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정수 (청소년 기자단, 안내면 도율리)

러시아 여행기(6)

내게 먼저 말을 건네 주셨던 노부부

18일 12:57 기차가 Belogorsk역에 30분 간 정차한다. 여느 역들과 같이, 볼로제는 내게 정차 시간을 알려준다. 

바람쐬러 나가자며 말이다. 승헌이 형이 내게 해준말이 생각났다. '역에서 반바지 입고, 덜덜 떨면서 있으면 무조건 한국인이야.' 반바지 입은 사람은 나 밖에 없었다. 사실 어제 일부러 한국에서부터 가져온 'R.O.K.A' 반팔티(등판에는 'Republic Of Korea Army'라고 새겨져 있고, 어깨에는 태극기가 그려져있다.)를 입고 열차를 한 바퀴 돌았다. 

여행 첫 날부터 6박의 일정동안 동행들과 함께하다, 혼자가 되니 너무나 심심했다. 물론 같은 칸에서 친구들을 사귀긴했다. '쓰레기'(이름이 놀랍게도 러시아어 발음으로 쓰레기다. 한국에서의 뜻을 알려주고 싶었지만 참았다.)와 '니키타', 그리고 '볼로제'까지, 하지만 그들과의 대화에는 한계가 있었다. 나는 한국말로 대화를 나누고 싶었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찾아 나선 것이다. 한국인은 없는 듯했다. 

30분 사이에 기지개를 펴고, 스트레칭을 하는데, 어떤 할머니가 나를 쳐다본다. 내가 'Do u have any problem?'(무슨 문제있어요?)이라 말하자 씨익 웃는다. '한국인이죠?' 이럴 수가. 열차를 그렇게 돌아다녀도 찾지 못했는데, 한국인이 있었다니 너무너무 반가웠다. 얼마만에 얼굴을 마주보고 하는 한국 말인가.(사실 16일 아침 이후로 처음이니, 얼마 되지 않았다.) 하고픈 말이 많았지만 물건을 사러 가는 길이신 거 같아서 호차를 묻고, '이따 인사드리러 갈게요.'라고 말했다. '뭐 필요한 거는 없어요?'라고 물어주셨고, 나는 '괜찮다'고 말씀드렸다. 

자리로 돌아와 나는 너무 많이 챙겨와서 버려야 하나 고민 중이었던, 전투식량 비빔밥과 율무차를 챙겨서, 그분의 자리를 찾아 나섰다. 2등석칸을 배회중인 나에게 차장은 러시아어로 뭐라뭐라 했고, 알아듣지 못하는 나는 그냥 자리로 돌아왔다. 너무 아쉬웠다. 오랜만에 한국말 할 생각에 그렇게 신났었는데 말이다. 밥을 먹으며 조금이따 찾으러 다시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번에는 실패하지 않을 거다. 번역기로 '한국인을 찾고 있습니다.'를 러시아어로 번역해서 2등석칸 차장에게 보여줬다. 날 그분에게 데려다 주었다. 노부부가 여행중인것 같았다. 먼저 싸온 음식을 내밀고, 너무너무 반갑다고, 한국인 없는 줄 알았다고, 한국말 너무 하고 싶었다고 그동안 있었던 내 여행과 동행들 모든 이야기들을 막 쏟아냈다.

가만히 들어주셨다.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제대로 된 쌍방향소통을 했다. 

남편분은 홍대에서 교수를 하다 은퇴를 하셨다 했다. 젊은 시절부터 여행을 너무 좋아해서 웬만한 나라들은 다 가봤다고 하신다. 난 충북 옥천에서 온 19살 허정수라고 소개를 했고, 자신들의 큰 손녀와 나이가 비슷하다며 그동안의 여행과 같은 여러 이야기를 계속 나누었다. 

저녁에 나는 횡단열차에서의 마지막 밤을 기리기 위해 식당칸에 갈거라고했다. 교수님께서 자기는 '감기에 걸려 정수가 가져온 율무차로도 충분하니, 당신이 함께 가서 맛있는 밥 한끼 사주고 오라'고 하셨다. 나는 괜찮다고 했지만, 벌써 약속시간까지 정하셨다. 

자리로 돌아와 나는 동행들이 있는 단톡방에 이 사실을 알리고, 낮잠을 잤다. 자다 깨보니 약속시간이 20분이나 지나있었다. '혹시 내가 자는 모습을 보고 그냥 자리로 돌아가셨나?' 싶어서 얼른 자리를 나섰다. 알고보니 기차 이동하는 중에 시간대가 바뀌어서 생긴 헤프닝이었다. 이왕 이렇게 된거 그냥 가자고 하신다. 교수님이 말한다. '아!! 비빔밥 잘 먹었어요. 한국인이라고 매콤한거 먹었다고 좀 괜찮아진거 같네.'

3호차에서 식당칸이 있는 11호차까지 길을 나선다. 영어라고는 찾아 보기 힘든 메뉴판을 해독해 가면서 주문을 한다. '사실 정수가 가고 나서 우리 아저씨랑 정수 이야기를 많이 했어요. 어떻게 19살 짜리가 자기가 먹을 음식을 챙겨서 인사를 하러 오죠? 할머니랑 같이 산다고 했죠? 그래서 그렇게 예의가 바르고 생각이 깊은 건가 싶더라고요. 또 어린 나이에 빨리 자신의 길을 선택해서 대비를 하고, 남는 시간에 혼자 이런 곳까지 여행을 오다니 진짜 대견해요.' 말을 놓지 않으신다. 

우리는 그렇게 식사를 하며 많은 대화를 했다. '결혼을 빨리 할수록 좋다. 

그래야 노후가 편하다.' '젊을 때 여행을 많이 다녀라. 우리 아저씨 봐라 감기 걸려서 저러고 있지 않냐.'등등의 이야기들. 만난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가족들의 이야기까지 하면서 말이다. 50살 가까이, 그러니까 반세기나 나이 차가 났지만, 우리는 대부분 생각이 비슷했고, 많은 여행지와 삶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계산을 하려 하신다. 사실 나는 지갑을 갖고 오지 않았기에 가만히 있었다. '정말 너무너무 좋은 식사였어요.함께한 음식, 대화 모두 좋았어요. 감사합니다.' '아니에요. 오히려 비빔밥도 주고, 이 늙은이랑 친구해줘서 고마워요. 있는지도 몰랐던 식당칸에도 데려와주고, 내가 더 고맙죠.' 기분 좋은 저녁이다. 비빔밥을 더 챙겨드리려 했지만, 한사코 괜찮다고, 정 그러면 하나만 주라고 하신다. '내일 내릴때 만나요. 아, 심심하면 놀러와요!!' 

내가 일정을 바꾸지 않았으면 만나지 못 했을 인연이다. 쓰레기, 니키타, 그리고 볼로제도 마찬가지다. 인연이란 참 신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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