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23일 한국철도공사서 위촉, 제복 입고 상하행선 맞이해
보수도 없고 명예만 있지만, 새벽과 오후 시간 꼬박 지키는 '명예역장'
장로교회 목사 출신, 50여년 목회활동, 귀촌 8년차 지탄역 지킴이로

애환이 서린 변방의 역, 지탄역

 지탄역은 한때 하루 이용객이 500여 명에 달할 정도로 사람 발디딜틈 없이 북적거리던 역이었다. 1965년 12월1일 문을 연 지탄역은 이원면 지탄리, 포동리, 백지리, 원동리는 물론 영동군 심천면 장동리와 구탄리 주민들까지 애용할 정도로 지역 주민들의 사랑을 많이 받은 소중한 역사였다. 역사가 열릴 때 마을 주민들은 한바탕 잔치를 열었더랬다. 당시 10리 떨어진 동이면 지매마을에 사는 천연순(88)씨도 지탄역을 애용했다. 다른 기사에 인용된 그의 말을 들어보자. ‘고사리, 취나물을 뜯어 머리에 이고 10리 새벽길을 걸어 지탄역에서 기차를 타고 대전 중앙시장으로, 옥천장, 이원장으로 팔러 다니던 시절, 그 날맹이 지매까지 돌아오다 보면 한밤중이 되었단다. 우리나라 제일 작은 역이라고 했던가 간이역이 동네 사람들과 같이 나이 들어가고 있었다’ 수필가 지옥임씨는 무임승차를 하다가 검표원을 피해 역전도 대합실도 없는 지탄역에 내렸던 어릴 적 경험을 쓰기도 했다. 

 인근 도시가 생겨나면서 농촌 인구가 줄어들기 시작했고 이용객수가 감소하자, 1972년 7월20일에 간이역으로 강등된다. 불과 역사가 만들어진 지 7년 만이었다. 야속하게도 ‘이촌향도’ 현상은 겉잡을 수 없었다. 42년 동안 이용객은 줄었지만, 중앙시장 가서 농산물을 내다파는 할머니들의 친절한 발이 됐던 간이역 기차는 2007년 6월1일자로 ‘무정차역’이라는 사망선고를 받는다. 1일 이용인원이 10명 미만이고 대도시 시내권에 위치해 시내버스 등을 이용해 거점역으로 이동가능한 간이역 60곳을 무정차한다고 당시 한국철도공사가 공고를 했기 때문이다. 

 주민들에게 청천벽력같은 소리였다. 주민들은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무정차역이 된 지탄역을 살리기 위해 주민서명운동을 벌이는 등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결국 2년 뒤인 2009년 5월 전국 최초로 사실상 폐쇄역이었던 지탄역을 부활시켰다. 주민들의 투쟁과 저항의 산물이 바로 지탄역의 역사이기도 한 셈이다. 

다시 살려보자는 여러 안이 제시되기도 했지만

 하지만, 시간의 흐름에는 장사가 없다. 세월의 파고는 누구도 넘지 못한다. 당시 지탄역을 살리기 위한 여러 아이디어가 나왔다. 그 때 당시 앞장섰던 이홍구 이장은 인근 철도공사 소유의 땅 3천300제곱미터의 땅이 관리없이 방치되는 점을 착안해 철도공사 직원과 가족들을 위한 주말농장을 하자는 제안도 했었고, 작은 음악회를 해보자는 제안, 간이역 홍보관으로 하자는 제안, 해외 간이역과 자매결연을 추진해 보자는 의견도 나왔다. 간이침식시설을 갖춰 국토대장정 경로 때 잠시 머무는 곳으로 하자는 안도, 소규모 콘서트, 전시회, 백일장을 위한 활용방안도 나왔다. 경향신문 윤희일 기자(당시 대전주재)는 전국 간이역을 홍보하는 박물관으로 지탄역을 활용하자는 안과 해외 결연 등의 안을 내어 우수상을 받았고 명예역장으로 몇 년 동안 임명되기도 했다. 하지만, 일본 간이역과 결연을 맺긴 했지만, 그 외 아이디어들은 대부분 묻혀버렸다. ‘소란’이 한참 인 후에 무거운 ‘침전’이 시작됐다. 한참 지탄역은 명예역장마저 공석으로 있었다. 서설이 길었다. 본격적으로 주인공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지탄역을 지키는 명예 ‘철도원’, 이신길씨

 ‘철도원’(1999년)이라는 일본 영화가 있다. 한 때 탄광촌의 호황으로 인해 사람들로 북적거리던 역 호로마이. 평생을 기차와 이 작은 역과 함께 했던 오토마츠 역장. 시간이 흐르면서 타고 내리는 사람이 없어 하루에 두 세 번 쉬어가는 기차를 바라보며 혼자 역을 지켰던 그는 아내와 딸이 저세상으로 갔을 때도 역으로 오가는 기차를 보면서 손을 흔들었다. 지금 지탄역에서 하루 두 번 기차를 마주하며 손을 흔드는 이신길 명예역장을 보면 일본 철도원 영화에 나왔던 오토마츠 역장과 오버랩된다. 그는 어떻게 명예역장이 되었을까. 옥천에 귀촌한 지 10년도 채 안 되었다는, 그리고 지탄리에서 손주를 위해 마굿간을 만들고 말을 키우는, 목회활동에만 50여 년을 넘게 보낸, 목사 출신 이신길씨가 어떻게 철도원 제복을 입고, 하루에 두 번 꼬박 휴일도 없이 명예역장으로 기차를 배웅하며 손님들을 맞이했던 걸까.  

