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세 윤선채씨 택시에 지갑 놓고 내려 망연자실했지만
개인택시 기사 A씨 도움으로 1시간여 만에 찾아
"남일 불구하고 몸소 나서 도와준 택시기사에 고마운 마음 전하고 싶다"

윤선채(92)씨가 잃어버린 지갑 속에는 12만원의 현금과 주민등록증, 국가유공자증이 들어있었다. 현금은 그렇다치고, 국가유공증은 그의 인생을 표현하는 기록 중 하나라 더 소중하다. 윤정준 소장으로부터 윤선채씨의 지갑과 국가유공자증 사진을 받아 일러스트로 표현했다. 디자인은 문성준 편집기자(msg@okinews.com)가 했다. 

편집자주_공로연수에 들어간 체육시설사업소 윤정준 소장으로부터 지난 9일 훈훈한 제보가 하나 들어왔습니다. 바로 연로하신 아버지의 지갑을 찾아 준 택시기사에 대한 얘기였죠. 가뜩이나 서로를 돕고 살기 어려운 고구마처럼 퍽퍽한 세상살이 아닙니까. 그런 삶 속에서 작지만 남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독자들과 꼭 나누고 싶다는 소망을 전했습니다. 다음 기사는 윤정준 소장의 아버지 윤선채(92)씨의 이야기를 1인칭 시점으로 재구성한 것입니다. 앞으로도 작지만 마음 따뜻해지는 이야기, 함께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옥천신문으로 연락해주세요.

그날은 유독 가슴 통증을 견디지 못해 옥천성모병원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날이 갈수록 내 마음과 같지 않게 약해지는 몸의 신호가 야속하게만 느껴졌다. 병원 진료를 받는 내내 흘러가는 세월에 대한 아쉬움을 느끼기도 했다. 92살이라는 나이, 세월의 무게가 몸에 나타나니 '무력하다'라는 생각이 가시지 않았다.

병원 진료를 마치고 나자 더 기진맥진한 기분이었다. 얼른 내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성모병원에서 문정주공아파트까지 가는 버스가 없어 어쩔 수 없이 택시를 잡아탔다. 쨍쨍 내리쬐는 햇빛에 걸어가기도 뭣해서 선택한 수단이었다. 어떻게 택시를 잡아서 타고, 택시비를 지불했는지 기억도 잘 나지 않는다. 그저 빨리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 때문에 정신이 없었던 것 같다.

그렇게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가. 방금까지도 내 주머니 한켠에 있었던 지갑이 사라지고 없었다. 아찔한 생각이 들었다. 그 안에 들어 있는 12만원 가량의 현금과 주민등록증, 그리고 국가유공자증까지. 현금은 그렇다 치고 지갑만 온전히 찾았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신이 아득해졌지만, 호흡을 가다듬고 아들에게 우선 전화를 걸었다. '애비야. 지갑을 잃어버렸는데 어쩌면 좋냐.' 첫마디를 내뱉었다.

아들과 통화를 하고 나니 조금은 안심이 됐다. 112에 신고부터 하는 게 좋겠다는 말에 신고했다. 하지만 돌아온 말은 '우리가 어떻게 하느냐'였다. 누가 지갑을 주어서 우체통에 넣으면 찾을 수 있지만, 그전에는 어쩔 수 없다는 말이였다. 쉽게 찾을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경찰로부터 이런 얘기를 들으니 더 허탈해졌다. 그래서 반쯤은 포기했던 것 같다.

지갑 하나, 나의 불찰로 잃어버린 건데 괜스레 서글픈 생각이 들었다. 그 안에 있는 유공자증에 대한 아쉬움은 더 컸다. 나는 1945년부터 53개월 동안 강원도 간성과 거진 일대에서 군 생활을 했다. 5사단 공병대대. 연료를 보급하고 물자를 수송하는 역할이었다. 그때만 해도 위급한 전시상황이었다. 포탄이 쉭쉭 날라오기 일쑤였다. 그저 '악착같이 살아야 한다'는 생각만 했던 것 같다.

운이 좋게 몸에 별다른 이상없이 군에서 제대했다. 국가보훈처에서는 6·25참전 유공자라는 이름으로 유공자증을 발급해줬다. 잃어버린 지갑에 들어있는 유공자증은 2008년 9월29일에 발급받은 것이었다. 잃어버린 유공자증이야 다시 발급받으면 되지만서도 그 안에 담긴 내 세월까지 지워지는 느낌이라 아쉬운 마음이 컸다.

1시간 즈음 지났으려나. 아들에게서 연락이 왔다. 지금 택시기사 한 명이 문정주공아파트 앞에 있는 마트로 갈테니 나와 있으라는 말이었다. 깜짝 놀란 마음을 추스르고 얼른 마트 앞으로 나갔다. 고생했다는 얘기를 전하고 싶은데 어떤 것이 좋을까 하다가 아들말대로 음료수 한 박스를 샀다. 이걸로 내 마음을 다 표현하기는 부족했다. 연신 고맙다는 말을 되풀이 했던 것 같다. 그 택시기사는 그저 '아닙니다. 할 일을 했을 뿐이다'라고 웃어보였다. 

나중에 아들에게 전해들으니 손녀와 그 택시기사의 자재가 죽향초등학교에 같이 다녔다고 했다. 이웃으로 만나 이제는 아침 축구도 같이 찬단다. 이웃으로 만난 인연이지만, 남일인데도 불구하고 몸소 나서는 그의 모습에 큰 감동을 받았다. 

가뜩이나 경제가 어려워 밥 벌어 먹고 살기도 꿉꿉한데, 택시업이야 오죽할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직접 나서 내가 탔던 택시를 수소문해서 가져다 준 그에게 다시 한 번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 싶다. 자신이 한 일은 작은 일에 불과하다며 이름을 밝히지 않겠다는 그에게서 나는 오늘 아직도 지역사회의 따뜻함이 살아있다는 것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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