웠는데 잠이 오지 않았다. 이것도 궁금하고, 저것도 궁금하고, 세상 모든 일이 다 궁금했다. 눈을 감으면 알고 싶은 것들이 끝도 없이 부풀어 올랐다. 참지 못하고 병실을 빠져나와 목욕실을 들여다보고 다시 병실에 돌아와 화장실을 들여다봤다. 밤새 호기심을 달래느라 잠도 자지 못했다. 은종 씨는 더 이상 아이에게 젖도 물리지 못했다. 복용하는 약 때문에 아이가 잘못될까 봐 걱정됐기 때문이다. 쫄쫄 굶는 아기를 두고 어쩔 줄 몰랐다. 그래서 젖 대신 어른들 먹는 두유를 먹였다.

그때 가장 먼저 은종 씨의 증상을 알아챈 사람은 산부인과 간호사였다. 그는 은종 씨에게 당시 대전 선화동에 있던 정신과를 소개했다. 병원에 갔더니 의사가 제대로 된 검사도 하지 않고 상담만 본 후 우울증 진단을 내렸다. 남편이 병원에서 꼬박꼬박 약을 타 왔는데, 그 약을 먹으면 그대로 기절해 온종일 잠만 잤다. 아무리 오랜 시간 잠을 자도 전혀 개운하지 않았다. 심지어는 잠기운 때문에 화장실까지 걸어가지도 못했다. 다른 병원으로 옮기고 나서야 병명이 ‘조현병’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 “장애인도 사람입니다”

은종 씨는 5년 전쯤부터 옥천군노인장애인복지관에서 교육을 듣기 시작했다. 노래 교실을 다녔고, 꽃꽂이 수업도 수강했다. 요즘은 장애인 연극 수업을 듣고 있다. 발달 장애, 정신 장애를 앓고 있는 사람들이 모여 하나의 작품을 만든다. 수업을 들으며 다른 수강생들과 친해지고 싶은 마음도 있었었는데, 나이가 많은 편이라 먼저 다가가지 못했다. 다행히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말도 트고 얼굴도 익혔다. “이젠 수업 나가면 다들 어우러지는 게 보여요. 호흡도 잘 맞고요.”

연극의 좋은 점은 자기 세상에서 벗어나 다른 삶을 살아볼 수 있다는 것이다. “제 생활에서 벗어나는 느낌이에요. 백 퍼센트 즐겁다곤 못하지만 어쨌든 삶의 다른 패턴을 경험하잖아요.” 또,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누군가 내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도 감사한 일이다. “사람들은 제 발음이 뭉그러진다고, 그래서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모르겠다고 그래요. 아무도 제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아요. 그래서 그나마 여기 오는 게 좋아요.”

“차라리 결혼 안 하고 일찌감치 죽었으면 어떨까 싶어요.” 은종 씨는 이런 극단적인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자기는 제대로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다고 말했다. 꼼꼼하지도 않고, 예쁘게 꾸미는 것도 못 하고, 맛있는 음식도 못 만든다고. “꿈은 사라졌어요. 이것저것 하고 싶은 건 많은데 손 떨림이 생긴 후론 다 포기했어요. 흥분상태가 심했다 팍 가라앉았다 이러니까 뭘 배운다고 해도 몸이 따라가질 못해요.”

잘하는 건 도저히 모르겠다고 고개를 저으면서도, 좋아하는 일을 묻자 은종 씨의 눈이 반짝였다. 그의 평소 취미는 노래 부르기다. 18번은 김용임의 ‘부초같은 인생’이다.

“가사가 꼭 제가 살아온 인생 같아요. 더 이상 그렇게 살지 말자고 생각했는데 그게 안 되네요.” 노래 한 소절만 들려달라는 요청에 은종 씨는 금세 절절한 곡조를 뽑아냈다. 

“내 인생 고달프다 물어본다고~ 누가 내 맘 알리오~ 어차피 내가 택한 길이 아니냐~ 웃으면서 살아가 보자~”

은종 씨의 바람은 그저 코로나가 빨리 지나가고 가족들이 건강한 모습으로 지내는 것이라고 했다. 또, 사람들이 장애인을 너무 괄시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사람들이 정신 질환자들이 다니는 센터 팸플릿을 보고 손가락질하는 걸 봤어요.” 그는 “우리도 어떻게든 해보려고 노력하고 활동하고 있다”며 안타까운 심정을 전했다.

“…장애인도 사람입니다.”

은종 씨의 목소리가 떨렸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느냐는 질문에 대한 그의 대답이었다. 누군가는 이 당연한 명제를 말하기 위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는 세월의 아픔을 삼켜내야 했다. 은종 씨는 진짜 마지막으로 당부의 말을 덧붙였다.

“우리가 보통은 못 되어도요, 아주 포기하고 사는 사람은 없어요. 그러니 너무 아랫사람으로 보지는 말아줬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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