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뜰*옥천신문사*안내행복한학교 구술생애사 프로젝트]
나 그 시절에 연애결혼 했다우, 사랑 얘기 한 번 들어 볼텨?

남편은 진짜 사나이였지, 까마득한 그 시절에 연애를 하고 결혼을 했응께. 나헌티 첫날밤에 고백을 하는 게 아녀, 만약 자기한테 시집 안 왔으면 냅따 보쌈이라도 해오려고 했었댜. 내가 시집와서 엄청 좋았나봐 하기사 나도 마냥 좋았지. 호호호 그 시절에는 얼굴도 못보고 시집가는 게 허다 했는디 나는 남편만나 연애도 해봤으니 운 좋은 여자가 아니겄어. 선보고 결혼 전에 남편이 내가 보고 싶어서 우리집에를 왔었는디 나도 얼매나 반가운가 모르것데. 가슴은 콩닥콩닥 뛰는데 어른들한테 들킬까 갠신히 참았지. 남편이 손에서 뭔가 만지작 거리더니 자 이거혀어머나 양산인디. 어찌나 이쁜지 말도 못햐. 선물 이란 걸 받아본 적이 있어야지 부끄럽고 마냥 좋았지 뭐여. 양산을 폈는디 꽃그림은 또 얼매나 예쁜가 너무 행복했제 시골에서 그런 알콜달콩 연애하고 시집간 할매들 없을거여

그렇게 열렬하게 사랑하고 결혼한 할아버지하고 지금도 다정하냐구?

아이고 무신 말씀, 남편이 간지 오래됐어. 벌써 21년이 되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자꾸 생각이 나. 결혼해서 자녀를 여섯이나 낳았지. 딸 서이 아들 서이 엄청 착하고 다들 잘 되었어. 큰 딸은 순애. 둘째가 재경이. 재훈이. 순희. 재희 그리고 막내로 재규까지 얻었지.

암만 두 말하면 잔소리지 어린 시절 고향 마을 눈에 선햐

고향은 청마리 주원인디 옛날에는 탑산이라구도 했지. 지금은 수몰지역이라 아무것도 없어. 고향이 없어졌지. 지금도 생각이 나. 친구들과 냇가에서 멱 감고 집집마다 과일 나무들이 영글어서 손만 뻗치면 하나씩 따먹는 재미가 쏠쏠했어. 참 살기 좋은 마을이었는디. 에구 눈에 선햐. 가 볼 수 없어서 더 그리운가벼

우리 형제들 이야기 나열하려면 마음이 찐하네

뭐 특별한게 있남. 다 사는게 폭폭했지 뭐. 나는 3남매여. 내 이름은 용순이구 김용순, 여동생 이름은 그때는 왜 그렇게 지었나 몰라 복덕이, 복 많이 받으라구 복덕이라구 짓구. 그리구 남동생은 판세라구졌어. 나라 일을 하라구 그렇게 지었다지. 판사라도 되길 바라셨나봐 달리 판세겠어. 근디 그 시절에 형제가 우리 싯 밖에 없었어. 넘의 집 일곱 여덟일때 우린 싯밖에 없었지. 들어봐 사연이 있어. 글씨 친 엄니가 뭔 곡절이 있었나 이혼을 하고 핏덩이인 어린 나를 떼놓고 나간겨. 핏덩이를 두고 나갔으면 말못할 사연이 있었것지 워째 원망하면 뭐할겨. 그라고 할먼네 집이서 컸는디 알고 보니까 엄니가 아니라 서모인거여. 내가 핏덩이일땐 할머니 손에서 크다가 다시 서모 손으로 그러니 내가 대접을 제대로 받았겄어? 근디 글씨 우리 친 엄니가 집 나갈 때 여동생을 임신했던 거여 네 다섯 살 쯤 되어 동생을 데려오니 나 하나도 힘든디 여동생까정 새 엄니도 기가 막혔을거여 난 근근하게 컸어. 설움도 많이 받았구. 누구헌티 하소연하겄어. 근데 참 기구한 것은 둘째 서모가 애 낳다가 그만 세상을 떠났네 서모도 참 불쌍하데. 그러니 어째, 싯째 어머이를 또 얻었는디 애 못 낳아서 쫓겨난 사람이라지 뭐여. 그러니 아들을 기대나 했겄어? 그런데 어쩐 일인지 막내 남동생 판세가 태어나서 난리가 났지. 떡두꺼비 같은 아들을 떡 하니 낳았으니 집안에서 떠 받들은겨 아들 낳아야 대접 받는 때 아니었남. 그 뒤로 싯째 어머이는 동네에서도 집안에서도 떠받들며 대접을 받구 살았지. 그리고 나랑 동상이랑은 어느 정도 컸응께 기억이 다 나지. 싯째 어머이가 우리한티도 잘 혔어. 사람이 좋았지. 그런디 그때는 먹고살기 힘드니 아버지는 어정세월 보내면서 주막이나 다니고 애 좀 태우셨지.

