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팔 이주여성 구릉소니 배우자 김원희(46)씨
“저희 집은 네팔 문화원이나 다름없어요.”

 김원희(46)씨
 김원희(46)씨

“지나갈 때마다 5만원을 줘요. 저희가 불쌍해 보였나 봐요. 제가 보기에는 저 사람들이 더 불쌍해 보이는데.”

김원희(46,읍 금구리)씨는 어느 순간 차별을 받는 당사자가 되었다. 옥천에 와서 식당에 가니 밥 먹으라고 5만원을 주고, 대전에 가니까 아이가 이쁘다고 5만원을 주었다. 이주여성 구릉소니(31,읍 금구리)씨의 배우자가 되자 처음 겪었던 일들이다. 

“제가 또 생긴 게 네팔 사람처럼 생겼나 봐요. 사람들이 저희 앞에서 ‘한국 사람이 아니라서 말귀를 못 알아듣나?’ 이런 식으로 말하더라고요.”

네팔에서 온 이주여성 구릉소니씨와 인터뷰(옥수수 2021년11월5일자 13호 참고)를 하면서 건네 들었던 남편 김원희 씨의 이야기는 흥미로웠다. 옥천군결혼이주여성협의회의 유일한 자문위원이자 남성이고, 부부의 집은 네팔 이주여성과 노동자의 만남의 장소였다. 이주여성 부인에게 가정 폭력을 저지르고, 사생활을 억압하는 보통의 ‘한국 남편’ 이미지와는 다른 모습이 존재했다. 이주여성 배우자로서 살아가는 그의 이야기를 듣고자 2일 저녁, ‘오카이브’에서 그를 만났다.

대안학교 선생님 시절, 네팔로 가정방문을 떠났다.(사진제공 : 김원희)
대안학교 선생님 시절, 네팔로 가정방문을 떠났다.(사진제공 : 김원희)

 

■ 네팔로 가정방문을 떠난 대안학교 선생님

대안학교인 지리산고등학교(경남 산청)에 교사로 재직할 시기, 학교에는 3명의 네팔 학생들이 있었다. 타국의 아이들을 학교에서 가르치고, 봉사하면서 살아가게 하기 위한 취지였다. 학비, 기숙사비 모두 무료였다. 공부하러 온 네팔 학생들은 2년이 지나도록 고향에 가지 못했다. 스마트폰이 대중화되지 않은 시절이라 국제전화비 부담으로 연락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김원희씨는 가정방문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네팔에서도 제일 멀리 살고 있는 학생과 함께였다. 본인과 학생의 항공비를 전액 사비로 부담했다. 가지 못하는 네팔 학생은 영상으로 담아 가족들에게 보여주기로 했다. 2012년, 그렇게 처음 네팔에 가게 되었다. “버스 타고, 걷기도 하면서 산길을 넘어갔어요. 그렇게 한 마을에 도착했어요.”

제자는 마을에서 머무르고 있으면 혼자 집에 다녀오겠다고 했다. “여기서부터는 길이 험해서 선생님은 가다가 죽을 수도 있다고 했어요. 그래서 기간을 정해놓고 이때까지 꼭 돌아오라고 했죠.” 그렇게 제자의 친척 집에서 머물렀다. 마을 아이들과 놀고 어르신들의 일을 도왔다. “자기 친척 집이라고 했어요. 그놈이 나쁜 놈(?)이에요(웃음). 자기 사촌이랑 저를 연결해 주려고 거기에 있으라고 한 것 같아요.” 그때 머물렀던 집은 현재 장인, 장모의 집이 되었다. 배우자 구릉소니씨와의 인연은 거기서 시작됐다.

네팔을 방문해 지금의 아내를 만나게 되었다.(사진제공 : 김원희)

 

■ 사회복지에 대한 관심, 도전

네팔까지 가정방문을 떠날 정도로 그는 열정적인 교육자였다. 청주에 있는 대학에서 지리교육을 전공하고, 쭉 ‘대안’ 교육에 대해 고민했다. 그가 생각하는 대안교육은 특별한 것이 아니다. 단지 교육의 기본으로 돌아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대안이라는 건 사실 기본으로 돌아가자는 거예요. 사람이 되고 남을 헤아릴 수 있는 교육을 하자는 거죠. 지금은 많이 배우고 똑똑할수록 나쁜 짓을 더 많이 해요. 교육의 목표가 자기 잘 먹고 잘 살자고 다른 사람 짓밟는 게 아니잖아요. 그래서 대안학교에 있을 때 ‘공부 못해도 되니까 예의 없는 행동만 하지 말자’ 그런 말을 많이 했어요.”

