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뜰*옥천신문사*안내행복한학교 구술생애사 프로젝트]
금적산의 여름처럼 푸르른 인생으로 갈무리를!

내 인생 끝자락에 이런 즐거움이 있을 줄이야!

새벽에 일어나 건조장 자리의 텃밭 풀을 뽑아주고 서둘러 단장을 한다. 딸들이 사다준 새 옷을 입으니 나비가 되어 꽃 따라 훨훨 어디든 날아갈 것 같다. 뽀얗게 분칠을 하고 입술에 립스틱을 바르니 10년은 젊어 보인다.

<행복한 학교> 가는 날, 셔틀버스가 미끄러지듯 마을로 들어서면 반겨주는 친구들 손짓에 인사하며 버스에 올라 잠시 갈래머리 소녀가 된다. 잠깐 사이 복지회관에 도착하고 2층 교실에 들어서면 선생님이 먼저 오셔서 반겨준다. 반듯반듯 정성 다 해 써가지고 간 숙제를 보여드릴 때 가슴은 한없는 설렘으로 콩닥거리고 <참 잘하셨습니다!> 써 주시는 선생님 칭찬에 입꼬리가 절로 올라간다. 어려운 받침 문장을 배우고, 더하기, 빼기를 배워도 나는 언제나 100점이다. 선생님은 놀라시며 나더러 천재라며 칭찬하시지만 나의 진면목을 아시면 더 놀라실 것이다. 나는 이미 곱하기도 할 줄 알고 구구단도 다 욀 수 있다.

나는 안내면 정방리가 고향이다. 지금 살고 있는 오덕마을에서 10리 정도만 걸어가면 내 친정마을 정방리가 있다. 100년 넘은 느티나무가 마을을 지키고 그 아래 정자가 오가는 사람들의 쉼터가 되는 곳. 정방리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는데 그 큰 부락에서 딸을 초등학교에 보낸 집은 우리 집이랑 또 한 집밖에 없었다. 아직 왜정 때 안내국민학교에 들어가 1학년을 다녔는데 해방이 되었다. 일본말을 배우던 학교에서는 해방과 함께 우리말을 맘대로 할 수 있었고 한글이 국문이 되어 다시 1학년부터 시작하게 되었다.

야무져서 배우는 것마다 잘하니 선생님의 신용을 받아 학교에서 배급되는 운동화나 고무신을 제일 먼저 받을 수 있었다. 빨간 운동화를 받고 집에 와 방 안에서 신어보고 또 만져보며 좋아하던 기억이 지금도 눈앞에 선하다. 단발머리를 나폴거리며 까만 치마에 하얀 카라가 달린 교복을 입고 학교를 다닐 때 동네 친구들이 얼마나 부러워했는지. 비록 졸업을 못하고 5학년에서 그쳤지만 나에게 학교 문턱을 넘어 보게 기회를 주신 아버지께 감사드린다.

5학년 학예회 때 나는 입고 갈 한복이 없었다. 무용도 잘 하고 노래도 잘하는 내가 학예회에 참석을 못한다고 하니까 친구들이 태복순아, 태복순아, 걱정하지마. 뭐든지 잘하는 네가 학예회에 빠지면 어떡하니? 우리가 다 마련해줄게.”

그러면서 곱디고운 한복을 친구들이 빌려와 내가 입고 노래며 무용을 할 수 있게 해주었다. 전교생이 보는 앞에서 꾀꼬리같은 목소리로 합창을 하고 장단에 맞춰 무용을 해서 박수갈채를 받았던 때를 생각하면 까마득한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가고 싶어진다. 큰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조카들을 공부 시켜야 했기에 딸인 나를 더 이상 학교에 보낼 수 없어 6학년을 올라가지 못하고 5학년에서 그치게 했으나 이미 나는 구구단이며 곱하기까지 다 배웠기에 까막눈으로 살지는 않았다.

 

친정 역시 농사를 지어 자식을 가르쳤지만 부모님은 내게 들일을 시키지는 않으셨다. 집 안에서 십자수를 놓고 친구들과 공기놀이, 사방치기하면서 노는 게 나의 하루였다. 어머니께서 세상물정을 모르셨기에 집안의 돈을 맏이인 내게 맡기셨는데 아버지는 밤이 되면 공연히 무슨 물건이니 농사 도구를 사야한다며 돈을 달라고 하셨다. 한참 노름에 빠지셔서 밤만 되면 노름방에 가고 싶어 안달이 나신 거였다. 못준다고 감춰도 기어이 빼앗아 가시던 아버지는 논 두마지기를 하룻저녁에 날리신 적도 있었다. 그래서 어머니는 동생들 육성회비를 꾸러 다니시느라 아침이면 남의 집 울타리를 기웃거리기가 일쑤였다. 얼마나 폭폭하셨을까 우리네 유년시절 이 집 저 집의 고충들이다.

