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빛자서전 인생은 아름다워(68)
이승호 1950년~~

도도한 봄꽃들이 허리를 숙여 꽃 터널을 만들었다. 긴 팔을 뻗어 춤사위까지 선보인다. 내 인생에도 분명이 있었던 봄날의 청춘을 뒤로하고 이제는 고향 마을 초입의 뿌리 깊은 나무가 되었다. 아득히 멀리 와 버린 그 날의 기억들, 안타깝지만 허망하지 않은 건 두꺼운 외피를 벗고 속살을 기꺼이 내 보일 수 있는 내공이 다시 만들어졌다.
100세 시대가 표면화되면서 70대의 나이는 낀 세대로 분류되고 있다. 흔한 말로 아저씨도 아니요 할아버지 소리 듣기엔 너무 젊다. 아직 의식의 수준이나 활동 범위가 청년과 견줄 만하다. ‘노인’의 기준을 나이 숫자로 매긴다면 충분히 억울할 나이다. 그 억울한 나이의 이승호 선생님, 세상에 대한 관조는 예리하고 고향과 가족에 대한 시선은 온도를 수치로 가늠할 수 없이 따뜻하다. 평생 품고 가야할 아버지 어머니를 담은 기억의 편린들, 무채색의 그리움마저 아련하다. 

부부사진
부부사진

■ 방귀깨나 뀌던 이백리 이씨네 

나는 1950년생 호랑이띠, 일흔 고개를 넘은 지 두해가 지나고 있다. 불과 10여 년 전만 해도 운신의 폭이 좁아졌을 나이인데 시절이 좋아 청년 못지않은 기개로 살아가고 있다. 좋은 시절을 만난 건 맞다. 우리도 전쟁의 폐허위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면서 시대의 아픔도 겪고 놀랍게 발전하는 나라의 위상도 맛보았다. 더불어 그 현장에서 한 몫을 하면서 치열한 청춘을 보냈다. 돌아보니 1950년생 우리들도 수많은 이야기들을 품어왔다.

군북면 사무소 안동네인 이백리가 고향이다. 나는 면 소재지에서 초등학교, 군 소재지에서 중학교, 도청 소재지에서 고등학교를 다니고 서울인 한양에서 대학을 다녔다. 상급학교에 진학 할 때마다 규모가 큰 세상과 만나면서 성장의 발판을 다졌다. 현역시절에는 서울에서 치열한 한 때를 보내며 산업역군으로 자리매김을 했었다. 초등학교 때 서울 수학여행 가는데 할아버지께서 쌀 1말 팔아서 경비를 충당해주셨다. 출세라는 이름을 거론할 만큼의 현역 시절 대단한 열매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작은 시골마을에서 대학가기가 쉽지 않았을 때 서울까지 올라가 대학시절을 보냈다면 내 나이에 혜택 받은 환경이었음은 틀림이 없다. 

구순이 넘은 아버님도 당시에 대학갈 정도로 부유한 집이었다. 옥천에서 현역 활동하신 분으로 아버지의 함자를 모르는 분들이 거의 없다. 우리부부는 나의 당뇨로 인한 건강 문제와 혼자 계신 아버님을 모시기 위해서 사업을 정리하고 귀향을 결정했다. 서울여자인 아내가 두말도 하지 않고 결정해줘서 아내를 존경한다고 서슴지 않고 말할 수 있다. 아버님을 모시고 살며 간간이 어머니 산소에 들러 

“어머니 그 세월을 어떻게 사셨어요? 어떻게 참고 견디셨어요?”

라며 위로 할 수 있는 지금의 시간이 나에게 다시 도래한 황금기다. 어머니는 16년 전에 돌아가셨다. 아버님은 파킨슨 병과 노년의 동행자가 되어 기개 넘쳤던 젊은 시절을 뒤로 한 채 치매에 걸리지 않으려고 부단한 노력을 하고 계신다. 아버님은 농사도 지으시며 옥천 경찰서 공무원 생활도 하셨고 국회의원 보좌관도 하신 후 서기관으로 은퇴하셨다. 
할아버지는 본시 충주분인데 숟가락 하나 없이 무일푼으로 왜정시대 경부선철도 건설하는 곳에 일자리를 구하겠다고 옥천에 오셨다가 그 길로 정착하게 되셨다. 할머니는 친정이 갈포 공장을 할 만큼 부유했는데 손주들에게 소설책을 읽어주셨다. 당시로는 상당히 개화된 여성이셨다. 우리는 3남 3녀로 나는 그 중 둘째다. 

고등학교 졸업식 (그리움이 화석이 된 아름다운 어머니와)
고등학교 졸업식 (그리움이 화석이 된 아름다운 어머니와)

■ 그리움이 화석이 된 어머니

아버님은 16살에, 17세 되신 어머니와 결혼을 하셨다. 고등학교에 다니는 어린 신랑이었다. 나를 열여덟 살에 낳으셨다. 대단한 시아버님, 고등학교에 다니는 신랑을 만나 어머님의 마음고생이 심했을 것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지만 그 깊은 속을 가늠할 수는 없다.