그런디 싯째 어머이가 아주 보통이 아니더라구. 애를 낳고 보니 사는게 이만저만 어려운게 아니니께 화장품장사도 하구 포목장사를 해서 살림이 점점 좋아지대. 아부지도 아들도 보고 야무진 여자가 들어와서 살림도 잘허니 정신을 차려서 그때부터 뭐라도 하더라구. 그때 피혁장사도 했나벼. 그때 기억으로 서울도 왔다갔다 하고 그랬어. 그니께. 집안은 여자 하기 나름이여. 그렇게 차차 집도 사구 먹고 살만한 때가 되었지. 나 그때가 열대여섯 살이나 되었나 판세는 내가 키우다시피 했어. 하루 종일 내가 봤지. 어휴, 힘든 걸 말로 어찌 혀, 똥기저귀 갈고 그래도 그때는 힘들다 소리도 할 줄도 몰랐어. 이집이나 저집이나 다들 누나들이 동생 들쳐업고 다니는건 예사였으니께.

그러니 동생 챙기랴 집안일 돌보랴 핵교 문앞에도 못갔어. 판세는 아들이라구 대학까지 보내 이름처럼 나라일을 하니 월매나 고마운지 몰라. 근디 나는 한창 어려울 때 남의집살이를 가게됐어. 다들 어려울 때라 입하나 던다고 부잣집에 딸들 보내서 먹고 입는거 해결하게 했었지. 누가 얘기 했는지 싯째 어무이는 나를 남의 집살이 보내는거 싫어하셨다데 남들이 혹시나 전처 딸이라고 일부러 보내는거 아니냐 할까봐 걱정했내벼 새엄마는 나 보내라고 안했어. 그 맴이 고맙지 뭐여. 아부지가 보낸겨. 나이 많은 할머니 할아버지가 사는 부잣집인디 옷도 사주고 먹는 것도 잘 먹었지. 어릴 땐 그렇게 고생 많이 했지만 남편 만나면서 내 인생이 피기 시작했어

남편은 좋은 사람이었지

작은 어머니가 대전 삼천동에서 사는 이우지 총각이 효자구 심덕도 좋다고 아부지한테 메리야스 공장에 다니는 남편을 중매해서 선을 보게 된거지. 그때는 싫은 줄도 모르고 좋은 줄도 아무것도 몰랐지. 그런디 나도 모르게 나 혼잣말로 투정을 하고 있더라구 나는 시집가기 싫었어 스무살이면 나하고 똑같은 어린앤디 어떡게 믿고 사냐구 싫다고 했지 그땐 당돌했어 그런디 이게 웬일이래. 시집 고모랑 총각자리가 집에 왔는디 힐끗 훔쳐봤더니 등치도 좋고 얼매나 멋졌는지. 싫다는 맴이 싹 사라지대. 그때 맘이 쏙 들었는가벼. 첫눈에 반한거여. 그렇게 맛선을 보는디 얼마나 쑥스러운지 서로 말도 못하고 고개만 숙이고 있었더니만 어째 그러고 있냐고 시고모님이 들어오셔서 뭐라시며 말을 하라고 하시더라구, 그래서 고개만 끄떡거리고 말았지. 열아홉 동짓달에 선보고 그 다음에 10월에 결혼을 하게 됐지.

그 사이에 신랑감이 우리 동네에 나를 보러 온거여. 나두 좋아 죽겄대. 동네사는 친구들이 더 난리가 난거여 신랑감 왔다구 얼른 가서 추억을 만들라고 부추겨서 우리 동네서 탑공이라고 유명한 데가 있어, 거기 백사장도 있는디로 놀러간다고 가는디, 신랑자리가 자꾸 손을 잡을라는거여 아이구 음흉스럽데. 그래서 냅다 도망왔지. 어찌나 부끄럽고 쑥스러운지 그 땐 손만 잡아도 애 들어서는 줄 알던 그런때 였잖아 그렇게 그날 저녁 우리 집에서 방을 하나 정해줘서 자는디 내가 들어올 줄 알았다나 뭐라나. 그런디 내가 안 들어와 부아가 났다는구먼 그러니 그 담날 같은 공장에 다니는 친구와 술을 먹고 술주정을 하니 내가 얼매나 놀랐겄어? 그래서 내가 그랬지 어머 깡패인가벼 나 시집안가 했더니 그 소리를 작은 어머니가 듣고 시아부지자리한테 해서 신랑이 흠씬 두들겨 맞았다는거여. 그러니 얼마나 부아가 났겄어 가서 나를 그냥 안 둔다는 소문이 들리는 거여. 은근히 겁이 났지 젊은 놈이 술 먹으면 주정도 나오니 네가 이해혀라 아부지가 나를 슬슬 달래는거여. 작은 어머이가 중신할때는 믿을만한 사람이지 않겠니? 하고 나한티 자꾸 야기를 하시니 나도 그러마 했지. 그 길로 미뤄놨던 사주단자 받고 결혼을 하게 된거지.

