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이수암

시는 시인의 생각과 느낌이 정제된 얼굴이다. 시혼이 깃들어 있는 그런 얼굴 말이다. 그러기에 시인은 존경과 숭배의 대상이 되는가 보다.

장계 관광지에 지용상 수상작으로 꾸며진 시비 공원이 조성되었다. 참으로 오랜 바람이 이루어진 것이다. 시성이라 일컬어지는 지용의 고향에 시인의 마을이 생긴 것이다. 얼마나 바랐던 정신문화의 집합체인가? 이를 기획하고 실무를 맡았던 행정당국과 디자인 로커스에 진심으로 감사를 드린다.

애써 이룩한 공원에 이런 저런 이야기로 그 가치를 손상시키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러나 누워 있는 시비를 보고 세워져 있는 시비였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이 이 글을 쓰게 한다. 호수가의 아름다운 경관과 조화를 이루는 예술적 디자인이라고 하지만 사비는 세워져야 한다는 보수적 관념이 누워있는 시비만이 자연과의 조화나 예술적 가치를 극대화시킨다고는 이해되지 않는다. 누워있는 시비, 그것도 석재로 쓰고 남은 자투리 돌 조각에 징검다리 모양으로 배열된 시비를 보니 누워서 울고 있는 시혼들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징검다리 뛰어 넘고 즐거워하는 개구쟁이 동안의 환한 모습도 보인다. 이곳을 찾는 산책객들이 아른 다리를 쉬려고 털석 주저앉을 의자로 전락할까 두렵다. 존귀한 시혼들이 아이들의 흙 묻은 발자국에 얼룩지고 산과 호수를 내려다보는 디딤돌로 이용되지 않기를 바란다.

불상은 부처님의 상징이다. 불상 앞에 앉아 경배하고 기도하며 부처님의 가호를 빈다. 사람들은 불상을 통해 부처님과 만나고 그 영험함을 경험한다. 시비는 시인의 상징이다. 비록 움직이지 못하고 서 있는 돌이지만 불상을 보듯 하나의 존귀한 인격체로 보아야 할 것이다.

시비도 예술품 일진대 그 형상의 아름다움은 물론 새겨진 시의 내용들이 독자들에게 잘 전달되어야 할 터인데 아름다운 서체로 읽을 수 없는 난필로 새겨진 것은 너무 아쉽다. 그 멋스러움을 시인의 자필이라고 변명은 하지만 조금만 성의 있게 교정을 보았더라면 정말 아름다운 시비가 되었을 텐데˙˙˙˙˙˙. 

이 공원의 중심은 시비 밀접 지역이다. 정말 아늑한 자리에 옆으로 세워진 전체의 모양은 아름다움의 극치이다. 멀리서 보아도 호기심을 발동하게 하는 아름다운 구조물이다. 그러나 시비와 시비 사이가 너무 밀착되어 개별성이 고려되지 않은 것이 험이다.

시비의 내용을 읽으려면 들여다보아야 하고, 시인이 자기 시비 앞에서 사진 한 장 찍고 싶어도 크게 불편을 느끼게 된다.

돌비는 영구불망의 의미가 강하다. 철판, 유리, 합성수지 등의 다양한 소재를 통하여 여러 가지 가능성을 보여 준 것은 참으로 칭찬할 일이다. 사각 유리에 시를 부식시키고, 사각 철판에, 사각 수지에 시를 쓰고 사각 일색의 단순한 디자인은 제작의 편리만 지극히 강조된 인상이다. 특히 노간주나무를 유리장막으로 가두어 놓고 그 유리판에 시를 새겨놓은 발상은 어떤 예술성의 표현인지는 몰라도 자연친화적이 아닌 훼손의 의미가 강하게 느껴진다. 가슴이 갑갑해진다.

영구성이 강조되는 비의 의미에도 문제가 있다. 합성수지의 시비가 그 모양을 온전히 유지하며 얼마나 버티어 줄 것인지? 녹슨 철판의 아름다움이 얼마나 유지될는지? 검은 철판 위에 붙여진 하얀 글자들이 내리쬐는 햇볕과 풍우에 잘 붙어 있을 것인지? 너무나 걱정스럽다.

발상의 전환을 통한 여러 가지 시도는 용기 있는 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엉뚱한 자판이 새로운 바람을 불어온다는 말은 창조성이나 예술성은 지극히 강조되었으나 현실적인 부적응이 전제되어 있다. 시비 공원의 조성은 현실적 사고의 바탕위에, 그럼 사람들을 우선 대상으로 세워져야 한다고 본다. 그러기에. 누워 우는 시혼의 처참은 모습이 예술적 가치로 평가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저작권자 © 옥천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