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마웠다고, 고마운 거 알고 있다고”

 

마당 한 쪽에 씨 뿌렸던 열무우가 실처럼 수북하게 올라온다. 일주일 쯤 지나니 제법 먹을 만하게 자랐다. 늙어진 얼굴이지만 모자를 쓰고 더위를 외면한다. 쭈그리고 앉아서 작은 바구니에 수북하게 솎아낸다. 너무 어려서 뿌리째 데친다. 반은 된장국을 끓인다. 다시 물을 끓여야 하는데 .귀찮다. 된장을 풀고 멸치를 덜렁 넣고 끓였더니 모양새가 별루다. 둥둥 떠 있는 멸치가 헤엄을 치고 있는 거 같다. 데쳤던 열무우 반은 고추장으로 간을 하고 참기름을 듬뿍 넣어서 번들번들하게 마사지를 시킨다. 맛나 보인다. 한 접시 예쁘게 담는다. 영감의 밥을 소복하게 푼다. 두 노인네만 살다보니 툭하면 밥이 남아서 찬밥이 된다. 항상 찬밥은 내 몫이 되기에 조금 부족한듯하게 밥을 한다. 밑에 있는 밥을 긁으니 누룽지가 섞여진다. 구수한 된장국에 열무우 무침, 건강식의 밥상이다. 밥맛이 좋다. 얼굴을 마주보며 밥을 먹을 수 있는 남편이 옆에 있다는 것에 감사한다.

몸은 늙었지만 마음은 아직도 청춘이다. 제일 예쁜 옷으로 갈아입고 빨간 립스틱을 바른다. 집을 나서다가 부엌으로 간다. 열무우 무침 한 통을 챙기고는 하얀 비닐봉지에 싼다. 가방에 넣는다. 점심때 한글학교 친구들과 먹고 싶다.

천방지축이었던 나. 공부를 배워야한다면서 삼촌께서 국민 학교에 입학 시켜 주셨다. 별로 재미가 없었다. 공부는 밍밍한 듯 심심한 맛이었다. 달콤한 복숭아 맛도 짭짤한 장아찌 맛도 아니었다. 그 시절에 합당한 이유 중 하나였던 여자가 무슨 공부를 해그 말이 난 좋았다. 학교가 멀다는 이유를 덧붙이며 3학년 까지만 겨우 다녔다. 왜 그때는 학교를 안 가야 하는 이유가 그리도 타당하게 들렸었는지 세월이 흐르면서 후회를 하게 된다. 공부를 시켜 주려 했던 삼촌께 죄송함을 간직한 채, 배울 수 있는 복을 차버린 철이 없었던 나, 누구를 원망할 수도 없다.

큰 애기가 되어 가는 나를 보고 시집을 가란다. 고모부가 중신아비가 된다. 땅도 많고 학교를 많이 다닌 총각이라고 한다. 창피스럽기도 하고 시집을 가면 영원히 아버지를 못 볼 거같았다. 결혼을 안 하면 안 되는 거냐고 묻기도 했다. 어른들의 뜻에 따라 혼인 날짜가 잡힌다. 아버지는 귀 닫고, 눈 감고 들은 말을 옮기지 않는 것이 시집살이라고 하셨다. 어진 아내가 되어야 한다고 당부하셨다.

배움이 있는 신랑이라 혹시 도시 생활을 하지 않을까? 취직을 하지 않을까? 아마도 시골 생활은 안 할 수도 있으리라. 작은 희망을 가져본다. 도시의 아낙을 상상한다. 살아보니 남편은 누군가의 지휘를 받아가며 살아갈 성품은 아니었다. 직장 생활을 잠시 해 본 남편은 부모님의 땅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살 것을 결정한다. 아무런 발언권이 없던 난, 농부의 아내가 되어 밭으로 출근을 하고 논에서 퇴근을 한다. 시골의 일은, 시작은 있지만 끝은 없다. 제법 농토가 있는 집이었기에 시골 부자는 일 부자.’ 라는 말을 실감하며 지루하다고 느껴볼 여유도 없이 시간은 억척스럽게 지나간다.

아이가 태어난다. 어미가 되었다는 것은 보랏빛 하늘이 나를 내려다보는 것 같은 신비로움이었다. 내 집 마당에 무지개가 뜬다. 그때 처음으로 알았다. 무지개 속에서 일곱 가지의 향기가 난다는 것을. 향기는 아이들의 웃음 소리였다. 아이들은 어미가 살아야 하는 이유였다. 내 젊음은 무지개 고개를 넘나들었다. 어떤 날은 버겁게, 어느 날은 가볍게, 그래도 어느 날은 행복인거 같았다.

자식들을 말할 때 아롱이, 다롱이란 표현을 한다. 우리 집에도 공부 잘하는 아롱이, 공부 싫어하는 다롱이가, 골고루 섞여있다. 서울에서 선생도 하고, 포크레인을 업으로 살아가는 자식도 있다. 부모를 남겨둔 채 급하게 떠나간 자식도 있다. 이젠 겁이 난다. 자식들이 나를 두고 홀연히 사라질까봐. 볼 수 없게 될까봐, 무서워진다. 이 나이에 무엇을 바라겠는가, 아롱이 다롱이들이 건강하고 무탈하기만을 바란다. 더 바란다면 영감과, 나 자식들 앞에서 먼 길을 떠나고 싶다.

촌에서는 옆집으로 마실이나 가야만 사람 구경을 한다. 두런두런 말 할 영감이 있으니 난,복 많은 할매다. 귀가 어두워 진 영감은 소리를 지르듯이 말을 해야 한다. 그래도 부부이어서 인지 서로의 느낌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알아듣는다. 늙을수록 사람의 소리가 좋아진다. 그 소리는 내가 살아있는 소리다. 영감이 낮잠이라도 자고 있으면 텔레비전속의 내용 없는 수다라도 틀어 놓는다. 나처럼 늙은이들이 텔레비전을 켜 놓고 잠을 자는 이유는 사람의 목 소리를 듣고 싶어서 아닐까. 덜 외롭고 싶어서 아닐까.

장에 가서 비를 만나던 날, 늙어서 초라해진 남편은 우산을 들고 버스 정거장에 서있다. 아내를 기다린다. 저녁 찬 거리를 사가지고 내리는 아내의 보따리를 받는다. 우산으로 아내의 머리 위를 가린다. 지금까지 그랬듯이 아무 말 없이 걸어간다.

물 좋은 갈치 토막을 후라이팬 위에 얹는다. 노랗게 구워낸다. 마주 앉아서 고마웠다고목소리 없는 젓가락으로 밥 위에 얹어 준다. “고마운 거 알고 있다고.”

이영순 작가
이영순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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