시엄니랑 같이 애 키우면서 시집살이 했지

시집갔더니 아 글씨 시엄니가 한 달된 애기를 업고 계시데. 시엄니랑 같이 애를 낳고, 시동상들이랑 우리 애들이랑 같이 컸지 뭐여. 시동상들이 여섯, 우리 아이들이 여섯.. 말도마 방에 애들이 꽉 들어찬게 고아원이 따로 없었당께 그많은 애들 기저귀도 내가 다 빨고 시아부지 이장 보는 일까지 내가 다 수발했구, 명주 바지저고리까지 내가 다 꼬맸땅께. 힘은 들어도 며느리 솜씨 좋다는 소리에 그날 그날 위로받았지 뭐여. 시엄니랑 동세지간이냐는 소리 곧잘 들었어. 시엄니가 갓 마흔이었으니께 그럴만두 하지.

시아버님이 선비라 아무 일도 안해, 그러니 우리집이가 시동상 월사금이니 뭐니 다 우리가 키우다시피했지. 남편이 얼마나 효잔지 부모한테 월급 받은 걸 봉투째 고대로 디밀어 글씨, 그러니 내가 남편한테 쑥맥이라고 구박을 줬지. 잔소리해도 계속 그랴. 그러니 돈이구 뭐구 시엄니 주머니에서 나오니 나는 돈은 구경두 못했지. 당연하지. 고생이 엄청났지. 그래도 내가 복덩이여. 내가 결혼할때 쯤 소를 맥였는디 소가 새끼도 쑥쑥 낳고, 또 땅을 사서 농사를 지었는디 농사가 얼매나 잘 됐는지 해마다 풍년이었지. 그래 그렇게 어느 정도 부자루 살았는디 이노무 시동상들이 이리저리 문제를 터트리니 있는 논이니 뭐니 다 팔아서 빼앗아 가고 애 많이 썼어. 어느 집이나 매한가지여 다들 누구는 잘 되고 누구는 말아먹기도 하고 말이여 그땐 참 재미도 없구 힘들었어. 근디 대전 삼천동 개발되기 3년 전에 삼천동 땅을 다 팔고 지금의 옥천 동대리로 이사를 오게 되었지. 조금만 참으라고 이우지서 그렇게 야기해도 시아부지가 그걸 못 참고 이사를 온 거여. 다 지난 일이지만 아쉽지. 조금만 참았으면 떼 부자 됐을껴 생각할수록 워찌나 아까운지... 그러니 옥천 동대리에 들어올 때 대전 부자가 들어온다고 소문이 났는디 지금은 다 팔아서 없어. 동대리는 지금도 50호 되는 동네라 엄청 커. 그동안 사느라고 엄칭이 애썼어. 그랴두 애들이 착하고 잘 풀려서 다행이여. 큰 딸이 벌써 환갑이 넘었어. 동무처럼 같이 늙어가네. 아들네들이 삼촌네들과 같이 크면서 잘 커서 감사혀. 지금 생각해도 꿈만 같은 세월을 보냈구만, 남은 세월 감사하며 자손들 보면서 살고 있어. 돌아보니 그래도 나는 행복한 할매여. 학교에서 공부도 하고 이 정도면 호강이여 그 시절 여자들 인생이 파란만장 하긴 매 마찬가지인데 그래도 그 시절을 다보내고 지금 핵교 댕기면서 시절좋은 날들이여. 내 살아온 야그 들어주니 옛적 영감이랑 연애하던 시절도 생각나고 좋네 그랴. 80년이 눈 깜짝할새여 그래도 이만치 건강하고 밥걱정 없으니께 얼매나 감사혀. 오래 살다보니 이런 호 시절이 오네 좋구먼 좋아.

박승자 작가
박승자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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