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5년 9월 죽향초로 전학와 4년간 머문 김현식
'옥천은 내 마음의 고향…아름답고 소중한 이미지 가슴 속에 남아'
'어느 자리에서나 자신의 고향을 시골 옥천이라고 말해'
'시골생활 좋았었고, 평화로왔고 또 외로웠다'

 

1996년 9월 발매된 김현식의 7집 '셀프포트레이트(Self Portrait·자화상)'는 김현식의 Live Voice로 시작한다. 옥천에서 지냈던 추억을 회상하며 첫 운을 뗀다. 그는 옥천을 '파란하늘 아주 깜깜했던 밤, 별이 유난히도 많았던 밤'으로 그려낸다. (사진 갈무리: MBC 김현식 20주기 다큐멘터리 '비처럼 음악처럼')

가수 김현식은 1958년 2월 18일 서울 중구 인현동에서 태어나, 1990년 11월 1일 간경화로 숨을 거뒀다. 김현식은 ‘봄여름가을겨울’, ‘사랑했어요’, ‘비처럼 음악처럼’, ‘내 사랑 내 곁에’ 등 대중음악 역사에 한 획을 긋는 다양한 음악을 선보인다. 32년이라는 어쩌면 짧은 그의 생애를 추적하다 보면, 낯설지 않은 단어와 접하게 된다. 바로 옥천이다. 그는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생전 인터뷰와 기록, 음반 등을 통해 수차례 옥천에 대해 언급할 만큼 애정이 크다. 1965년 9월부터 1968년 9월까지. 그는 옥천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또 우리는 그를 어떻게 기억해야 할까.

"서울 삼청국민학교를 전학을 올때까지 지금 생각하면 참 시골생활이 너무너무 좋았던 것 같다. 파란 하늘 아주 깜깜했던 밤, 별이 유난히도 많았던 밤. 정말 아름답던 추억이다." -김현식 7집(Self Portrait)에 실린 김현식의 육성 중-

1996년 9월 발매된 김현식의 7집 '셀프포트레이트(Self Portrait·자화상)'는 생전 김현식의 목소리가 그대로 담겼다. 육성의 첫 시작은 과거 기억으로부터 시작된다. 서울로 전학 가기 전까지 머물렀던 시골. 그곳에서는 마주한 파란 하늘과 깜깜했던 밤 하늘 수놓아진 별이 그에겐 아름다운 추억이란다. 

그의 음악적 감성의 시작이었을지도 모르는 그 시골생활. 그가 머물렀던 곳은 어딜까. MBC가 2010년 김현식 20주기를 맞아 2부로 편성한 '비처럼 음악처럼' 다큐멘터리와 삼우미디어센터의 뮤직다큐멘터리, 생전 스포츠신문에서 연재한 회고록에서 그 자취를 찾을 수 있다.

김현식의 누나 김혜령씨는 김현식이 가장 의지했던 가족 중 한 명이다. 김혜령씨는 1982년 김현식이 결혼한 후 어머니 류진희씨와 함께 캐나다로 이민을 떠난다. (사진 갈무리: MBC 김현식 20주기 다큐멘터리 '비처럼 음악처럼')  
김현식의 생전에 남긴 흔적을 모아 만든 뮤직 다큐멘터리에서도 옥천에 대한 흔적을 찾을 수 있다. 그가 태어난 곳은 서울 인현동이지만, 지인들은 모두 그를 옥천 출신으로 알았다고 한다. (사진 갈무리: 삼우미디어센터 김현식 뮤직다큐멘터리)
죽향초등학교 구교사 전경. 죽향초등학교는 1936년 축조돼 2003년 등록문화재 57호로 지정됐다.

김현식이 생전 가장 의지했던 누나 김혜령씨는 MBC 취재진과의 인터뷰에서 '(김현식에게) 옥천이라는 게 너의 마음의 고향 같으니 그러면 그런건가 하면서 하는 얘기가 좋았었고 평화로왔고, 외로웠다는 복합적인 얘기를 했다'고 말한다.

삼우미디어센터가 김현식의 생전에 남긴 흔적을 모아 만든 뮤직 다큐멘터리에서도 이같은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가수 한영애는 해당 다큐에서 '(김현식은) 1958년 서울 인현동 출생이지만, 아주 가까운 사람들조차 그가 서울출신이라는 사실을 몰랐을 정도로 그는 어느 자리에서나 자신의 고향을 시골 옥천이라고 말했다'고 회고한다.  