대안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칠정교회(경남 산청)에서는 갈 곳 없는 농촌의 아이들을 가르쳤다. 그때 조한우 목사를 만났다. 그는 사회복지사 자격을 가지고 사람들을 도왔다. 그걸 보면서 사회복지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사회복지에 관심이 생기고 고민을 했어요. 다시 대학에 가기는 힘들 것 같으니까 어디 가면 사회복지를 공부할 수 있을까. 그래서 사회복지 정책을 내는 공무원이 되고 싶어졌어요. 2018년 5월에 사회복지 자격증을 따고, 8월에 지방직 공무원 시험을 봐서 어렸을 때 살았던 태백시에서 사회복지 공무원이 되었어요.”

그러나 생각만큼 행복하지는 않았다. 배우자인 구릉소니씨도 연고도 없는 태백에 머무는 것을 힘들어했다. 그래서 일을 그만두었다. 구릉소니씨의 사촌오빠이자 김원희씨의 제자가 있던 옥천으로 왔다. 

네팔 전통복식을 입고있는 김원희씨(사진제공 : 김원희)

 

■ 연고도 없던 옥천에 왔다

그렇게 옥천에 모였다. 원래 옥천에 거주하던 네팔 출신 이주여성 2명과 남성 노동자들과도 금세 친해졌다. 구릉소니씨와 김원희씨의 집에 네팔 사람들이 모였다. 

“거의 네팔 문화원이 된 거죠. 주말이면 모여서 음식 만들어 먹고, 명절이라고 또 모이고, 계속 모여요. 저도 좋죠. 부인이 행복해야 저도 행복한 거니까요. 제 부인의 친구면 저한테도 친구니까요. 남편들이 이주여성 배우자가 친구들이랑 놀지 못하게 막는 게 말도 안 되는 거죠. 만약에 이주여성이 아니라 한국 사람이라도 그렇게 할 수 있을까요?”

다문화센터와 이주여성 모임에 나가는 구릉소니씨 덕분에 부티탄화(39)씨도 만나게 되었다. 결혼이주여성협의회 모임이 결성될 즈음이었다. “아내가 리더십도 있고, 다른 사람도 잘 도와주던 사람이었거든요. 이주여성 모임이 있다고 해서 저도 아이를 업고 나갔어요.”

처음엔 행정 업무를 조금씩 도와주었다. 그러다가 결혼이주여성협의회 정관을 만드는 일에도 참여했다. 아예 자문위원까지 맡아 협의회 활동을 도와주기 시작했다. 이제는 나의 일, 나의 가족의 일이 된 이주여성 인권에 대해 고민했다. 그가 보여준 파일에는 스스로 고민한 흔적이 가득했다. 다문화 가정의 아동과 이주여성의 교육 문제, 여성의 인권, 일자리, 지역사회 내 이주여성 역할에 대한 고민을 협의회와 함께 이어갔다.

“여성 인권이 보호받지 못하는 현실에서 이주여성은 그중에서도 최하층에 있어요. 물론 복지제도나 다문화센터 같은 도움이 있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차별이나 가정에서의 차별은 여전히 심각하죠.”

김원희 씨는 부티탄화 회장과 함께 협의회 정관을 만들면서 더 이상 이주여성은 사회에 ‘이방인’으로서 살아갈 수 없다는 생각을 했다. 시혜적으로 도움을 받는 존재가 아니라 사회에 이바지하는 당당한 일원으로서 살아가야 한다는 내용이다. 

“부티탄화 회장님이 처음 정관을 만들면서 했던 말은 ‘우리는 지원 받으려고 온 사람이 아니고 도우려는 사람들이다’, 그런 말을 했어요. 그렇게 해서 지역사회 내에서 시민성을 가지게 되는거죠.” 

