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즈 야스지로의 영화는 하나의 장소로 귀결한다. 그곳은 집이다. 말하자면 오즈에게서 접히고 놓여진 집은 하나의 우주이다. 그는 세상을 향해 열린 창문 곁에서, 정원을 향해 열어 놓은 마루에서, 어디선가 나타난 딸이 자기에게 인사를 하고는 자신이 알지 못하는 방법으로 2층에 올라 간 것을 탄식하면서, 마치 자기 자신에게 말하듯이 서로에게 말을 하는 정면의 카메라 앞에서, 결코 서로 손 댈수 없는 외로운 존재들이 360도 편집의 순열에 따라, 그 자리에 붙잡힌 듯이 앉아서 그 순환을 받아 들이는 우주의 존재론이다. 한편의 영화 안에서 작은 우주가 순환하고, 그의 54편의 영화 속에서 커다란 우주가 순환한다. 안보이면 안보이는 대로 불편하면 불편한 대로 없어지면 없어지는 대로, 그러나 그 안에서 하여튼 살아야 하는 것은 슬픈 일이다. 오즈는 그 슬픔을 찍는다. 그러므로 그에게 결국 산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정성일 정우열의 연애담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에서 인용

독자들의 독해 능력에 자괴감을 들게 하는 악명 높은 ‘키노’의 편집장 출신이면서 문어체 말투로 고고하게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하고 있는 정성일의 평론집을 처음으로 펼쳐 들었다.그가 존경하는 영화와 감독들의 화려한 수식에 나는 메모지를 옆에 놓고 목록들을 적어 놓는다. 특히 홍콩 무협영화의 대가 장철을 언급하면서 이소룡이 홍콩영화의 존엄을 무너뜨렸다는 언급에 시간을 쪼개어 <돌아온 외팔이>를 보았다.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부분도 있지만 갸우뚱하게 하기도 한다. 특히 오즈 야스지로에 관한 위에 인용한 문장의 밑줄 친 부분은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히려 정성일이 슬픈 삶을 견디고 있지 않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의 평론에 출몰하는 어두운 기운과 디스토피아적인 전망과 엄숙주의.) 일부러 평론에서 거론한 <오차츠케의 맛>을 찾아봤지만 (물론 정성일은 54편을 다 봐야지만 오즈의 세계를 알 수 있다고 하는데 그래도 나름 54편까지는 아니지만, 그의 중요한 작품들을 보았다) 그가 슬픈 삶을 견뎌내고 있다는 비관적인 증거를 찾을 수 없었다. 물론 지금까지 본 영화들도 마찬가지, 각자의 스키마가 다르지만, 정성일의 비관적인 스키마가 오즈 감독의 영화를 비관적으로 해석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개인적으로 영화 특강을 할 때 오즈 감독의 휴머니즘을 언급한다. 인본주의적인 방식의 촬영방식과 인물의 구도. (오즈 감독의 전매 특허 다다미 미장센은 로우 앵글의 각도로 인물을 찍는 방식이다. 특히 등장인물이 앉을 때 카메라를 등지고 앉아 있는 장면을 종종 볼 때가 많다. 카메라가 인물을 끌고 가지 않고 먼저 가서 기다리거나 함께 간다. 혹은 우직하게 지켜본다. 그리고 아울러 인물의 옆모습과 뒷모습이 많다) 그리고 더러는 여성의 지위에 관해 소박하게 지지를 보내기도 한다. 

정성일의 글대로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에서 축축한 기운을 찾아내긴 쉽지 않다. 오히려 그의 영화를 보면 나는 따뜻한 기운을 느낀다. 영화는 감독뿐 아니라 제작진들의 에너지를 담고 있다. 오즈 감독의 영화는 따뜻한 봄날, 봄볕을 쬐는 ‘호박꼬지’와 같다. 감독의 페르소나 류치슈의 잔잔한 미소는 슬픔의 얼굴보다는 오히려 그런데도 세상을 포용하는 넓은 오지랖이 보인다. (배우 로빈 윌리엄스의 얼굴은 편안한 미소가 캐릭터 형성에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지만, 정성일의 글처럼 슬픔을 견디고 있는 얼굴로 보인다.)

오즈 감독의 영화는 인간의 실수에 집중하기보다는 불완전한 인간이 빚어내는 바깥의 풍경을 다룬다. ‘동경 이야기’의 어머니는 자식들의 홀대에 ‘병’을 얻었지만, 영화에서는 짧은 대사로 어머니의 죽음을 처리한다. 기존의 영화라면 자식들의 몰인정을 손가락질하면서 단죄하는 퍼포먼스를 벌이면서 관객들에게 동의를 구하지만 오즈 야스지로는 단죄하는 일이 없다. 가끔 인물들간의 갈등이 있지만 일방적이지 않고 균형을 맞추려 한다. 절대선과 절대악이 없다.

그래서 심심하다 생각하겠지만 인물들을 이분법으로 나누고 갈등 중심으로 푸는 기존 영화의 문법에 지친 관객들에겐 때론 위로를 준다. 그렇다고 사람을 무조건 아름답다고 일부러 꾸미지 않는다. 단지 인물들을 가늠하는 건 신과 관객의 영역일 뿐이다. 감독은 단지 미장센으로 보여 줄 뿐이다. 오즈의 집은 그가 선택할 수 있는 최소한의 마지노선이다. 오즈 감독의 따뜻한 집은 이미 마련하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죽기 전까지 영화를 찍은 걸 생각하면 이보다 행복한 감독이 어디 있으랴? 그리고 많은 감독이 오즈를 추앙하는 건 오즈 감독의 집이 편안해서다. 오즈에게 기대고 싶어서다. 감정의 온도는 따듯한 곳으로 향한다. 그리고 오즈 감독을 얘기하면 따라 붙는 태그는 ‘동경 이야기’지만 내겐 오히려 다른 영화들이 더 좋았다.

개인적으로 술을 마실 때 안주와 술보다 더 살펴보는 건 공간이다. 그리고 조명이다. 형광등 아래에서 새우깡과 소주를 마시는 자리는 절대로 가지 않는다. (오즈 감독의 영화마다 단골로 등장하는 매력적인 선술집 장면은 홍상수 영화에서도 반복된다. 하지만 오즈의 술집이 더 인간적이고 따뜻해 보인다.) 그동안 산업화 시스템은 공간을 자본을 증식할 수 있는 수단으로 여겼다. 그래서 아파트는 발기한 욕망처럼 점점 더 하늘로 솟아 올랐고 신분상승의 수단이 되었다. 게다가 풍경마저 자본이 독점하기 시작했다. 

오즈 야스지로 감독은 처음으로 공간에 인격을 불어 넣은 감독이다. 공간이 영화를 열고 조용한 복도와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아무도 없는 다다미방과 마을의 골목이 영화를 닫는다. (윤단비 감독의 <남매의 여름밤>도 오즈의 흔적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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