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임(1941년생, 81세)

거울 앞에서 미소 한 번 지어준다. ‘아직 예쁘네’.
앞 태 옆 태 돌려보며 차림새 점검을 하고 복지관 스쿨버스를 탄다.
8시40분, 요이 땅! 하루가 시작됐다. 9시에 복지관에 도착해서 이름처럼 희망을 담아 ‘희망세탁소’의 문을 연다. 소읍에 사는 사람들에게도 셔틀버스까지 대령해서 배울 거리를 맘껏 제공해주는 복지관이 요모조모 효자노릇을 톡톡히 한다. 17년 차 되니 모두 다 친구고 언니고 동생이다. 나도 전생에 나라를 구했는지 타향에서 이렇게 끈끈하게 형제들을 만났다. 나는 최고 동안으로 복지관 친우들이 이구동성으로 부러워한다. 잔머리 안 굴리고 우직하게 봉사를 해서 그렇다고들 하는데, 때론 나도 부처님의 온화한 염화미소를 닮고 싶구나. 

■ 남편의 월급 덕에 자식들 잘 가르쳤다. 

경상도 문경 점촌에서 오빠 언니 그리고 내가 쫑말이로 태어났다. 점촌에서 20살에 6살 더 먹은 총각 김명중씨와 결혼했다. 엄마의 육촌동생이 우리의 중신애비이셨다. 그때 명중씨는 중학교를 졸업한 후에 대전에 있는 동광농약에 다니고 있었다. 남편과 나는 둘 다 같은 점촌 태생으로 양가 집안 역시 먹고 살만 했다. 4남매 중 막내며느리로 시집을 갔지만 아무도 안 모신다고 해서 내가 모시고 결국 어머니 마지막 가시는 길 임종도 지켜봤다. 큰아들 밑으로 딸 셋을 낳고 꼬물거리는 애들 데리고 대전 도마동으로 이사했다. 공장은 정림동에 있었는데 남편은 정년퇴직할 때까지 다니며 월급 또박또박 잘 나와서 좋았다. 

큰아들과 딸 셋 모두 다 효자 효녀이다. 자녀들 모두 대학 졸업까지 시킬 수 있었던 것은 따박따박 나오는 남편의 월급 덕분이었다. 그래서 나는 무탈하게 살아왔고 모든 기초를 세워 준 남편에게 감사 또 감사한 마음뿐이다. 나 역시 점촌의 딸로서 부지런함이 나의 천성이었는지라 가정경제에 도움이 되기 위해 아모레 화장품 방문판매를 했다. 그래도 막내를 초등학교에 보내고 시작했다. 5년 동안 가가호호 방문판매를 하였는데, 어쩔 수 없이 외상을 깔 수밖에 없다. 그 시절 화장품 방판사원은 얼굴도 예쁘고 매너도 좋아야 했다. 나도 차리고 나가면 꿀리지 않는 외모라 집집마다 방문하면서 제법 인기도 좋았다. 네모난 화장품 가방을 들고 첫 집을 방문한 날은 가슴이 콩닥거렸다. 가방 안에 한가득 들어찬 화장품에 주부들 눈길이 모일 때는 매상이 얼마나 올려 질까 설렘 반 기대 반이었다. 좋은 일만 있을 수 없어서 직업여성들이 외상을 달아놓고 어디론가 가버리면 미수금으로 돈을 뜯긴 적도 여러 번이다. 잠시 속상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고, 그래도 젊은 아가씨들이 나중에라도 행복하게 살기를 바랬다. 

큰아들은 옥천에서 중장비 사업가이고, 큰딸은 백화점에서 근무하고 있다. 둘째딸은 대전에서 마사지 사업을 하고 막내딸은 네일아트 대표이다. 이젠 걱정근심은 없고, 못해본 것에 한이 맺힐 것도 없어서 정작 하고 싶은 것도 별로 없다. 꽃같이 예쁜 내 딸들이 서로 경쟁하듯 나에게 싹싹하게 애교를 부린다. 옷이나 신발 그리고 화장품 하다못해 주방에 수세미까지 다 사다 바치니 차고 넘친다. 내 몸만 건강하다면 얼마든지 봉사하며 하루하루 기쁘고 행복하게 즐겁게 살 수 있다.