“각 읍면동에는 지역사회보장협의체가 있어요. 거기에 이주여성들이 참여했으면 좋겠어요. 당연한 거 아닐까요? 지역의 주체잖아요. 지금도 충분히 지역사회를 먹여살리고, 활력을 불어넣고 있고, 평생을 사는 분들이잖아요. 10년 뒤 그분들이 이장이 될 수도 있어요. 그러니까 지역에 이런 문제들이 있으니 같이 해결하자고 말했으면 좋겠어요.”

구릉소니·김원희 부부의 집은 주말마다 '네팔문화원'이 된다.(사진제공 : 김원희)

 

■ 이주여성들과 함께 만들어가는 공동체

이주여성협의회 자문위원으로서 김원희씨가 꿈꾸는 일은 이주여성들과 자녀들의 교육공동체 결성이다. 아이들뿐만 아니라 이주여성들도 언제든지 언어와 컴퓨터 활용능력 등을 교육 받을 수 있는 공동체를 만들고 싶다.

“한국어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한 한자와 영어, 그리고 검색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주는 컴퓨터 활용능력까지 다 같이 배웠으면 좋겠어요. 아이와 엄마. 그렇게 같이 앉아서 서로 가르치고 배우면 좋지 않을까요? 이주여성이 현재 대부분 하는 일은 육체노동이거든요. 젊고 생산성 있는 이주여성들도 언어적 장벽을 넘어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가져야죠.”

또한 그가 바라는 지점은 이주여성들이 자신의 고향을 잃지 않는 것이다. 그는 종종 만나는 베트남 이주여성의 자녀에게 베트남 역사에 대해 알려준다. 관련 다큐멘터리도 보여주고, 역사를 가르쳐주니 자녀들 또한 엄마의 나라에 관심을 가지고 좋아한다.

“나라들마다 특성이 있고 장점이 있잖아요. 지금은 이주여성들이 고향을 싹 지우고 한국인으로서만 살아가도록 하잖아요. 그게 될 리가 없잖아요. 그러면 자기 나라를 자랑스럽게 생각하게 만들어야죠. 내 나라, 내 엄마의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 알 수 있도록 해줬으면 좋겠어요.”  

 

충북도립대에 입학한 네팔인 제자와 김원희씨(사진제공 : 김원희) 
충북도립대에 입학한 네팔인 제자와 김원희씨(사진제공 : 김원희) 

 

■ 지금은 옥천 공부 중..“사회복지 공무원으로 정책을 시행하고 싶다”

결혼 이후 김원희 씨는 본인을 한국 사람이자 네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부모님이 작고하시고 아이가 다 크면 네팔로 가서 학교를 짓고 아이들을 교육하고 싶다. 그전까지는 옥천에서 계속 살아가고 싶다. “손자 보고 싶다고 아버지도 옥천으로 이사 오셨어요. 결국 가족이 옥천에 다 모여있으니까 이제 떠날 수가 없어요. 여기서 계속 살아가야죠.”

그는 현재 옥천지역아동센터에서 생활복지사로 일한다. 결혼이주여성협의회, 지역아동센터에서 활동하면서 지역을 ‘공부’하고 내년에는 옥천군 사회복지 공무원에 도전할 예정이다. 

“옥천에 와서 지금까지는 공부를 하고 있었던 거죠. 공무원 ‘시험’ 준비가 아니라 사회복지 정책을 시행하기 위한 공부였죠. 남들은 공무원이 되기 위해서 사회복지를 공부하는데 저는 사회복지를 공부하고, 정책을 시행하고 싶어서 공무원이 되는 거죠.”

교육, 아동, 이주여성, 인권에 이어 요즘은 농업과 적정기술에 대해서도 끊임없이 고민하고 있다. 그는 기본이 지켜지고, 사람이 살아갈 수 있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물론 “혼자서는 아무것도 변화시킬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래서 그는 여전히 지역 가장 깊숙한 곳에서 지역을 경험하고 공부하며 살아간다. 

“저는 아이들을 가르치고, 어르신 짐 들어드리고, 이주여성들과 이야기하는, 그런 사람다운 관계를 맺을 때 행복함을 느껴요. 사람이 어떤 목적에 의해 관계를 맺게 되면 불행해진다고 생각해요. 지금은 사람이 살아야 하는데 돈이 사는 사회가 된 것 같아요. 그니까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들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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