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화순서 ‘구조대원’의 꿈을 펼치고 있는 심현준 소방사
목표한 꿈을 이루기 위해 거쳐온 자신만의 길을 말하다
“포기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면 결국 자신만의 길을 찾게 될 것”

그는 말한다. 어쩌면 그간 달려온 자신의 길이 누군가에게는 무척이나 평범하고 당연한 삶이라 느껴질지 모른다고. 그는 또다시 말한다. “내가 대단한 학벌도 아니고 그렇다고 누구보다 특별한 직업을 가졌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고. 다만, “그 누가 뭐라 할지라도 나 자신에게 만큼은 내가 걸어온 이 길이 무척이나 자랑스럽고 행복한 순간이었다고” 
그에게는 언제나 자신만의 ‘뚜렷한 목표’가 있었다. 그 과정에 길이 없다면 어떻게든 ‘개척’해 한 발씩 내디뎠다. 그는 말한다. “내가 특별해서 금세 목표를 이루어낸 것이 아니라 나를 지지하고 응원해 주는 수많은 이들의 도움이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있을 수 있다”고. “나 역시 수많은 이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사람이 되자고” 말이다. 
언젠가 방황하던 자신을 이끌어주던 수많은 이들을 생각하며 심현준(27, 전남 화순) 소방사는 다짐했다. “생과 사의 기로를 오가며 누군가의 인생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마지막 보루인 ‘소방관’ 되자!” 그리고 ‘누구보다 먼저’, ‘누구보다 늦게’ 현장을 빠져나오는 ‘구조대원’이 되자”고 말이다. 볕이 따듯한 어느 날, 지금까지 쉼 없이 달려온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기로 했다. 

 

■ 처음으로 무언가를 이뤄보겠다는 ‘열망’
그는 청산면 하서리가 고향이다. 어린시절 대부분을 청산에서 살았고 고등학교를 들어갈 무렵 구읍으로 넘어왔다. 조금 더 큰 곳에서 자식들을 교육시키겠다는 아버지의 의지가 컸다. 여느 학생들이 그렇듯 그에게도 방황의 시기가 찾아왔다. 그는 특히나 공부를 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인문계를 진학 하고 있었다고. 인문계를 진학하겠다는 ‘열망’이 그가 처음으로 펜을 잡게 만들었다. 그러나 자신이 원하던 인문계를 진학하고도 여전히 공부에는 뜻이 없던 그였다. 공부를 해야 할 이유를 몰랐기 때문이다. 
그는 전교생 260여 명 학생들 가운데 늘 250여 등에 머물렀다. 하루는 야자(야간자율학습)가 너무 하기 싫어 “나는 공부를 할 생각이 없고 이 시간이 나에게는 지옥과 같은 시간이다”라며 자신은 야자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이야기했다. 역시나 강한 제지가 있었다. 
그는 철없던 그때의 자신을 생각하며 그의 은사 안성룡·백수현 선생의 강한 제지와 이끎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모른다고 얘기를 이어갔다. 시간이 흘러 2학년. 그는 이과를 선택했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다른 과목에 비해 수학은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문뜩 주변을 돌아보니 그는 당연하게도 ‘학교에서 공부를 못하는 애’ 하면 바로 떠오르는 학생으로 인식이 됐다. 자존심이 상했고 문득 창피함이 얼굴을 붉혔다. 하지만 다시 시작하려니 포기했던 1년의 시간을 복구하는 것이 쉽지는 않았다. 그런 그가 생각했던 것은 ‘목표’를 잡아 ‘큰 그림’을 먼저 그려보자는 것이었다. 또래들에 비해 키도 크고 운동도 좋아하니 ‘체육’을 진로로 잡아보자고 말이다. 그는 체육교사가 되고 싶었다고 말했다. 무더운 2학년 여름. 그는 생전 처음 진지하게 펜을 잡았다. 자신의 꿈을 향한 한 판 승부가 시작된 것이다. 

수많은 경험을 쌓아온 심현준씨의 20대를 한 자리에 모아보았다.
수많은 경험을 쌓아온 심현준씨의 20대를 한 자리에 모아보았다.

■ 전교 ‘260명’ 중 ‘250등’…결국 대학 진학에 성공하다

그는 혼자서는 기초적인 지식도 없고 공부가 쉽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자신이 가장 신뢰하던 한 명의 친구와 하루도 빠짐없이 도서관을 다니며 거의 살다시피 했다. 1년이라는 공백을 메운다는 것은 역시나 쉽지 않았다. 일단 아무것도 모르니 무작정 외워버리기로 했다. 그러면서도 모르는 게 있으면 집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무식한 방법이었으나 상승세가 시작됐다. 조금씩 성적도 올랐다. 성적이 오르니 자신감도 솟기 시작했다. 늘 7~8등급의 점수를 받아오던 그가 2~3등급까지 치고 올라왔다. 성적 기준으로 신청을 할 수 있었던 기숙사에도 들어갔다. 