또 김현식은 일간스포츠에서 연재한 회고록을 통해 '아버지 사업 때문에 옥천의 죽향초로 전학을 갔고 이 시절 경험한 학교 뒷산 대나무밭 소리, 옥천 한쪽을 감아 흐르던 맑은 금강, 서울 촌놈이라고 놀리던 옥천 아이들과 강가에서 싸우던 일, 집안에서 운영하던 갈포공장의 높은 굴뚝 등은 어린시절의 아름답고 소중한 이미지로 가슴 속에 담겨있다'고 말한 바 있다.

실제 죽향초 학적에 따르면 김현식은 1957년 생으로 1965년 9월 서울에서 전학을 와 1968년 9월 다시 서울로 전학간 것으로 나온다. 이에 따르면 그는 죽향초 2~5학년까지 재학했다.

김현식의 어머니 류진희씨의 모습. (사진 갈무리: MBC 김현식 20주기 다큐멘터리 '비처럼 음악처럼')

김현식이 옥천에 머무르게 된 데는 옥천 출신 어머니 류진희씨의 영향이 컸던 것으로 전해진다. 류진희씨는 옥천 유지 집안의 딸로(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류진희씨의 아버지는 옥천 만석꾼의 아들로, 영국 옥스퍼드대학교에서 영문학을 공부한 영문학자로 나온다. 하지만 아직까지 외할아버지가 누구인지 정확히 확인되지 않았다.) 2남 1녀를 낳았다. 김현식은 2남 1녀 중 둘째다.

그가 남긴 회고록에 따르면 김현식의 아버지는 옥천에 머물 당시 갈포공장을 운영했다. 하지만 현재 해당 갈포공장이 어디였는지, 정확한 확인은 불가하다. 

다만 여러 구두의 증언들과 그의 기록을 통해 김현식에게 '옥천'은 음악적 영감의 시작과 마음의 고향임을 알 수 있다.

류진희씨는 MBC와의 인터뷰에서 '(김현식은) 국민학교 4학년 때 외갓집에 가서 노래자랑을 했는데 일등을 먹은 애다. 국민학교 4학년이었는데 무대에 올랐다'며 당시를 회상하기도 했다. 

■김현식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가수에게 있어 유년시절 머물던 곳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그리고 우리는 그 의미를 어떻게 재구성해 현대에 남겨야 할까. 가수 김광석(1964~1996)의 경우 대구에서 초등학교 입학 전 잠시 살았다. 대구광역시는 2010년 이를 토대로 그가 태어난 동네인 중구 대봉동에 그를 추모하는 거리를 만든다. 현재 김광석 거리는 대구의 명소가 됐고, 지역의 문화예술인들이 결합해 다양한 프로그램 등을 진행한다.

김광석 뿐 아니라, 김정호·유재하 등 전국적으로 대중음악의 큰 명성을 남긴 가수들에 대한 문화관광사업이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다. 김현식과 옥천과의 연관성이 여러 기록을 통해 남아있는 것처럼 옥천 역시 김현식을 통해 다양한 문화 콘텐츠를 발굴할 수 있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옥천문화원 김승룡 원장은 "가수 김현식이 살았던 인생은 훌륭한 대중적 자산이다"라며 "대구에서 김광석 거리가 만들어진 것처럼 옥천의 문화자원과 어떻게 연결시킬지 계속 발굴해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정지용 시인 등이 구읍 골목을 통해 재조명되는 것처럼 김현식 역시 구읍 골목과 연계한다면 현대 문화 관광 흐름에도 잘 맞을 것으로 보인다"라며 "이를 위해 연구와 발굴이 선행돼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현식 1집 앨범 사진. (사진 갈무리: 지니 뮤직)

▶김현식 1집 다시보기

그가 음악활동을 시작한 1970년대는 음악계의 암흑기였다. 여러 뮤지션의 노래들이 정부의 가사검열로 금지곡으로 지정됐다. 1974년도에는 연예계에 대대적인 대마초 단속 바람이 불기도 했다. 김현식의 1집 제작자 가수 이장희도 이로 인해 입건돼 앨범 제작이 무산되기도 했다. 여러 진통 끝에 1980년 6월 1일 첫 앨범이 발표된다. 하지만 대중화에는 실패한다.  

1. (타이틀) 봄 여름 가을 겨울

2. 어화둥둥 내 사랑

3. 주저하지 말아요

4. 떠나가 버렸네

5. 운명(베토벤, 경음악)

6. 당신의 모습

7. 그대와 나

8. 나는 바람

9. 아베 마리아(슈베르트, 경음악)

10. 아름다운 노래(장미화, 건전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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