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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내면 오덕리 임영자 어르신(1932~) 구술생애사
안내면 오덕리 임영자 어르신(1932~) 구술생애사
  • 옥천닷컴
  • 승인 2019.08.06 1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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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배 멀미 들어봤나? 인생도 멀미 한 차례씩 해야 해’
“담배 멀미 45년 참 매운 세월이었지”

인생의 반을 담배 건조실에 앉았었어. 오래 앉아 담배 잎을 찌면 멀미가 난 것처럼 어지러워. 그날 저녁은 멀미 때문에 잠도 못 자. 그 시절 장갑이 어디 있어? 맨손으로 담배 잎을 만졌다가 손에 진액이 다 묻어서 끈적거리는데 당체 방법이 있어야지. 사방에 지천인 호박잎을 가져다가 쓱쓱 문질렀는데 아 글쎄 끈끈한 진액이 닦이는 거야. 오돌토돌한 솜털이 진액을 닦아낸 거 같아. 살면서 이렇게 저렇게 방법을 찾다보니 우리 할매들이 배운 건 없어도 다들 똑똑 혀. 부모가 그렇게 몸살 나게 일을 해서인지 아이들은 궂은 일 안 시키고 그 대신 공부를 시켰지. 사실 담배농사가 애들 시골에 붙잡아 두고 가업이라고 물려주기엔 돈벌이가 크게 되는 것도 아냐. 그래서 아이들 농사 안 시키고 공부 시켰는데 아이들 4년제 대학 다 시킨 건 지금 생각해도 잘한 것 같아.

내 이름은 그 흔한 이름 영자여 임영자. 1932년생이니까 88세여. 수풀림자 나주 이 씨고, 고향은 옥천 청성면 구음리인데 스물아홉에 안내면 오덕리로 이사 와서 얼추 60년을 살았지. 한 집에서만 60년을 살았으니 우리 집도 나이가 어느덧 환갑이야. 가는 세월을 어떻게 막아? 어릴 적부터 놀았던 동무들, 옛날에 친했던 친구들은 이미 다 이승을 떠났지. 학교에서 만난 친구 중에 한 명은 딸아이 시어머니야. 사돈이랑 학교 동무가 되었네. 하지만 만날 때마다 친구처럼 터놓고 이야기하고 격의 없이 놀아. 세월 타고 같이 늙어가는 마당에 사돈댁 차릴 게 어디 있어. 새로 만난 친구들이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 친한 사람들 하나 둘 다 떠나고 혼자 남는 것만큼 쓸쓸한 일이 없거든.

동네에서 나보다 나이 많은 사람은 없어. 하지만 기억력은 아직도 쌩쌩해. 동네 제사나 생일은 아직도 내가 다 꿰고 있지. 학교에는 화요일, 금요일에 나가고 나머지는 주로 집에 있어. 오래 살았던 집을 헐고 그 자리에 새로 집을 지었더니 노는 땅이 많아서 들깨도 심고 마실 다니다 보면 하루해가 금방 가. 뒷방 늙은이로 늙지 않아서 천만 다행이야

우리 나이 노인네들은 다 그렇겠지만 담배 농사처럼 맵고 어지러웠던 인생이지. 내 부모님은 맏이로 나를 낳으시고 슬하에 6남매를 두셨는데 내 밑으로 다섯을 모두 잃었어. 홍역 때문이었지. 아버지는 결국 재가하고 3남매를 더 두셨어. 이복형제들이랑은 꽤 살갑게 지냈어.

인연이 꼭 꽃처럼 어여쁘기만 하나 내 뜻이 아니어도 운명처럼 다가오는 귀한 인연이 있는거지.

열일곱에 시집을 가서 스물아홉에 오덕리 이사 갈 때까지 시집살이를 맵게 했지. 말도 못해. 시동생들이랑 우리 애들 같이 키웠지 조카들 뒤치다꺼리하다가 정작 내 아이를 돌보지 못한 일도 허다했어. 아이가 시름시름 앓았는데 변변한 약도 지어 먹이지 못했어. 아이는 결국 생죽음을 맞았지. 지금 생각하면 너무 가슴 아픈 일이야. 아이에게 많이 미안해. 시어머니는 호랑이처럼 무서웠어. 하루는 내 실수로 비누를 두 길 깊이 양잿물에 빠뜨린 적이 있었어. 시어머니가 경을 칠까 겁나서 키보다 높은 물속을 허우적거렸지만 찾을 수는 없었지. 목숨 걸고 비누를 찾았던 거야. 오죽했으면 그랬을까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이 나. 감옥소 같은 세월이었지.