시간이 흘러 모르는 게 있으면 그에게 묻는 친구들이 하나, 둘씩 늘었다. 그는 자신이 모르는 게 있다는 것이 싫었다. 때문에 시간과의 싸움인 국어의 경우에는 모든 ‘시’와 ‘수필’ 등을 통째로 외웠다. 물론 체육대학의 진학을 위해서는 실기도 중요하지만 그에게 당장 중요한 것은 기본적으로 받쳐주는 성적이었다. 그는 국립대학의 체육교육를 가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1학년 내신이 뼈아팠다. 유난히 내신을 중요하게 평가하던 체육교육과였다. 결국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경제적 상황을 고려해 사립대학교에 가는 것도 그에게는 큰 부담이었다. 하지만 수능 성적과 실기에서 고득점을 얻어낸 그는 공주대학교 생활체육지도학과에 진학했다. 그는 말한다. “그게 내 자신의 힘으로 무언가를 쟁취한 순간이었다”고. 그는 그 순간을 돌이키며 “입학을 하면서 단 한순간도 후회를 한 적이 없었다"며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전공으로 살릴 수 있다는 것이 무척이나 행복했고 인생의 첫 ‘성공’이라 표현했다. 

■ 체육교사의 꿈을 뒤로…소방관이라는 ‘새로운 꿈’

처음으로 무언가를 이루어낸 그의 심경에 변화가 찾아오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미래에 대한 고민이 문뜩 떠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체육교육을 전공하지 않은 그가 임용의 기회를 얻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방법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다. 대학원을 졸업하면 기회가 주어지지만 그때까지 기다릴 여유가 없었다. 경제적 상황 역시 발목을 잡았다. 대학에 오니 움직이기만 해도 돈이 들었다. ‘학비’, ‘월세’, ‘교재비’ 만으로도 벅찬 와중에 대학원은 너무도 큰 부담이었다. 무엇보다 지금까지 자신을 희생하며 뒤를 지켜준 부모님에게 미안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군 복무를 해결하는 것도 골치 아픈 문제였고 나름 자신 있다고 생각했던 운동 역시 자신보다 뛰어난 동기들이 훨씬 많았다. 다시금 돌아보니 자신은 굉장히 부족한 편이었다고. 경제적인 여유와 시간적인 여유, 그에게는 모두 부족했다. 그는 생각했다. “내가 체육교사가 되고자 했던 이유가 뭐지?”라고 말이다. 

사실 그가 교사가 되고자 했던 이유는 자신을 잡아주던 수많은 사람들처럼 자신 역시 방황하는 청소년기 학생들의 방향을 잡아주고 싶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자신이 좋아하는 운동과 접목해 다른 이들을 이끌어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는 생각했다. “그렇다면 이와 비슷한 직업이 무엇이 있을까?”라고 말이다. 갑자기 생각난 것이 ‘소방관'이라는 직업이었다. 누군가의 인생에 있어서 내가 그동안 받아왔던 것처럼 나 역시 타인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그리고 누군가의 인생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마지막 보루인 소방관이 되어야겠다고. 

■ 소방의 꿈을 위해 그는 ‘장교’가 됐다

처음에는 ‘공무원’이라는 직업에 대한 이질감을 느꼈다. “이게 정말 나에게 맞는 건가?”, “내가 할 수 있을까?” 수많은 고민들이 있었다. 하지만 몇 번을 다시 생각해도 그는 소방관이 되고 싶었다. 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집요하게 파고들어 알아보는 버릇이 있던 그는 소방관이 될 수 있는 모든 정보를 닥치는 대로 알아봤다. 다시 한번 목표를 잡고 큰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이다. 

소방관은 ‘구조’, ‘구급’, ‘진압’이라는 세 가지 분야가 있다. 그중에서도 그는 ‘구조대원’이 되고 싶었다고 말한다. “First in, Last out(가장 먼저 들어가 가장 마지막으로 나온다)” 이 말이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소방관 전체가 그렇겠지만 그는 그중에서도 가장 최전선에 서고 싶었다고.