 지난 5월 한국철도공사에서 명예역장으로 위촉장을 받고 이제 3개월 남짓 명예역장 직을 충실히 수행하는 그를 만났다. 그가 명예역장이 된 이후로 지탄역은 확 달라졌다. 기관사들이 그를 보며 반겼고 정차선을 제대로 지키기 시작했고 대합실도 말끔해졌다. 한자가 잘못 쓰인 지탄역이 제이름을 찾았고 깃대봉조차 없었던 무인간이역이 어엿한 깃대봉을 만들어 깃발을 펄럭이게 된 것도 온전히 그 때문이었다. 차로 3분 남짓, 명예 역장 근무 때문에 작은 경차 하나도 부러 구입했다는 그는 철도공사에서 준 제복과 모자를 다림질을 빳빳하게 해 늘 경건하게 입는다. 보수 하나도 없이 정말 말 그대로 명예역장이지만, 그의 책임감은 그에 비할 바가 아니다. 한 시간 전에 출근해 기차를 맞이할 준비를 한다. 그런 마음가짐이 지탄역을 하나둘 바꿔나가고 있다. 

그를 만났다 

 뙤약볕보다 맑고 빛나는 미소였다. 흰 벽의 집과 갈색 말 한 마리를 배경으로 그는 해맑게 웃으며 걸어왔다. 10대 소년 못지않은 미소를 가진 그는 올해 80세가 된 이신길 지탄역 명예역장이다. 함경북도 나진에서 태어난 그는 6살 때 월남했다. 어머니의 고향인 전라북도 김제에서 부용초등학교를 나왔다. 아버지는 북에 올라갔다가 38선이 생겨 내려오지 못했다고 한다. 그는 익산의 이리 남성중·고등학교를 나왔으며 어린 나이에도 혼자 호남선을 타고 통학했다. 다행히 10분가량의 거리라고 한다. 어릴 때부터 기차와 친숙할 수밖에 없었다. 

 졸업 후엔 증조할머니부터 이어진 장로교 신앙에 따라 목사가 됐다. 서울신학교, 숭실대 철학과 출신이라 한다. 대전제일교회에서는 25년 동안 목회활동을 했다고 말했다. 은퇴는 10년 전 70세에 했고, 지탄에 온 지는 8년이 됐다. 지금도 옥천읍 서대리에 있는 주사랑교회에 다니면서 지역 사람들과 친분을 맺으며 지역에 뿌리내리고 있다. 

 “왜 옥천에 왔느냐, 하면 우리 딸 하나, 아들 하나가 있어요. 우리 딸 사위가 옥천 은행리 군서예요. 옥천고등학교를 나왔고 이름은 김충선이에요. 근데 충선이 형이 있는데, 어렸을 때 경운기에 치여가지고. (사위의 형인) 용선이가 고등학교 다닐 때 증세가 나타났는데 옥천 어디에 있었어. 그런데 마흔 몇 살 되니까 관리를 제대로 못해서 이가 다 빠졌어요. 그냥 바라볼 수 없잖아. 사위가 직장을 다녀서 내가 갔는데, 나를 아빠, 아빠, 하고 부르는 거야. 그래서 내가 데리고 살게 됐어요. 그런데, 은행리에서 함께 여생을 보내려고 했는데 집이 안 나는 거야. 여기저기 팔도강산 다 알아봤는데 집사람이 싫대. 근데 여기(지탄)는 괜찮대.”

 

어떻게 명예역장이 되었을까

 지난 5월 23일 위촉식을 통해 그는 제2대 지탄역 명예역장이 됐다. 제 1대 명예역장은 경향신문 윤희일 기자였다. 윤희일 명예역장이 그만둔 이후 오랫동안 역장이 없었다가 코레일 직원 두 명이 그를 찾아갔다. 그는 처음에 제안을 사양하다 결국 받아들였다. 직원이 말하길, 코레일 대전충남본부장이 승낙을 받아오라고 했단다. 

 “5월 23일날 지탄역으로 나오래요 나더러. 위촉식 한다고. 대전역장, 영동역장, 본부장, 차장, 직원… 뭐 엄청 많이 왔어. 겉보기에 깃발도 하나 없고 처음엔 우스워보였지. 간단할 줄 알았는데 묵념하고 꽃다발, 인사도 다했어. 전날에 인사말을 뭐할까 했는데, 우리 할아버지가 일제시대 때 공구노릇을 했어요. 철도 놓는 곡괭이질. 그걸 평생을 했거든요. 그래서 우리 아버지 어머니가 관사에 사셨어요. 그래서 그 얘기를 했죠. 예수를 믿은 지 4대째라 우리 할아버지는 지금 천국에 계시는데, 자기가 평생 못한 역장을 큰아들의 큰손자 장손이 했다고 하니 얼마나 기쁘겠냐, 하고. 그러니까 사람들이 막 박수를 쳐.”

