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말을 경고하는 비극이자 우화, [혹성탈출 : 반격의 서막]

혹성탈출: 반격의 서막 / 2014
혹성탈출: 반격의 서막 / 2014

혹성탈출 시리즈는 유인원과 인류의 대립 구도를 통해 끊임없이 인간을 비판해왔다. 예컨대, 프랭클린 J. 샤프너 감독은 오리지널 <혹성탈출>(1968)서 반파된 자유의 여신상에 핵전쟁의 준엄한 경고를 담았고, 팀 버튼 감독은 리메이크 <혹성탈출>(2001)서 링컨의 자리를 빼앗은 유인원 장군을 통해 인간 평등에 대한 고찰을 제시했다. 

<혹성탈출 : 반격의 서막>(2014, 이하 반격의 서막)은 이러한 시리즈의 전통을 성공적으로 계승하는 수작이다. 메가폰을 잡은 맷 리브스 감독은 시저(앤디 서키스)의 붕괴하는 이상에 빗대어 인류에 메시지를 던지는 방법을 택하는데, 이번에는 그 교훈이 핵이나 인종 같은 단일 의제로 귀결되지 않는다. 

<반격의 서막>은 시간상 <혹성탈출 : 진화의 시작>(2011)과 <혹성탈출 : 종의 전쟁>(2017) 사이에 위치하는 작품이다. 이들은 기존 시리즈의 프리퀄 트릴로지로 제작, 혹성탈출 세계관의 시작을 설명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인류가 스스로 몰락하는 과정(즉 유인원이 인간의 자리를 대체하는 과정)을 설명하는 만큼, 그 메시지는 다소 광범위할 수밖에 없다.

시저가 이끄는 유인원 집단은 철저하게 인간을 학습한 결과물이다. 몸짓 단계에 지나지 않지만 엄연히 언어를 사용하고, 촌락을 이루어 살며, 심지어 결혼까지 한다. 흡사 인류 초기 씨족사회를 보는 느낌이랄까. 이러한 두 종의 유사성은 영화 후반부에서 무너지는 시저의 이상에 인간의 모습이 겹쳐 보이게 만든다. 이로 인해 <반격의 서막>은 유인원을 통해 바로 우리, 인간이 어떻게 실패하는가를 비추는 거울이 된다.

영화를 이끌어가는 주된 동력은 시저와 코바(토비 켑벨)의 갈등이다. 시작은 인간에 대한 시저의 태도. 인간의 선한 면을 알고 있기 때문이든, 전쟁이 가져올 피해를 걱정하기 때문이든, 시저는 인간과의 분쟁을 원하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과 유인원이 경계를 나누어 따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유인원과 인간이 함께 발전소를 수리하는 장면에서, 시저의 아들이 인간에게 안기는 장면에서 그 이상은 일면 실현 가능해 보였다. 

코바는 이 모든 것을 무너뜨린다. 유인원과 인간은 공존할 수 없다고 믿는 그에게도 나름의 논리가 있어 보이지만, 곧 권력에 대한 집착만이 그를 지배하고 있다는 것이 드러난다. 코바가 시저에게 총을 쏘고, 시저가 낭떠러지에서 코바의 손을 놓으며 ‘유인원은 유인원을 죽이지 않는다’는 상징이 깨진다. 마침내 유인원과 인간을 구분 짓던 경계가 사라지는 것이다.

권력과 이익을 위해 인간을 공격하고, 동족을 죽이면서 유인원은 또 하나의 인류가 되어간다. 시저가 ‘유인원이 얼마나 인간 같은지’ 깨닫는 것도 바로 이 지점이다. 그렇게 인간을 밀어내고 지구의 주인이 된 유인원은 오리지널 <혹성탈출>이 그리듯 시저의 이상을 실현하는 데 실패하고, 어설픈 지식과 종교를 이용해 인간을 노예로 부리는 존재로 거듭난다.

욕심이나 집착, 복수심과 열등감, 지성과 신념은 지극히 인간적인 요소다. 때로 우리의 이상은 우리 내면으로부터, 우리가 인간이기에 누릴 수 있는 가치에 의해 무너진다. 수백만 년을 진화해왔다고 자부했건만, 공존과 상생은 이렇듯 요원하고 우리는 여전히 어리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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