튤립, 분재 등 다양한 구경거리 갖춘 서일연립
‘삼총사’ 이종섭 씨, 김선욱 씨, 이은현 씨가 정성스럽게 길러
서일 주민 “다른 주택 주민이 와서 봐도 좋을 아름다움” 추천

요즘 사람들은 옆집에 누가 사는지 잘 모른다. 아파트, 연립, 빌라 등에선 소음 때문에 이웃끼리 다투는 일은 있어도 좋은 일로 교류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옥천읍 금구리 서일연립은 다르다. 주민들 사이에 끈끈한 정이 남아있다. 36세대가 서로의 전화번호를 알고 있고, 매달 첫째 주 일요일에는 다 함께 연립을 청소한다. 
최근 서일 주민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건 꽃과 풀, 그리고 나무다. 연립 곳곳에 화려하게 핀 식물들을 바라보며 주민들은 행복감을 나눈다. 튤립, 개나리, 아마릴리스, 유향나무, 산세비에리아, 천남성, 붉은대극 등등. 품종이 다양해 몇 종류가 있는지 정확히 아는 사람은 없다. 최소 100여 가지 이상이 아닐지 추측만 할 뿐이다. 식물들은 연립에서 약 5km 떨어져 있는 환산의 풍경과 어우러져 ‘작은 식물원’ 같다는 인상을 준다. 주민 김재숙(75) 씨는 “아파트에 서서 바라보는 경치는 참으로 아름답다”고 했다. 
화창했던 26일 오전 11시 서일연립을 찾았다. 주민들이 연립주택을 꽃마당으로 만들었다는 제보를 받은 터였다. 오일장이 서는 날이면 꽃을 보러 오는 사람도 있다고 했다. 서일은 가화 지하차도와 가화1교 사이에 있다. 가동과 나동, 두 개 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꽃과 풀, 그리고 나무를 가꾼 사람은 주민들이다. 이종섭(75) 씨, 김선욱(84) 씨, 이은현(76) 씨다. 다른 주민들은 기자에게 이 세 명을 ‘서일을 화려하게 만든 사람들’이라고 소개했다. 

서일연립을 화원처럼 꾸미는 데 앞장선 이종섭씨, 김선욱씨, 이은현씨.

■ 서일 튤립의 아버지, 이종섭 씨

가동 앞 화단엔 튤립이 늘어서 있다. 빨간색, 노란색, 분홍색, 주황색, 흰색, 보라색 등 알록달록한 꽃들이 촘촘히 고개를 내밀고 있다. 화단 앞엔 작은 설명표가 있는데, 각 색깔의 튤립이 지닌 꽃말을 알려준다. 빨강은 사랑의 고백, 노랑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분홍은 사랑의 맹세···. 지나가던 주민은 “지금도 아름답지만, 지난주가 튤립 절정이었다”며 “기자님이 조금 늦었다”고 말했다. 신문 독자들이 조금이라도 빨리 서일연립을 찾아 꽃을 구경하라는 재촉인 셈이다.

튤립을 피운 건 군 체육센터 수영장 탈의실에서 일하는 가동 주민 이종섭(75) 씨. 이 씨는 이원면 이원리에서 태어났다. 젊은 시절엔 대전에 사무실을 두고 옥천에서 출퇴근하며 30년 넘게 인테리어 일을 했고, 월남에 17개월 파병 다녀오기도 했다. 서일연립에 정착한 지는 20년 정도 됐다. 

처음에 이 씨는 아내를 위해 튤립을 심었다. 몸이 아픈 아내가 산책할 때라도 꽃을 보며 기분을 풀라는 의도였다. 작년 봄 태안 꽃 축제를 찾아 80여 가지 종류의 튤립 씨앗을 사 왔다. 퇴근하고 시간이 날 때면 물을 주며 튤립을 피웠다. 

아내는 꽃을 보며 웃었다. 예상하지 못했던 건 연립 주민들, 길을 지나던 군민들의 행복한 반응이었다. 주민 김재숙 씨는 “지나가던 젊은 여성 둘이 카메라로 튤립을 계속 찍었다”며 “여성들이 ‘이렇게 예쁜 꽃을 볼 수 있게 해줘 고맙다’는 말을 주민들에게 했다”고 밝혔다. 이 씨는 주민들의 “저 아저씨 덕에 길이 화사해졌다”는 칭찬에 부끄러운 듯 연신 “허허” 웃었다. 

서일연립 가동을 둘러싼 분재.
화단을 채운 형형색색의 봄꽃.

■ 택시 기사에서 준(準) 분재 기술자로, 김선욱 씨. 

가동 뒤편 뜰엔 분재가 있다. 소사나무, 문주란, 느티나무, 설매화, 앵초 등 어림잡아도 40가지 넘는 나무·식물이 촘촘히 서 있다. 김재숙 씨는 “뒤편 좁은 길에 있어 주민 외엔 이곳을 잘 모르지만, 작은 식물원이나 다름없다”고 말했다. 

