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도형 (옥천읍 교동리)

◯ 이여송의 말을 묻었다는 말무덤

동이면 석탄리에는 커다란 흙무덤이 있었는데 예부터 “말무덤”이라고 전해온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왜병들이 침입하여 무고한 백성을 죽이고 괴롭힘을 당하였다. 우리나라는 사전준비도 없었고 국방력도 그리 튼튼하지 못한 상태에서 당한 전란이라 당황하였고 그 피해는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그래서 조정에서는 당시 명나라에 원군을 청하게 되었고 이여송 장군이 이끄는 명나라 원병이 와서 도와준 일이 있었다.

명나라 지원군은 우리나라를 도와 왜군을 치는데 공을 세우기도 했으나 한편으로는 교만한 점도 있었다. 당시 우리나라는 어려운 처지에 있었고 국력도 명나라에 비하면 약하였다. 때문에 이른바 대국(때국 놈의 유래)에서 온 지원군이라고 뽐내는 꼴이란 목불인견(目不忍見)이었다. 국방을 튼튼히 하고 국력을 길렀더라면 왜 이런 아니꼬운 일을 당하였겠는가? 유비무환(有備無患)이란 말이 있듯이 미리 대비하지 못한 결과다.

어느 날 이여송이 이곳 옥천을 지나게 되었다. 금강을 건너 피실을 지나다가 산세의 수려함과 지기가 성함을 보고 시기심이 났다. 그는 면소골 산 정상에 지기를 끊는 쇠말뚝을 두드려 박고는 신이 나서 자기 애마(愛馬)의 날램을 시험하기 시작하였다. 즉 이여송은 자기 말을 타고 달리고 부장을 시켜 말이 출발함과 동시에 화살을 쏘게 하여 쏜 화살의 빠르기와 자기가 탄 말의 속력을 겨룬다는 것이다.

이 기이한 겨루기가 시작되고 이여송은 말을 달려 이 말무덤까지 왔다. 그러나 화살이 나르는 방향이 잘못되었는지 화살을 놓치고 말았다. 이여송은 분노가 치받쳐서 말에서 내려 자기 애마의 목을 단칼에 쳐 죽이고 말았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화살이 휙 날아와 박히는 것이었다.

“아차 내 말이 화살보다 먼저 왔는데 죽였구나. 아! 내가 경솔했다.” 말이 화살보다 빨리 달릴 수 있는 것인지 또는 부장이 화살 하나를 더 쏘아서 이여송의 환심을 사려고 한 짓인지는 알 길이 없다. 다만 천하의 명마를 경솔히 죽인 아까움과 후회로 이여송은 말의 무덤을 그곳에다 만들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이 고장 주민들을 부역시켜 산더미만한 흙무덤을 만들게 했다고 한다.

당시 명나라 원군이 오죽이나 아니꼽게 굴고 또 잘난 체 했으면 이러한 전설이 생겼을까? 

참고로 이여송은 조선계이며 본관은 성주이씨이다. 한편, 이여송은 조선에 주둔 중일 때 한 무명(無名)의 조선 여인을 통해 아들을 낳았는데 현재 경상남도 거제시에 그 후손들이 살고 있다고 한다. 

▶ 오대리

오대리는 본래 오리티와 유포(버들개)를 합하여 이루어진 마을이다. 1990년 주민편의를 위해 안남면에서 옥천읍으로 편입되었는데 수몰 전에는 100가구 이상이 살았으나 대청댐 수몰로 인해 여울이 사라져 배가 없으면 나올 수 없는 육지 속에 섬이 된 마을이다.
오리티마을 앞에는 시부모님을 극진히 모시고, 자신의 손가락까지 잘라 남편을 살리려 했던 조유원의 처 옥천육씨 효열문이 있다.

◉ 유복자를 훌륭히 키워 낸 조유원의 처 옥천육씨

옥천읍 오대리 마을 앞 대청호가 내려다보이는 아담한 언덕 위에 효열문이 있다. 이는 창령조씨 조유원의 아내 옥천육씨의 거룩한 행실을 널리 알리고 후세에 전하고자 그의 8세손 조상빈이 주동하여 1846년에 목조 2평 정도의 효열문을 창령조씨 문중에서 세웠다.

육씨 부인은 참봉 육윤중의 딸로 성장하여 창령조씨 가문인 조유원에게 시집을 갔다. 그는 시집을 와서 보니 시집 형편이 아침, 저녁 끼니를 걱정할 정도로 가난하였다.

육씨 자신이 직접 길쌈을 하거나 품팔이를 하여 곡식도 구하고 집안도 이끌어나가야 했다. 이렇게 사는 동안 시부모 봉양을 최우선으로 하여 극진히 효행으로 모셨다.

이렇듯 비록 가난은 하였지만 정이 깊이 들었던 시부모가 차례로 돌아가시자 마음속에서 울어 나오는 통곡을 하니 이를 보는 모든 이웃 사람들이 감동하였다. 그 후 시부모가 돌아가신지 얼마 안 돼 남편이 우연히 병을 얻어 자리에 눕게 되었다.

이에 백방으로 약을 구해다가 밤낮으로 병간호를 하였으나 효험도 없이 운명 직전에 이르는 위급한 지경에 이르렀다. 