그는 소방관이 되기 위한 정보를 수집하던 중 구조대원은 ‘특수부대 3년 이상 복무(현재는 2년)’라는 기준이 눈에 들어왔다. 군 문제를 해결해야 했던 그는 어차피 군 복무를 해결해야 한다면 ‘특전사 장교’가 되자고 마음을 먹었다. 어려서부터 주변 어른들이 “장교는 엘리트야!”라는 말을 수시로 들었던 것도 큰 영향이 있었다며 장교가 되기 위해 공주대학교 ‘학군단(ROTC,학생군사교육단)’에 지원했다. 보통 학군단은 대학생활 중 1학년과 2학년, 두 번의 기회가 있다. 하지만 2학년이던 그에게 기회는 단 한 번뿐이었다. 문제는 오랫동안 접하지 못했던 한국사가 발목을 잡았다. 그는 그간 그래왔던 것처럼 약 4개월을 한국사에만 몰두했다. 기본적인 국어와 수학에는 자신이 있었다. 한 번의 기회. 그 절박한 한 번의 기회를 어떻게든 살려내야 했다. 결국 본인 특유의 집요함으로 장교 후보생이 되었고 자신이 원했던 특전사 장교로서 약 2년4개월 간 복무를 하게 됐다. 

군 복무 중 정책의 변화가 생겼다. 기존 3년의 특수부대 경력이 2년이면 충분했다. 1~2년 복무를 연장하려 했던 그에게는 희소식이었다. 조금씩 흘러가는 시간에 사실은 마음이 급하기도 했다. 하지만 소방관이라는 꿈과 동시에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자랑스럽고 멋진 장교가 되고 싶었다. 특전사 활동을 통해 다양한 장교와 부사관들을 만나며 인생을 배웠고 존경하는 이들을 무수히 많이 만났다. 그런 그들 앞에서 자신의 꿈을 위해 역할을 다하지 않는 것은 도리가 아니었다. 그는 전역 6개월 전까지는 그 어떤 공부와 정보에 신경 쓰지 않고 군 생활에 최선을 다하고자 마음을 다잡았다. ‘천리행군’, ‘해상훈련’, ‘강하훈련’ 등 훈련에도 최선을 다했다. 마지막 훈련인 ‘혹한기’를 기점으로 전역의 시간이 가까워졌다. 

사회로 나아갈 준비를 하던 그는 여전히 군인의 신분이기 때문에 자신에게 온전히 부여된 시간을 효율적으로 쓰기로 했다. 퇴근 후 오후 6시부터 밤 11시까지 공부를 했고, 새벽 3시에 알람을 맞춰 출근하기 전까지 공부하며 하루 8시간을 공부에 전념했다. 비교적 여유가 있는 주말에는 10시간을 온전히 공부에만 몰두했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책 내용들을 습득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 누구도 나보다 많이, 오래 공부하는 사람은 없다는 생각으로 공부 하자”고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약 5개월의 시간 동안 모든 것을 쏟아붓기로 했다. 

■ “소방관을 할 수 있다면 어디서든 준비가 되어있어”

필기를 얼마 앞두고 성적이 상승세를 유지했다. 모의평가를 보면 언제나 상위권의 성적을 유지했다. 그러다 보니 어느 지역을 지원해야 할지 고민이 되기 시작했다. 소방공무원 시험은 자신이 원하는 한 군데의 지역에서만 시험을 볼 수 있기에 신중한 선택이 필요했다. 사실 자신의 집과 가까운 ‘충북’, ‘충남’, ‘대전’에 지원을 하고 싶은 마음이 컸지만 가장 많은 인원을 모집하는 곳은 ‘전남’이었다. 고민이 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고민 속에 함께 소방관을 꿈꾸는 친구에게 고민을 털어놨다. 그러자 친구는 얘기했다.

“현준아 나는 나를 소방관으로 뽑아준다면 제주도라도 가서 시험을 볼 거야”라고. 그는 그 한 마디에 자신을 다시 돌아봤다. “내가 소방관이 되고자 하는 이유에 지역이 중요한가?”, “충북, 충남, 대전 소방관을 나눌 필요가 있나?”라는 생각에 그는 다시 마음을 잡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어디서든 나를 뽑아주고 소방관의 임무를 부여받을 수 있다면 어떤곳이든 상관없다”고 말이다. 그는 가장 많은 인원을 채용하는 전남에 지원을 했다. 결코 그곳이 만만하거나 쉬워 보여서 가 아니다. “어디서든 일을 할 수 있다면”이라는 생각 때문이었고 조금이라도 높은 확률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말했다. 친구의 그 한마디가 자신의 초심을 다시 일깨우는 순간이었다고. 선한 영향력을 끼치고 싶은 목표를 이루는 데에 있어 중요한 것은 지역이 아니었다. 그는 어디서든 준비가 되어있었다.