아버님은 고등학교 때 결혼하시고 대학에 들어가셨다. 아버지 혼자 서울 가서 유학하고 어머니는 큰살림 하느라 고생만 하시다가 74세에 갑자기 세상을 떠나셨다. 병원에 입원 한 번 하시지 않고 항생제 한번 드신 적 없던 건강한 분이셨는데 자식들 호강을 받으실 나이에 참으로 애석하게 떠나셨다. 고우셨던 어머니의 강인한 정신세계는 외가의 혈통으로 물려받은 유산이었다. 외가는 발동기가 없던 시대에 물레방아를 손수 제작하여 물레방앗간을 운영 하셨다. 어머니는 외조부의 진취적 정신과 근면함으로 가난을 극복한 집안의 8남매 중 장녀이셨다. 부모님 세대가 물려주신 정신적 유산이, 쉽지 않았던 시절을 살아온 내가 동년배들보다 많은 혜택을 누렸던 이유기도 하다. 

■ 노란이, 이백리의 슬픈 역사가 낳은 이름 

우리 이백리는 6.25때 격전지였으며 요충지였다. 대전에서 옥천 사이는 경부선 철도와 고속도로, 국도가 나란히 지나가는 곳이다. 그 길만 막으면 부산으로 내려가는 길을 차단할 수 있었다. 당연히 다들 혈안이 되어 차지하려고 하는 전쟁 중에 요충지중의 요충지였다. 

6. 25때 인민군 부대가 남하할 때 우리 집 안채를 뺏었다고 한다. 태중에 있던 내가 기억할 수 없던 현장이지만 부모님을 통해 누누이 들었던 아픈 이야기다. 마당에서 따발총 수리를 하던 인민군의 오발 총알이 어머니 치마를 스치고 지나가는 일로 내가 태어나지도 못할 뻔 했다는 이야기에 가슴이 멍해진다. 

당시만 해도 이백리는 작은 동네가 아니었다. 예전에는 노란이라는 이름으로 불려졌다. 노란이, 의미를 알아차리기 쉽지 않은 이름이지만 속에 담긴 사연을 듣고 보면 울컥한 이름이다. 말글로 쉽게 풀어보면 노상 난리가 나는 지역이라는 말이다. 6.25때 뿐 아니라 신라 백제 시절에도 지역적인 요충지라 노상 난리가 나서 노란이라고 불려 졌다고 한다. 슬픈 역사가 낳은 이름이다

옥천출신 충남고등학교 졸업생 사진(당시 남녀공학: 앞줄 왼쪽으로부터 9번째)
옥천출신 충남고등학교 졸업생 사진(당시 남녀공학: 앞줄 왼쪽으로부터 9번째)

■ 자전거 통학하던 이백리 이씨네 둘째 

이백리에서 옥천중학교까지 자전거로 통학을 했다. 지금 자가용보다 더 귀한 대접을 받던 자전거다. 온통 비포장 자갈길이라 자전거라도 속도를 낼 수 없는 자전거 통학이었지만 친구들 가방을 실어주고 등교하는 길은 친구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았다. 충남고 2학년 때 자갈길은 포장이 되었지만 그때는 대전가는 통학 열차에 몸을 싣고 등교를 했다. 
옥천 중학교 시절, 읍내에 상설극장이 있었다. 1964년 무렵 학생이 용돈가지고 극장을 가기 어려웠다. 그날은 영화보고 나왔더니 캄캄해졌다. 전화도 없던 시절, 아침에 비가 와서 자전거도 타지 않던 날이다. 집에 가는 길, 삼거리를 지나면서부터 옥죄어 오는 공포에 눈앞이 캄캄했다. 어른들께 들었던 온갖 귀신들이 헛것으로 보였다. 뒷덜미가 쭈뼛해지고 머리카락도 서고 다리는 후들거렸지만 어쨌든 나는 집으로 발길을 떼야 했다. 열네 살의 중학생인 나는 그 밤의 공포를 감당해내기에는 뒷심이 부족했다. 땀을 비 오듯이 흘리며 마을 가까이 갔을 때 숨넘어가기 직전 저 멀리 불빛이 보여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할아버지와 동네 몇 사람이 횃불을 들고 나오며 나를 찾고 있었다. 집에는 무사히 도착했지만 어른들 마음 졸이게 한 값으로 할아버지의 회초리는 면할 수 없었다. 

■ 할아버지의 박애정신은 이웃사랑의 표본으로 내내 회자되었다.

이백리에서 대전을 가려면 탄현고개(마등령)을 넘어야 하는데 당시에는 국도에 다니는 차가 흔치 않았다. 걸어서 다니는 처지라 겨울철 어두워질 무렵이면 험한 고갯길을 넘기 힘든 행인들이 먹고 잘 곳이 없었다. 사람들에게 물어물어 하룻밤 재워달라고 찾아오는 사람들을 할아버지는 마다않고 재워주셨다. 아침까지 먹여 보내기를 다반사로 하셨는데 이가 득실득실한 걸인들이 찾아와도 내치지 않으셨다. 당신이 혈혈단신으로 시작해 일가를 이뤘던 분이라 그 사정을 딱히 여기셨다. 그리고 인격적으로 대우해주셨다. 걸인이라도 상차림을 해서 밥을 주게 하셨고 추울 때는 할아버지 방에서 재워주시는 아량을 베풀어 주신 할아버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이웃사랑의 표본이셨다. 후손된 도리로 허투루 살수 없던 삶의 방식을 유산으로 받았다. 