인생의 단맛 쓴맛 매운맛 안에 행복이 있어

오덕리 이사 오고 나서는 사정이 좀 나았지. 밤낮 없이 부지런히 일한 것도 있지만 남편이 손 끝 기술이 좋고 수완도 있어서 돈이 잘 모였어. 남편은 담배 농사도 잘 했지만 제방 쌓기와 돌 깨기를 기막히게 했어. 마을 공사가 있으면 그땐 나름 전문가 대접을 받았지. 한 번 일 나가면 세 사람 품삯을 받았으니 올해 땅을 사면 내후년쯤에 또 땅을 살 수 있었지. 땅이 늘고 재산이 늘어나니 살만했고 살림 불어나는 재미는 이 세상 재미중 으뜸 일거야. 하루하루 힘들었지만 희망이 있어서 살만했어. 6,25사변이 터졌을 때 남편은 스물 둘의 나이로 입대했는데 제대할 때가 스물여덟이었어. 6~7년 정도 군 생활을 해서 그런지 살아생전에 돈이 많이 나왔고 지금도 내 앞으로 연금이 좀 나와. 남편은 죽고 국립 현충원에 묻혔으니 명당자리에서 편히 쉬고 있어.

하지만 좋은 일만 있었던 건 아니야. 지금도 생각하면 눈물 나게 서러운 일은 막내딸 낳을 때야. 426, 날짜도 잊을 수 없어. 당시 논에 놉만 서른 명을 썼지. 살림이 불어 마을에서 방귀 꿰나 끼고 살 때였어. 밥 지어 먹이는 것도 대간한 일이야. 하필 그때 내 몸은 만삭이라 좀 무거워야지. 그날은 좀 이상하다 싶었어. 아침부터 배가 살살 아파 와. 그래도 점심에다 새참까지 먹이고 나서 저녁 새참도 장만해 놓기는 했지. 그런데 화장실에 들락날락하다가 그만 땅바닥에 아이를 낳아버린 거야. 이런 기막힌 일이 어딨겠어. 머리에 흙이랑 모래가 범벅인 핏덩어리를 싸안고 그대로 큰어머니에게로 가서 도움을 청했지. 탯줄도 끊지 않은 채로. 소식을 들은 남편은 처음에는 믿지 못했어. 방금 전까지만 해도 일하고 있었는데 아기를 낳았다고 하니 이상할 밖에. 동서 형님께 면박을 당하고 나서야 터덜터덜 나에게 찾아오더라고. 하지만 놉들은 양해가 되지 않았나 봐. ‘여편네가 저녁 안 주려고 저런다고 한 말이 아직도 서럽고 기가 막혀.

담배 농사가 맵고 어지럽기는 하지만 보상도 큰 것처럼 자식 농사는 괜찮았다고 생각해. 남편이 터를 잘 닦아놓아서 자식들 대학 다 보냈고 한 아이는 삼성전자 반도체 임원도 되고, 한 아이는 안산에서 제법 큰 학원을 운영하고 있어. 뉴질랜드로 건너간 셋째 딸 덕분에 해외여행도 해 봤지. 딸아이도 자식 농사를 잘 지었는지 큰아들은 의사가 됐고 작은 아들은 호주가서 1,0001 경쟁률을 뚫고 좋은 직장에 들어갔어. 뭐 하는 데인지는 시골 할매라 모르지만 대견해. 아이들이 멀리 떨어져 있어서 자주는 못 보고 남들처럼 명절이나 아버지 제사 때 보는 거지. 하지만 전화는 자주 와. 바쁜데 전화는 뭐하러 하냐고 하면 어머니 목소리 듣고 싶어요 하고 그래. 인사치레인줄 알면서도 그 마음이 그 말이 왜 그리 달달 한가 몰라. 그래도 아쉬운 건 남편이 죽은 후로 꿈에서 한 번도 못 만났다는 거야. 먼저 간 양반이 왜 생각 안 나겠어. 누구는 꿈에 안 나타나면 잘 지내고 있는 거라고 하긴 하더라만. 그 말로 그리움을 위안 받고 있어.

요즘 아이들은 학교 다니고 공부하는 게 감투라도 쓴 줄 알지만 내 자식들은 고맙게도 집안일을 잘 거들었어. 학교 다녀오면 가방 놓고 와서 일손 돕고. 학교 다니기가 수월했던 것도 아니었어. 집에서 능월 초등학교까지 10리 길을 걸어서 다녔지. 그때는 우산이 있어 비옷이 있어. 비가 오면 그냥 맞으면서 걸어가는 거지. 도시락은 다른 애들과 진배없었어. 양은 도시락에 무장아찌와 꽁보리밥. 그리고 생일날은 계란 프라이 넣어주는 게 전부지 뭐. 그래도 가난했지만 인정 많았던 때라 그 와중에도 형제들끼리 까르르 웃고 재잘거리며 학교 다녔지

우리가 나이만 먹었지 인생이 이렇다 말할 입장은 아니야. 하지만 평생 지었던 담배 농사 얘기라면 할 말은 있지. 이거 하다 말고, 또 저거 하다가 시들어 버리면 세월도 담배연기처럼 날아가 버리는 거야. 농사든 공부든 무슨 일이든 진득하니 한 가지 붙잡고 오래 하면 단맛 쓴맛 다 볼 수 있어. 인생의 맛이 달기만 할 수는 없어서 쓴맛 매운맛 안에 보람도 있고 행복도 있고 낙도 있는 것 같아. 희로애락을 다 맛보아야 진짜 인생이지, 안 그래?

오승주 작가님
오승주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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