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 전 스스로 목숨을 끊은 딸, 죄책감 안고 사는 엄마
딸 죽음 받아들이기도 전에 불어닥친 코로나19 피해… 고통 알릴 곳 없어
뼈아픈 ‘자살 사망자 유가족 원스톱 서비스’의 부재, 쳇바퀴 같은 일상

4월23일 <옥천신문>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들의 유가족들을 위한 공적 서비스에 대해 보도한 바 있다(‘스스로 떠난 자들의 그림자, 유가족 위한 정책 지원 필요’ 기사 참고). 그림자처럼 살아가는 유가족 존재를 알리고, 유가족이 아픔을 치유하고 사회로 복귀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적 지원을 알아보았다. 누구에게나 사별은 슬픈 일이지만 갑작스런 헤어짐을 겪어야 했던 고의적 자해 사망자 유가족은 쉽게 헤어 나올 수 없는 충격과 슬픔에 무너진 일상을 보내는 경우가 있다. 이번 보도에서는 유가족이 부여잡고 있는 일상을 조금 더 밀착해 들여다보기로 했다. 3년 전 스스로 목숨을 끊은 딸을 여전히 가슴에 묻고 살고 있다는 A씨(여·60대) 이야기를 간추려 싣는다

삽화 김 윤 작가 [※ 이 삽화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삽화 김 윤 작가 [※ 이 삽화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 끊임없이 따라다니는 죄책감 … “딸을 포기하려 했던 순간들, 후회로 남아”

죄책감은 자살 유가족들이 경험할 수 있는 가장 보편적인 감정이다. 이들을 대상으로 한 국내 연구조사에서는 ‘고인의 죽음을 막지 못했거나 죽음에 기여했다는 생각에 죄책감 혹은 무력감을 느꼈다’라는 답변이 가장 높은 비율로 나타났다. 사고 사망은 원망의 존재가 외부에 있는 경우가 흔하지만, 자살 사망은 원망의 대상이 따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그 원인이 자신에게 있는 것처럼 여기도록 한다. A씨도 마찬가지로 딸의 죽음에 자신이 연루되어 있다고 강하게 믿고 있었다.

“어떤 날은 다 포기하고 싶었어”

딸은 사망 이전 여러 차례 자해를 시도했다. 한창 방황을 일삼던 학창 시절 가출을 해 어린 나이엔 벅차기만 한 삶의 무게를 혼자서 감당해내려 했던 딸은 대전에서 얻은 방 안에서 자주 자해를 시도했다. 자해로 인한 상처 자국이 하나씩 늘 때마다 부모는 딸의 고통을 더는 지켜볼 수 없는 지경에 다다르고 있었다. “아이 아빠가 한 번은 도저히 지켜볼 수가 없었는지 ‘차라리 (딸을) 포기하고 싶다’라고 말한 적이 있어요. 처음엔 그 말을 듣고 남편에게 버럭 화를 냈는데 딸의 자해가 계속되니까 어느 순간 나도 그 말을 내뱉게 되더라고. 그 말이 얼마나 후회되는지 몰라요”

A씨는 딸이 스스로 세상을 등진 후 자신을 가장 힘들게 했던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죄책감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거미줄처럼 뻗어나갔다.

“우리가 조금만 일찍 도착했어도…”

A씨는 그날의 기억도 연이어 꺼내 들었다. 딸의 사망 직전, 여느 때처럼 딸에게서 ‘엄마가 보내준 사골국물을 다 먹었으니 또 보내달라’고 연락이 왔다. 딸은 엄마가 만들어준 사골국을 좋아했다. 타지에서 홀로 생활하다 보니 엄마의 음식을 찾는 일은 빈번했다. 당연히 A씨는 보통의 일처럼 여겼다. “우리가 그때 일이 바빠서 사흘 정도 새까맣게 잊고 있었지 뭐야. 그러다 뒤늦게 아이 아빠랑 사골국물을 들고 딸을 찾았어요. 근데 우리가 늦어버렸던 거야.” 차갑게 식어버린 건 사골국이 아니라 딸의 몸이었다. 당시 A씨는 경황이 없어서인지 딸의 죽음을 덤덤하게 받아들이는 듯했다.

“남편에게 ‘자기야 우리 딸 부검하지 말자. 타살 아닌 거 알잖아. 몸에 더는 상처내지 말자”

하지만 딸의 사망 사실을 해석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산 자’들의 몫이었다. 딸이 죽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불현듯 찾아온 생각이지만 “그때 죽으려고만 했던 건 아니었던 것 같아”라고 말끝을 흐렸다. 또다시 화살을 자신에게 돌리고 있었다.