증약역에서
증약역에서

■ 증약역 6시 30분 통학열차 

내가 다닌 증약초등학교는 지금은 전체 학생이 40여명, 그때는 전교생이 400여명에 달할 정도의 큰 학교였다. 증약(증약찰방역)은 조선시대 문헌만으로도 녹봉 먹는 관리가 400여명 이었을 정도의 요지였다. 이제는 시골의 한가로운 작은 마을이 되었다. 그저 마음의 고향인 초등학교가 교적비만 남기고 폐교의 수순을 밟게 되지 않기를 바랄뿐이다. 

증약 역에서 통학 통근열차가 섰다. 아침저녁에 한 번씩 완행열차는 있지만 6시30분 출근 통학 열차를 타고 학교에 갔다. 기차를 한 번도 놓치지 않은 특급비밀은 기차 화통을 삶아 먹은 소리에 있었다. 그때는 지푸라기를 때서 아궁이에 가마솥 밥을 했던 시절이다. 어머님이 6남매 도시락을 싸느라 새벽부터 종종 걸음을 하셨다. 짚 화력은 세지 않아서 밥은 더디고 빨리 가야 하는데 마음만 바빴다. 뜸이 들지 않은 밥솥을 열어 찬물에 말아서라도 꼭 아침밥을 챙겨 주시던 어머니의 정성에 눈물이 난다.

옥천역에서 증기기관차가 빽 소리 내면 우리는 먹던 밥숟가락을 놓고 증약역까지 뛴다. 소리가 얼마나 큰지 그 소리가 이백리 까지 들린다. 옥천에서 출발해서 기차로 7분정도, 우리 집에서 1.5키로 정도 역까지 뛴다. 7분 정도의 시간에 책가방을 들고 징검다리를 건너 역에 도착한다. 숨을 헐떡거리며 기차에 올라 세천을 지나 대전역에 도착한다. 기차 통학하던 학창시절의 아련한 추억들, 자태 고왔던 여학생은 어떻게 변했을까, 빛바랜 사진속의 풋풋한 정경들이다. 

지오리 강변에서
지오리 강변에서

■ 현역, 화이트칼라의 산업역군으로 한 시대를 건너오다

1970년대 초, 대학졸업 후 화이트칼라의 대명사인 은행에 근무하면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당시만 해도 대기업이 물고를 틀기전이라 은행은 최고의 상종가를 치던 직장이다. 첫 봉급을 받던 날 봉급봉투를 들고 야간열차로 시골 부모님께 달려와 드렸더니 놀라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20년 가까이 공직에 계시던 아버지 봉급보다 더 두툼했었다.

1970년 대 후반 대기업이 산업의 현장에서 급부상하면서 나도 대기업으로 자리를 옮기고 국내 굴지의 대기업에서 종합조정실에 근무하며 그룹의 브레인으로 한 몫을 했다.

대기업의 활약이 나라의 위상을 높이던 때라 개인의 위치였지만 나도 산업 역군으로 역사의 작은 길모퉁이를 돌고 있었다. 노태우 대통령시절 전경련을 통해 정부와 합동으로 부동산 투기를 잡기위한 토지공개념도입 연구를 했던 기억이 새롭다. 대기업 근무 후에 기업도 운영해보면서 한 시대를 치열하게 살아냈다. 산책로 자전거도로가 한창 붐 일 때 종횡무진 활약하면서 전국을 넘나들며 시공하기도 했다. 지난 기억속의 결과물들이 자부심이 되었다. 

내가 누렸던 혜택들이 공짜로 주어진 것은 없었다. 할아버지가 물려주신 정신적 유산은 귀한 손자들도 농사일을 돕도록 했던 가르침에서 나왔다. 학교에서 돌아와 소망태기를 들고 나가 소꼴을 베어오는 일은 우리들이 피할 수 없던 저녁 무렵의 숙제였다. “시골에서 태어났으면 흙을 다룰 줄 알아야 한다”는 가르침에 흠집 나지 않도록 우리는 꾀를 부리지 않았다. 우리는 흙의 자식이고 결국 흙으로 돌아간다. 고향으로 돌아오는 그 길이 망설여지지 않았던 이유 중 으뜸은 할아버지가 물려주신 본성을 놓치지 말자는 결심이었다. 이제 나로부터 시작해 다시 후대로 명맥을 잇게 될 것이다. 고향의 어른으로, 선배로 모범을 보여야 하는 책임감이 배가 되지만 나를 낳아준 고향에 작은 보답이 된다면 기꺼이 그 길에 동참 할 것이다.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저작권자 © 옥천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