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현 출향인 전 대전고 한문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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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 남쪽 구지산 끝자락 언덕에 있는 500여년 역사를 지닌 금릉김씨 재실 겸 서당을 찾았다.

고색창연한 목제 기와집은 보청천을 바라보며 쓸쓸히 홀로 서 있었다.

허물어진 연못가에는 개나리가 샛노랗게 반기고 매화꽃은 봄바람에 흰 눈같이 휘날린다.

주인 없는 서당 지붕기와엔 와송 만이 버섯모양 외롭게, 뒷산에는 진달래꽃 붉게 춘광에 빛난다.

금릉김씨 30대인 나그네, 뜰에 서서 나의 뿌리인 조상의 역사와 삶을 추상해 본다. 

금릉김씨는 김해김씨에서 분파되어 고려 때 서경유수(현 평양시장)를 지낸 ‘김중구’(1214~1260), ‘금릉군’으로 봉해져 1세로 중시조다.

양주목사 아들 김규, 전국을 유람하다가 풍광(風光)이 수려한 청산(靑山) 장녹골 청량사에 정착하여 제단을 쌓고 성리학에 몰두하였다 한다. 

서당 뒷산에는 진달래꽃 붉게 빛나고 연초록으로 물들고 있고, 허물어진 연못가에는 샛노란 개나리가 만발하고 매화꽃은 봄바람에 흩날리고 있었다. 

이 서당은 김옥정(16세기)(성균관 생원)이 지은 것으로 조선 3대 시인 이달(孫谷) 선생이 이곳에서 잠시 머물다가 떠날 때 ‘무단’ 한시를 한편 써놓고 갔다고 한다.

이 서당에서 금릉김씨 종친 자녀, 인근 어린이들을 무료로 가르침으로써 청산지역에 예(禮)와 학(學)을 심어주었으며 조선말까지 배움의 터였다.

매년 음력 10월7일에 이곳에서 경향 각지에서 종친들이 모여 시사를 지냄으로써 추원보본(追遠報本)을 몸소 보여주었다.

청성면(말밍이, 계하, 무회리)은 금릉김씨의 집성촌으로 특히 말밍이는 가장 많이 살고 있었다.

내가 유년시절에는 서당에 가지 않고 훈장이신 조부님 밑에서 동네 아이들과 눈보라치는 겨울이면 천자문, 계몽편, 명심보감을 배웠던 기억이 새록새록 난다.

내가 한문을 가르치는 교사가 된 것도 어린 시절 한문공부 때문이였으리라.

퇴직하고 귀향하여 옛 조상(옥정선생)처럼 고향아이들을 모아 장수 체험 마을과 연계하여 선비체험 봉사활동을 하려하였으나 아이들이 없어, 꿈은 수포가 되고 말았다. (지금은 청성초등학교 폐교위기까지 왔으니)

책 읽는 소리, 어린애 우는 소리가 없는 시골, 미래가 심히 걱정된다.

올해 초 종친회의에서 이 오래된 서당이 기울어져 헐고 신축하는 것이 논의되기로 했다.

그러나, 나는 가슴이 아팠다. 우리 금릉김씨의 배움의 산 증인인 서당이 사라진다는 것이 우리 종친뿐만 아니라 이 지역의 큰 손실이 아닐까,

그래서 헐기 전에 옥천군에 문화재가치를 의뢰하며 며칠 전 학예사 답사에서 긍정적 대답을 받았다. 하여튼 도 문화재로 지정되어 금릉김씨의 자존심과 청산지역의 문화유산의 보존이 되길 기대해 본다.

허허로운 마음으로 서당을 떠나면서 김원행 선생께서 이조때 써주신 현판 지재(止齋)의 ‘止’의 깊은 뜻을 음미해 본다. 

仁者樂山如艮之止(인자요산여간지지) 어진 사람은 산이 좋아, 돌아와 그곳에 머물고

相彼邱偶如鳥之止(상피구우여조지지) 저 언덕 숲 꾀꼬리 노래하며 머물고 있네

君子以之知所當止(군자이지지소당지) 선비들은 이러함으로 마땅히 머물곳을 알아야 하고 

忠信孝敬惟於善止(충신효경유어선지) 충성, 신의, 효도 그리고 공경함은 오직 착함에 머물러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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