■ 엎친 데 덮친 시련

풍파는 연달아 찾아왔다. 딸의 죽음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한 시기에 찾아온 코로나19 바이러스는 A씨의 가정을 뒤흔들어 놓았다. 읍내에서 자영업을 운영하고 있는 A씨부부는 코로나19 피해를 직격으로 맞았다. 매출이 바닥을 치고 세금조차 낼 수가 없었다. 통장과 대전에 있는 집까지 모두 압류를 당했다. 그런 모습을 눈뜨고 지켜보고만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윽고 “사업장 월세마저 제때 못 내게 됐어요. 그래서 남편은 바깥의 일거리까지 찾아다니면서 하루에 일을 두 탕씩 뛴 거야. 그때 남편의 몸무게가 17kg이나 줄었지. 고혈압에 당뇨까지 왔으니까...”

게다가 A씨에게는 자신의 돌봄이 필요한 딸의 중학생 아들 B군도 있었다. A씨의 손자인 B군은 태어나자마자 딸이 아니라 할머니인 A씨의 손 아래 옥천에서 줄곧 자라왔다. 딸은 일찍이 남편과 이혼을 해 홀로 아들을 키울 여력이 안 됐다. 이혼 뒤 딸은 기초생활보장 수급자로 전락했고, 홀로 남겨진 B군에게 쥐어진 돈은 딸의 전남편이 보내온 양육비 30만 원이 전부였다. A씨는 오로지 손자 걱정뿐이다. “우리는 그래도 괜찮아, 저 녀석이 걱정이지. 아빠랑 연락이 닿지도 않는데 아빠가 재산이 있다는 이유로 복지 대상에서 제외됐더라고. 이게 바로 사각지대지 뭐야” 양육비 30만 원으로 B군의 생활비, 학원비를 감당하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빠듯한 생계와 딸에 대한 그리움, 미안함의 감정에 시달릴수록 A씨는 더욱 처절하게 몸부림쳤다. “일로 이겨내려 했어요” 자신의 두 손을 내보였다. A씨의 손은 노란 굳은살들로 뒤덮여 있었고, 손가락 마디 하나하나는 동그랗게 퉁퉁 부어올라 있었다. 딸의 사망 이후 지난했던 세월이 남기고 간 상흔이었다. 오랫동안 어두운 구렁 속에서만 머무른 탓이었는지 “아직도 불을 끄고 잠을 못 자. 딸이 자꾸 생각나서.”

■ 경제적 결핍보다 뼈아픈 사회적지지 자원의 부재

빈곤만큼이나 A씨를 괴롭혔던 건 또 있었다. 더는 기능하지 않는 사회적 감정이 그것이다. 흔히 혼자서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의 잔여량은 주변인의 위로와 공감으로 상쇄된다. 그러나 A씨는 딸의 사망 소식을 가까운 친구 한 명 빼고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자살에 대한 사회적인 편견에서 오는 수치심이 애도 기간 내내 A씨를 휘감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집단주의가 강한 우리나라에서는 가족의 일을 개인의 삶과 연결시키려는 경향이 짙다. “그런데 이미 소문이 퍼졌나 봐. 지금은 거의 다 알게 된 거 같아.

앞으로도 A씨는 위로의 손길을 일절 기대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딸의 죽음으로 인한 고통을 누군가와 함께 나눈다는 생각을 아예 하지 않고 있었다. 그간의 연구들을 살펴보면 자살 사망자 유가족들 대부분은 자살 사실을 숨기거나 사회적으로 위축, 고립되어 애도 과정에서 어려움을 겪었다. 애도의 감정은 혼자서 정리해야만 하는 것이라고 받아들여 주변인들과 자연스레 멀어지게 되는 것이다. A씨에게 사회적지지 자원을 호소하는 것은 일종의 사치였다.

물론 외부의 손길이 전혀 없었던 건 아니다. 딸의 사망 직후 보건소와 정신건강복지센터가 A씨를 찾아왔다. 보건소와 정신건강복지센터는 기관과 병원에서 진행하는 상담 프로그램에 참여할 것을 권했다. 경황이 없었지만 A씨는 마지못해 응했다. 역시 오래가지 않았다. “처음엔 2~3일에 한 번씩 센터에 나가서 상담을 받았죠. 그런데 집으로 돌아오면 또 생각이 나니까…”