잡화를 팔러 다니던 시누이가 우리 집에 자주 왔는데 나를 눈 여겨 봤고, 이웃마을 오덕에 살고 있는 동생을 중매하여 나는 시집을 가게 되었다. 그 때 내 나이 스무 살로 신랑 얼굴도 못 보고 시집을 가게 되었는데 시댁이 너무나 가난하여 잔치도 못하였다. 기어들어갔다가 기어서 나와야할 정도로 쓰러져가는 초가집에서 8남매를 키우고 계시던 시부모님은 그래도 먹고살만하던 집에서 온 나에게 미안해서 그러셨는지 참 잘해주셨다. (매일 날삯을 주어 일을 시키는 일꾼)을 얻어 일을 할 때도 시어머니가 밥을 다 하셨다. 8남매의 맏이인 남편은 결혼 후에 군대를 갔는데 그래도 새색시 생각하여 화장품도 몰래 사다주고 보름 만에 한 번씩 휴가도 나왔다. 남편은 자신이 학교를 못 다닌 것을 평생 한으로 여기며 자식들만큼은 어떡하든 공부를 시킨다고 그 힘든 담배농사를 밤낮으로 매달려 했다. 황토 흙으로 벽돌을 만들어 건조실 벽을 만들어 쌓고 석탄을 때서 담뱃잎을 말렸다. 낮에 밭에 나가 담뱃잎 따서 지고 와 그것을 크기대로, 색깔별로 골라 매달아 밤에 불을 때 말리다보면 까무룩 졸 때도 있고, 피곤에 지쳐 쓰러져 누울 때도 있다. 그러다가 불이 담뱃잎에 옮겨 붙어 화상을 입기도 하고 담뱃잎을 태울 때도 있었다. 담배 농사 하는 집엔 딸 시집 안 보낸다는 말이 괜히 나왔을까? 그만큼 담배농사는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그래도 나라에서 전매를 하니 수입이 안정되어 죽을 때까지 담배농사를 손에서 놓지 못하였다.

남편은 69세 때 위암에 걸려 옥천 성모병원에서 반년을 고생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겨우 70살이 되고 초이레 되던 날 영영 돌아오지 못할 길을 갔으니 그보다 원통하고 서러운 게 없다. 아들 삼형제 대학 공부 시키고 딸 셋 고등학교까지 마치게 했으니 장하기 이를 데 없지만 남편이 고생만 하고 떠나 마음이 참 안됐다. 이 좋은 세상을 함께 누리면 얼마나 좋을까?

남편이 세상을 떠난 후 마음 둘 곳이 없던 나는 큰 애기 때 다니던 정방리 장로교회를 다니기 시작해 올 해로 22년이 되었다. 시부모가 살아계실 때는 나갈 수 없던 교회를 남편을 잃고 다시 다니게 되니 마음이 울적할 때 큰 위로가 되고 죽는 것이 두렵지 않게 되었다. 그저 건강하게 살다가 하나님 곁으로 가면 된다는 소원이 생겨 마음이 늘 평안하다.

큰아들은 안양에서 직장을 다니다가 고향으로 내려와 농사를 짓기 시작한 지 몇 해 되었는데 농사짓는 게 아직도 어설프다. 애를 쓴다고는 하지만 가보면 묵은 땅이 더 많다.

둘째아들은 울산 현대중공업에 다니는데 정년이 다 되었지만 5년이 연장되어 더 다니게 되었다니 다행이다.

막내아들은 안수집사로 옥천에 사는데 나에게 얼마나 잘 하는지 모른다. 집안에 뭐가 고장 나면 즉각 와서 고쳐주고 화장실에 문제가 생기면 시원하게 뜯어 고쳐놓는다. 며느리는 또 얼마나 꼼꼼한 지 건강검진을 받게 하여 치매예방 약이니 뇌졸중 예방 약 등을 매번 타다 준다.

딸 셋은 모두 직장을 다니고 있는데 요양원에서 일하고 있는 큰 딸이 엄마 잘 봐달라며 복지관에 한 턱을 내기도 했다.

친정엄마는 올 해 106세로 남동생이랑 안내면에서 살고 계신데 올케가 얼마나 훌륭한지 움직이지 못하는 시어머니를 다 씻기고 끼마다 죽을 끓여 먹여드린다. 자식 키울 때는 늙어서 봉양해주길 바라며 애지중지 키우는 거라면서 요양원 얘기는 꺼내지도 못하게 한다. 그런 며느리를 둔 엄마는 참 복도 많으시다. 남동생 역시 안내면에서 효도상을 주려하면 자기 부모 모시는 게 무슨 상 받을 일이냐며 번번이 사양한다.

나 역시 착하고 지혜로운 며느리들을 얻었고, 딸들을 다 잘 여웠으니 복이 많은 여자다. 복지관에서 좋은 선생님과 공부도 하고 책도 빌려다 읽고 친구가 생겨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오늘이 참 좋다.

녹음으로 짙어가는 금적산의 여름을 바라보며 내 남은 인생도 푸르름으로 가득하길 소망해 본다.

 

추억의 뜰 이기숙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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