이때 육씨 부인은 자기 손가락을 손수 잘라서 생피를 내어 남편에게 먹었다. 그로 인하여 10여일 더 살다가 결국은 죽고 말았다. 육씨 부인은 이때 나이 겨우 19살이었다. 남편의 장례를 치루고 즉시 남편의 뒤를 따라서 죽으려 하였다. 사실은 남편이 죽자 즉시 따라서 죽으려고 하였으나 장례를 치르고 나서 죽는 것이 도리라 생각하여 그리한 것이다.

이러한 딸의 마음을 미리 알아차린 친정아버지 육참봉은 딸의 순절을 막기 위하여 주야로 딸의 곁에서 떠나지 않았다고 한다. 즉 옆에 붙어 있으면서 딸에게 죽을 기회를 주지 않고 만류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지내기를 여러 날 마침내 육씨 부인의 몸에 태기가 있어 이로 인하여 죽기를 미루고 산월을 기다리게 되었다. 이윽고 아들을 낳아서 절개를 지키면서 아들 양육에 심혈을 기울여서 훌륭하게 성장시켰다.

많이 가르치고 정들여 키운 보람이 있어 집안 경제사정도 호전시켰고 집안이 행복하게 살게 되었다. 남편을 따라 죽지 않고 살아서 아들도 낳고 유복자를 키워서 집안의 대를 잇고 가문을 융성시킨 것이다.

그 후 육씨 부인은 손자를 셋이나 보았고 그 후손들이 대를 이어 효행을 하는 모범적인 집안이 되었다. 육씨 부인의 이러한 지극한 효성과 고고한 정절 그리고 자식 교육을 위한 열성 또한 거룩한 인고의 일생을 널리 알리고자 후세에 전하여 귀감이 되게 하기 위하여 그의 후손들이 효열문을 세우니 그 편액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여 전하고 있다.

“열부 창령조공 유원 처 옥천육씨 지려”

◯ 보내

보내는 강가에 있는 마을이라 “포내”라 부르다가 한자화 되어 “보내”로 부르게 되었다.

◯ 물비늘전망대

이원면 칠방리로 옮기기 전에는 옥천군 상수도취수탑 이었고 정수장 및 가압장은 옥천읍 교동리 나부티 부근에 옥천정수장을 만들어 옥천읍내에 수돗물을 공급하였다. 

금강에 대청호가 건설되면서 그대로 사용되다가 1990년대 더 좋은 수돗물 공급을 위하여 이원면 칠방리 금강으로 취수장과 정수장을 확장 이전하여 양질의 수돗물을 공급하고 있다.

물비늘은 햇살에 빤짝이는 잔물결을 말하며, 윤슬은 햇빛이나 달빛에 반짝이는 잔물결이라는 순우리말입니다.

- 가랜여울(옛 옥천취수탑, 물비늘전망대)

옛날에는 물레방아가 있었다고 한다. 오리티 강변에는 자갈이 많아 해방 전후 추수가 끝나면 오리티 텃골(대곡)사람들이 가마니에 자갈과 흙을 채워 징검다리를 만들었는데 비가 많이 오면 떠내려가 해마다 다시 만들었다한다. 오대리 사람들의 논밭은 수북리와 남곡리 쪽에 많았는데 추수를 하면 소들이 가랜여울을 건너 마을로 곡식을 운반했다고 한다.

- 이곳이 동정자가 있었던 터인데 참고로 조선시대는 대·중·소로 상에 10리마다 정자를 세우고 30리마다 누각을 세워 여행객들이 쉬어가거나 주변의 좋은 풍광을 탐방할 수 있게 했다.  

관아가 있었던 구읍에서 보아 동쪽에 정자가 있는 마을이라 “동정리”라 부르고, 서정리는 서쪽에 정자가 있는 마을이라 하여 “서정리”라 부르고 있다.

이 동정자는 푸른 금강 물길이 십 여리 달려와 오리티 강여울이 굽이치는 곳으로 강과 산이 조화를 이룬 아름다운 절경지이다. 오리티 나루터 바로 위편 강기슭에 위치하여 길손과 묵객들이 걸음을 멈추고 이곳에 올라 금강에 명승을 노래했다 한다. 한편 옥천 구읍 관아에서 서쪽인 옥천읍 서정리 서정자는 조선중기 찰방(종6품)을 지낸 안사전 선생이 세웠다고 한다.

동정자는 강릉판관과 선천부사를 지낸 유경 공이 건립한 것으로 추정하며 2009년 중원문화재연구소에서 서정자와 함께 1차 발굴조사를 하여 기와 편 등을 수습하였다.

◯ 마성산

마성산은 별모양을 닮았다고 하여 노성산인데 언제부터인지 마성산으로 부르고 있는데 옥천향교 중수기에도 노성산으로 나오고 있다.

옛 지도에는 교동저수지 동쪽 일자산을 “마성산자지륵뢰(馬城山自智勒耒)”라고 표기되어 있는데 조선후기까지 옥천군이었던 영동군 양산면에 있는 천태산이 “지륵산”으로 불렀던 것으로 보아 지륵산(천태산)과 맥을 같이하여 마성산을 “마성산자지륵뢰”라고 표기한 것 같다.

조선시대 옥천 관아의 진산(鎭山)아래 교육기관인 옥천향교가 있다. 조선시대 초기까지 옥천고을의 평안을 기원하는 마조제(馬祖祭)를 매년 정월대보름날 지냈다고 한다. 이에 옥주문화동호회에서 발굴, 계승하여 마조제를 올리고 있다.

수북리(꾀꼬리)사람들은 마성산이 별모양을 닮았다고 “노성산”이라고 부르고 산에 꽃이 많다고 하여 “메나리봉(山有花 산유화)”이라고도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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