■ “단 한 번도 나 자신을 의심해 본 적이 없다”

그는 높은 성적을 받아내며 시험에 합격했다. 21살부터 꿈꿔오던 목표를 5년이라는 시간동안 이뤄낸 것이다. 성적이 높아 서울, 부산 정도를 제외하고는 어디든 지원할 수 있었다. 당연히 아쉬움이 있었을지도… 그러나 그는 말한다. “단 한 번의 후회도 없었다”고. 

그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남들보다 시간이 조금 걸리고 부족할 수도 있겠지만 “나 자신을 단 한 번도 의심해본적이 없다”고 말한다. 항상 어려운 순간들이 있었지만 주변에는 가족과 친구를 비롯한 수많은 이들이 자신을 지켜보고 있고 응원을 하고 있기에 결국은 이루어낼 것이라고 말이다. 

“남들이 보기에는 국립대학교 체육학과를 나온 것이 별거 아닐 수도 있고, 장교도 누구나 다 할 수 있는데 이걸 왜 하지? 빨리 전역이나 하지! 혹은 내가 하고 있는 소방관 아니 구조대원이 특별해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이 들어요. 하지만 나에게는 그것이 꿈이었고 억만금을 줘도 바꾸지 않을 직업과 후회 없는 선택들이었다고 말하고 싶어요. 단 한번의 후회도 없어요. 이 순간까지 달려온 나의 인생이 너무나 행복해요”

■ 내 인생의 원동력 당연히 사람…그리고 아버지

그는 “내 인생의 원동력은 당연히사람”이라며 무엇보다 지금까지 자신의 뒤를 지켜준 ‘자랑스러운 아버지’가 있었기에 지금의 자신이 있을 수 있다고 얘기했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 속에서 미친 듯이 아르바이트를 하면서도 그는 단 한 번도 자신이 부끄러웠던 적이 없다고 말한다. 언제나 자신을 지켜보는 아버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수많은 위기 속에서도 그 역경을 뚫고 어떻게든 아들과 딸을 대학에 보내겠다는 그 집념 하나로 1주일 내내 하루도 쉬지 않고 달려오신 아버지의 어깨를 보며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 어떤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볼 것인가를 배웠다”며 “내 학벌이 곧 아버지의 학벌이다”라는 생각으로 지금까지 달려왔고 아버지는 그 누구보다 현명하셨다는 것을 강조했다.

“지금은 그때 많이 힘들었구나라는 생각을 하는데 그 당시에는 하루하루가 재미있었어요. 넉넉지 않으니 아르바이트도 열심히 했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치열하게 20대를 보냈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힘들었던 그때의 내가 없다면 지금의 나는 없을 것 같아요. 사실 나보다 힘들고 어려운 사람이 굉장히 많거든요. 그러한 와중에서도 열심히 살아가는 친구들과 많은 사람들 그리고 아버지를 보며 오늘까지 달려온 것 같아요”

■ 나의 이야기를 읽는 이들에게… 무엇이든 절대 포기하지 않았으면

그 역시 언제나 막연함이 있었다. 부담을 느끼며 두려운 순간들 역시 한 둘이 아니었다. 그는 얘기한다. 누구보다 평범한 인생을 살고 있을지도 모르고 27년밖에 살지 않아 인생에 대한 완전한 해답도 모른다고. 분명 자신보다 훨씬 최선을 다하며 살아가는 이들이 있을지도 모르고 훨씬 오래 산 분들이 계시겠지만 그럼에도 10년 전의 나와 같은 시간을 살아가고 있을지 모를 청소년들에게 그는 특히나 말하고 싶다. “언제나 두려운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절때 포기는 하지 말자고. 성적이 7~8등급이라고 인생이 그 등급에 맞춰지는 것도 아니고 성적이 1~2등급이라고 그 사람이 1등급인 사람이 아니라고. 다만, 자신의 삶을 살며 한순간이라도 무언가를 ‘쟁취’ 해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이다. 포기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면 결국에는 자신만의 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많은 사람들은 가슴 한편에 막연함과 두려움을 담아둔다. 그리고 때론 자신을 수도 없이 의심을 해보기도 한다. “내가 과연 할 수 있을까?”, “나에게도 기회가 있을까?”라고 말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는 사실 굉장히 냉정하다. 매정하게도 그것을 이겨내야 하는 것은 결국 ‘나 자신’이다. 그러니 그 어떤 시기보다 중요한 바로 지금.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단 한 번의 순간이라도 자신이 원하는 순간을 ‘쟁취’해보길. 그 순간이 늦어져도 좋다. 포기하지 않는다면 언제든 기회는 찾아올 것이고 ‘자신’의 뒤에는 언제나 기다리고 응원하는 이들이 있을 테니. 그러니 포기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길. 수많은 위기 속에서도 언제나 앞을 향해 나아가던 그의 모습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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