분재를 가꾸는 건 가동 주민 김선욱(84) 씨다. 30년 넘게 분재를 꾸미고 있다. 안남면 연주리에서 태어나 옥천에서 택시를 45년쯤 몰다가 3년 전 은퇴했다. 택시 일을 했던 이은현(76) 씨는 김 씨를 ‘옥천 택시 최고참 형님’이라고 소개했다. 청년 시절엔 15년 정도 화물차에 농산물을 주로 싣고 서울, 부산, 강원 등 전국 방방곡곡 다니기도 했다. 서일연립 바로 옆 세원연립에서 20년가량 살다가 12년 전에 서일로 이사 왔다. 

김 씨가 서일연립에 처음 왔을 때 분재가 있는 뒤뜰은 사람 다닐 공간이 못됐다. 풀이 우거져 발 디딜 틈이 없었기 때문이다. 김 씨는 ‘좀 걷자’는 생각에 먼저 사람이 지나다닐 통로를 만들었다. 읍내에서 보도블록 공사를 하면, 걷어낸 보도블록을 얻어다 택시에 가득 싣고 와서 길을 새로 깔았다. 

길을 낸 후 장독대를 들여 고추장, 된장을 담갔고 분재를 이전에 살던 세원연립에서 가져왔다. 분재는 김 씨가 세원연립에 거주하던 30여 년 전부터 가꿨다. 기르는 식물 수십여 종은 전국에서 가져왔다. 옥천, 청주, 제주, 무주, 금산, 영동, 대청호 등등. 허락을 받고 나무를 통째로 뜯어 오거나, 씨앗을 받아와 심거나, 돈을 주고 식물을 사 왔다. 운동 삼아 오르고 내리던 산에서 주로 얻어왔다. 

기르는 식물 종류가 많고, 꽃이 아름답다 보니 뒤뜰을 지나는 사람들이 분재를 탐내기도 한다. 김 씨는 “꽃이 피면 뜯어가도 되냐고 물어오는 사람들이 꽤 있다”며 “선물삼아 줄 때도 많다”고 했다. 꽃과 풀, 그리고 나무를 하나하나 소개하는 김 씨의 목소리에선 자랑스러움이 묻어나왔다. 

서일연립 가동을 둘러싼 분재.
서일연립 가동을 둘러싼 분재.
서일연립 가동을 둘러싼 분재.

■ 작은 정원을 꾸미는 사진가, 이은현 씨

나동 뒤엔 깨쟁이풀, 천남성, 붉은대극 등 생소한 식물 40여 종이 자리한 작은 정원이 있다. 눈으로 봤을 땐 5평가량 돼 보였다. 우뚝 솟은 민들레 씨앗들과 절묘하게 뒤섞여 다채로운 인상을 풍긴다. 금구천 도로와 맞닿아 있어 오고 가는 사람도 정원을 쉽게 구경할 수 있는 게 장점이다.

정원을 꾸민 건 나동에 사는 사진작가 이은현(76) 씨다. 안남면 지수리에서 태어나 택시 기사를 40년 넘게 했고, 전업 사진작가로 전향한 지는 16년 됐다. 한밭사진공모전 등에 입상하며 군에서 이름 날리는 사진가가 됐다. 서일주택으로 온 지는 30년 정도 됐다고 이 씨는 기억했다. 

이 씨가 정원을 가꾼 건 야생화가 좋아서였다. 사진 찍으러 여러 산을 다니다 보니 자연스럽게 꽃과 식물에 더욱 마음이 갔다. 집 앞에 정원을 아예 꾸미기 시작한 건 10년 전쯤이다. 야생화 등 식물은 대전으로 차를 몰고 가 직접 공수해왔다. 여러 가게를 드나들며 골라왔다. 

산에서 야생화를 캐오는 방법도 있지만, 이 씨는 사 와서 심는 게 좋다고 했다. 자연 사진을 찍는 사람은 다른 이와 마음이 다를 수밖에 없다는 설명이다. “산 사진 찍는 사람이라 그런지  산에 있는 식물을 옮겨심기엔 마음이 아프다”고 말했다. 이 씨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기자는 이 씨가 자연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음을 느꼈다.

여러 사람이 서일을 식물로 가꿔서인지, 서일은 화창하다. 김재숙 씨는 “아저씨들이 화려하게 꾸며준 덕분에 볼거리 많은 주택이 됐다”며 “다른 데 사는 군민들도 와서 구경하라고 추천하고 싶다”고 말했다. 금구천 산책하다가, 오일장 물건 사다가, 서일연립을 한 바퀴 둘러보고 가면 어떨까. 아 참, 튤립은 5월부터 조금씩 지기 시작하니 빨리 다녀가는 걸 권장한다.

화단을 채운 형형색색의 봄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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