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순표(옥천향토전시관명예관장)

근대 여명기인 1899(광무 3) 대한제국시대에 옥천에서 일찍이 금광이 발견되면서 일확천금과 떼 부자의 꿈과 일거리를 찾아 수천 명의 광꾼들이 옥천 동북부지역으로 몰려들었다.

120년 전인 1899년과 1900, 19013년 동안 옥천에서 골드러쉬(gold rush)가 일어나면서, 대한제국 때 옥천과 청산군은 금광에서 금 쏟아져 옥천은 황금광 시대를 맞이한다. 대한제국은 처음으로 1896년에 미국인 모스에 의해 옥천보다 3년 빨리 동양 최대의 금광인 평북 운산 광산이 개발하면서 전국에 금광개발 열풍이 일어났다.

1899년 옥천 금광 발견, 광부 수천명 몰려와

1899616황성신문옥천군에서 금광이 개광되니, 광부들이 기천명이 몰려 와 역말의 공유지와 사유지는 물론 금 굴을 파느라 갱구에 난입하지만, 민정이 편안하여 큰 소동에도 군청은 금 채굴을 금지하지 않았다고 보도했다. 또 이 신문은 19009월과 19014, 19076월 기사에서 광산 법을 어기고 세금을 매기는 파원이 광꾼을 인솔하여 마구 금을 캐서 또 엄하게 꾸짖고 갱구를 막았다고 썼다.

바야흐로 황금을 캐는 덕장이 옥천 곳곳에 설치되며 덕대와 광꾼들이 모여 들었다. 그 당시 통계를 보면 1899년에 충청도 옥천, 음성, 천안, 황간, 영동, 아산과 경기도 가평과 경상도 밀양, 황해도 곡산, 평안도 운산의 금광이 개발되었다. 다음해인 1900년과 1901년에 전국 28개 금광 개발지 중, 전국 40%12개소가 옥천과 영동 등 충청도에서 금광이 제일 많이 개발되었음을 알 수 있다.

금광 광산주 이종수 선덕불망비 [안내면 오덕리 안덕이 마을]
금광 광산주 이종수 선덕불망비 [안내면 오덕리 안덕이 마을]

안내 오덕천서 사금, 금적산 황금 캐

대한제국시대 안내면 오덕리와 청성면 능월리 오덕천에서 사금이 발견되면서, 금을 캐는 광꾼이 몰려오면서 새로운 마을이 형성되며 청성면 신기리가 생겨났다. 이 때문 신기리와 접한 보은 삼승면 원남장은 금광업자와 덕대, 광꾼들로 장터의 시장은 곡물과 생활용품은 물론 주막과 기생집, 유곽 등이 문전성시를 이루게 된다.

이후 옥천 안내면 오덕리 안덕이, 금적산 남부 마전리층 금광에서 톤당 20.54g의 순도 높은 황금이 나와서 금 노다지타령이 절로 났고 이후 청성면 도장리 신그령과 거포리, 장수리 점동 등지에서 황금이 산출되었다. 일제강점기에 옥천 사금 생산지는 금강 상류인 청성 합금, 옥천 오대, 안남 지수리 금강과 안내청성면 오덕천에서 채광되었다. 한편 오덕리 팽정 마을 앞 오덕천 에서 사금이 1970년대 초까지 채굴했다.

흑연 생산, 금광유적 광산주 선덕비

매일신보 1916521일자 기사는 작년 말까지 충북에서 금, 사금, 흑연(黑鉛)광 등 총130개소 중 38개소가 금을 생산하는 광구이고 사금은 청주 56천여 원, 옥천 7천원으로 총64천여원이며 흑연은 보은·옥천에서 약 1천 톤에 7천여원 등을 총4726백 원을 올렸다고 보도했다.

옥천군내 금광 관련 역사유적으로 안내면 오덕리 안덕이 마을회관 앞에 광산주 이종규(李鍾奎) 선덕불망비가 있다. 또 청성면 도장리 옛 능월초등학교 앞 논둑에도 1910년부터 이곳에서 금광을 운영했던 개성 사람 광산주 하기봉(河基奉) 선덕기념비가 있다. 당시 청성 도장리 신그령에서 황금이 나오자, 덕대들이 광주에게 임대료를 주고 덕대들이 황금을 캐니, 광꾼들이 몰려와 황금을 캐며 부자 꿈을 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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