 처음엔 명예역장이 어떤 일을 하는지 모르고 시작했다고 한다. 그저 시켜준 것이 고마워서 하게 됐다. 이제는 역에 출근하는 것이 익숙한 듯 안내해보였다. 승객의 의견에 따라 여자화장실의 여닫이 방향을 바꿨다고 했다. 그는 지탄역 표지판 중 색상이 미묘하게 다른 부분을 가리키기도 했다. 지탄의 池(못 지)자가 地(땅 지)로 잘못 표기돼있었는데 그것도 바꿨다고 했다. 지탄역의 원래 이름까지 찾아준 것이다.

 출근은 하루 두 번, 상하행선을 그가 맞이한다

 출근은 하루 두 번이다. 지탄역에는 무궁화호 상행선과 하행선이 딱 한번씩만 거치기 때문이다. 상행선은 오전 7시 21분, 하행선은 오후 1시 12분에 도착한다. 첫 기차를 맞이하기 위해 그는 오전 6시 30분쯤 역에 출근한다. 승객은 매일 한, 두 명 정도가 있다고 한다.

 그는 기관사가 반갑다고 불을 반짝이고 손을 흔들 때면 엔도르핀이 돈다며 웃었다. 재밌는 일도 있었다. 승객이 기니 출신 외국인이라 말이 통하지 않았고, 손자를 통해 겨우 목적지까지 안내한 일이었다. 손자는 캄보디아 국제학교 출신으로 외국어에 능숙하다고 한다. 이 일을 기념으로 함께 사진을 찍기도 했다. 가끔 그 일이 생각난다고 한다. 승객은 많지 않지만 그는 명예역장의 일이 무척 만족스럽다. 오늘도 그는 승객을 맞기 위해 새벽부터 집을 나선다. 

 “반갑다고 손 두 개 다 흔들면 안돼, 그건 정차하라는 거예요. 반가울 땐 손 하나를 흔들어야지.” 그는 철도원의 일상을 페이스북과 유튜브에 심심찮게 올린다. 늘그막 맞이한 새로운 직업에 대한 사명감과 책임감이 그의 삶을 어느새 지탱하는 듯 보였다. 그가 누구보다 밝게 웃었다. 기적소리가 들리면 그는 손을 흔든다. 오늘도 내일도 지탄역에서 오르고 내리는 삶들은 도시에서 주목받지 못하는 삶일 수 있지만, 그에게만큼 너무나도 소중한 삶이었고 정겹게 환영인사를 하면서 응원하고 있었다. 바람 부는 날에는 지탄역에 가자. 

이신길씨가 애지중지하는 아론이와 필립이

아론이는 정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금쪽같은 손자이다. 아론이는 기타를 잘치는 고등학생으로 옥천신문에도 여러번 나왔다. 11살 때 고모가 사준 기타를 인생 기타로 만든 아론이는 피아노와 첼로 못 다루는 악기가 없을 정도로 음악에 다재다능하다. 청소년수련관 틴에이저 페스티발에도 오르고 자주 버스킹도 한다. 그 때 인터뷰에서는 아론이가 승마를 제법 한다는 것은 언급이 안 된 것 같다. 아론이 아버지인 이신길씨 아들이 캄보디아 선교활동을 할 당시 아론이도 캄보디아 생활을 꽤 했다. 한국으로 귀국하고 잘 적응하지 못하고 울적해 있을 때 할아버지는 아론이를 위해 큰 선물을 하기로 결심한다. 아론이가 캄보디아에서 말을 타며 즐거워 한 것을 떠올리며 말을 하나 구입하기로 마음 먹은 것. 전국에 말을 사려고 수배령을 내렸고 다행히 화성시에서 비교적 저렴하게 말을 구입할 수 있었다. 알고보니 저렴하게 판 이유가 있었다. 경주마였다. 쉬이 산책시킬 수 있는 말이 아니라 득달같이 뛰어다니는 경주마였던 것. 그래도 손주 아론이의 손을 타면서 아론이 말은 귀신같이 알아듣는다. 필립이라고 이름을 지어줬다. 마굿간을 만들고 건초더미를 구입했다. 아론이는 할아버지 덕분에 말을 탄다. 지탄리를 산책할 때마다 말을 탄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현재는 한남대 글로벌비즈니스학과에 진학했다. 방학동안 아르바이트를 한다고 할아버지 차를 가져다니길래 별도로 차를 마련할 정도로 손주에 대한 애정이 크다. "저는 마굿간에서 쉬엄쉬엄 타고요. 아론이는 필립이와 함께 지탄리를 산책하기도 해요. 제법 잘 달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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