더욱 뼈아픈 사실은 가족들끼리도 각자의 힘듦을 서로에게 내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딸의 사망 사실을 밥상 위에서 소환하는 일은 금기시됐다. 그래도 A씨는 알았다. 가족들은 목이 메는 데도 꾸역꾸역 밥을 밀어 넣고 있다는 사실을. 손자인 B군은 표현을 잘 안 할 뿐, 조금 더 어렸을 적엔 부모의 부재를 받아들이기 힘들어하는 모습을 종종 보였다. “한 번은 얘가 자기가 다니던 유치원 원장님한테 아빠라고 불렀나 봐. 아빠를 생전 본 적이 없었으니까. 그거 가지고 원장님이 야단을 쳤는데 그게 너무 속상했는지 집에 와서는 ‘나는 도대체 누구한테 아빠라고 불러야 하냐’면서 엉엉 울더라고. 그랬던 애가 이제 엄마까지 없으니 친구들 사이에서 얼마나 소외감을 느끼겠어” A씨의 남편도 마찬가지였다. “남편은 나보다 눈물이 더 많은 사람이야. 그런데도 말을 안 해. 가끔 내가 술 한잔하고 나서 남편한테 왜 그때 그렇게 (딸한테) 야단을 쳤냐고 한 마디 건네도 아무 말 없어.” 그간 실질적인 도움 없이 쳇바퀴 돌 듯 지낸 A씨의 나날들은 무기력하기만 했다. 변한 게 없기 때문이다. 우울감에 젖어 들기 일쑤였다. “이틀 전에 쓰레기를 버리러 나갔다가 사과꽃이 피어 있는 걸 봤어요. 근데 그 꽃을 한참 동안 바라보고 있다 보니까 ‘저런 꽃들도 해가 지나면 돌아오는데’라는 생각이 들더라고…” A씨가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리고 다시 입을 열었다. “내 자식은 안 돌아오니까” A씨는 이내 참아왔던 눈물을 터트렸다. “해가 지나고, 다시 꽃이 피고, 낙엽이 다시 떨어질 때마다 생각이 나요… 맨날 똑같은 생각만 하고 사는 거야” A씨는 잘 참았던 눈물이 터지자 부끄러웠는지 그래도 예전에 비하면 많이 나아진 편이라고 말했다. “주변 사람들이 요새 ‘어머 자기야 웃네? 자기 웃는 거 몇 년 만에 봐’라고 하더라고. 나는 그동안 웃는다고 웃었는데 그게 아니었나봐”라며 애써서 지은 웃음으로 눈물을 지우려 했다

인천·광주·원주는 유가족 아픔 ‘원스톱’으로 위로

장례비용·사망자 자녀 학자금 지원 법률행정서비스 제공
옥천군보건소·정신건강복지센터 상담 및 약물치료 지원

군내 ‘고의적 자해 사망자’ 유가족은 상담과 약물치료 등에 국한된 지원을 받지만 인천광역시, 광주광역시, 강원도 원주시 등은 ‘원스톱’ 법률 및 행정서비스를 제공해 눈길을 끈다. 

고의적 자해 사망자의 유가족은 사별의 아픔뿐만 아니라 경제적 어려움 등 현실적인 문제에 직면한 경우도 많기 때문에 고통분담 차원에서 이 같은 제도를 운영 중이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주민에 대한 자책을 남은 가족 구성원만이 지고 가게 하지 않겠다는 의도이기도 하다.

3년 전 스스로 목숨을 끊은 딸의 장례비용을 마련하는 것부터 어려움을 겪었다는 어머니 A씨는 ‘자살 사망자 유가족 원스톱 지원 서비스’ 필요성을 강조했다. 도움의 손길이 부담스러우면서 한편으로는 필요하기 때문에 받았을 것이라 예상했다.

A씨는 “세상에 그런 서비스가 있는 줄도 몰랐다”며 “딸의 장례식 준비와 사망 신고 이런 것들을 남편이 다 했다”고 말했다.

원스톱 지원 서비스를 운영하고 있는 지자체에서는 고의적 자해 사망자의 자녀 학자금 지원도 하고 있다. 남겨진 손주의 양육도 ‘원스톱 지원 서비스’가 있다면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표했다. 사망한 딸의 전 남편은 생전 이혼한 상태로 양육비를 월에 30만원정도 보낸다. 또래 친구들이 다니는 학원을 보내주고 싶어도 이 양육비로는 턱없이 부족한 것이 현실이다.

A씨는 “제가 이런 도움을 받을 자격이 있는지 잘 모르겠다”며 “손자 키우기 막막해도 잘 키워야 하고, 건강하게만 자라주길 바랄 뿐이다”고 말했다.

한편, 옥천군보건소와 정신건강복지센터는 자살예방 사업과 연계한 상담서비스, 약물 치료 등을 진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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