■ 나는 희망세탁소 최고 고참이다

내 나이 64살에 옥천에 왔는데 복지관이 생긴지 1년 만에 들어갔다. 그냥 막연히 봉사를 하고 싶었다. 옥천에 오니 사람 구경을 하려면 복지관으로 가보라는 소리를 들었다. 처음에는 컴퓨터, 웃음치료, 노래교실을 다니다 봉사교육을 받게 되었다. 띠를 두르고 어디를 가는 ‘수호천사’들을 보며 봉사에 눈을 떴다. 독거노인과 장애우 목욕 봉사를 했는데, 드럼세탁기를 가져다 놓고 봉사할 사람을 구했다. 신관장이 있을 때 시작했는데 나는 일자리 봉사도 모르고 오로지 지하 2층에서 3년 동안 빨래만 했다. 나는 지하실에서 봉사하다보니 복지관에서 『희망세탁소』 간판을 붙여놓고 노인일자리사업으로 확대되었다. 그래서 얼떨결에 나도 일자리를 얻게 되었다. 복지관에 “희망세탁소”라고 장애우들 위한 빨래방을 17년째 운영책임을 맡고 있다.

나 혼자 붙박이고 3명이 번갈아 취업을 했다. 일자리를 새로 신청하다 보면 연임할 수 있다. 일주일씩 번갈아 2명이 9시~ 12시까지 15시간 일하고 27만 원 귀하게 벌어서 고맙기 그지없다. 빨랫감은 직원들과 돌보미 천사들이 가지고 온다. 매일 빨래를 3통을 해서 3번 건조기에서 나오면 착착 엣지있게 각을 잡아서 개 놓으면 속이 얼마나 개운한지 모른다. 그리고 매주 화요일 1시에 장애우 여성모임을 갖는다. 혈압 때문에 왼쪽 눈에 핏줄이 터져서 실명이 되어서 시각장애인 6급을 받았다. 장애등급을 받을 줄 몰랐는데 옥천에 들어와서 등급을 받은 지 8년 됐다. 수요일 오전에는 항공(전자 다트)을 던져서 목표를 맞추는 게임인데 대회에 나가기까지 했다. 

■ 내 힘으로만 살아낸 것이 아니었다. 

내가 세 딸내미 덕에 70살에 옥천 “명가”에서 신식 결혼을 다시 했다. 그래서 딸들이 좋은가 보다. 쑥스러워서 안 하려고 했는데 하도 성화를 부려서 리마인드웨딩이라는 것을 했다. 화장을 하고 웨딩드레스를 입었다. 거울 속에 우리 부부의 모습이 잠시 낯설었지만 사진에 담긴 남편은 먼 길 떠난 지 오래지만 내내 환하게 웃고 있다. 남편은 리마인드웨딩 후에 감기를 오래 앓았는데 건양대병원에서 폐렴으로 돌아가셨다. 남편의 49제를 한 인연으로 옥천 체육센터 곁에 송림사라는 절을 다니고 있다.

처음에 옥천 향수아파트에서 9년 살다가 옥향아파트로 이사했다. 2020년도에 큰딸네 집에 가서 저녁 식사 후에 샤워하고 누워있으니 가슴 어디에가 맞히는 게 느껴졌다. 덩어리가 만져져서 꾸욱 누르니 조금 아프다. 딸에게 말했더니 “엄마 아프면 암 아니야” 딸네 동네에 큰 병원에 가서 조직검사를 했더니 충대로 가보라고 권유받았다. 그래서 나는 “암이면 어떠냐? 걱정하지 마라.” 하고 나는 이내 잠이 들었다. 

큰딸은 걱정이 되는지 밤새 눈이 퉁퉁 붓도록 울었다고 하더라. 결과를 보러가니 상피내암(초기 유방암 0기)으로 나와서 수술을 했다. 상피내암은 부분절제로 완치상태인데 임파선으로 전이될까 봐 제일 먼저 임파선을 뗀다. 상피내암은 0기로서 암으로 가는 첫 중간과정에서 발견됐으니 다행이다. 대전에서 수술을 마치고 큰딸 집에서 머물며 방사선 치료를 7주 동안 다녔다. 모든 과정이 끝나고 옥향아파트에 돌아오니 이웃들이 내가 이사 간 줄 알고 서운했는데, 다시 돌아왔다고 어찌나 반색을 해주는 지 큰 힘이 됐다. 

이제껏 살고 보니 내 힘으로만 살아낸 것이 아니었다. 멀리 보이는 산자락에 피어난 매화나무가 저 혼자 자라지는 않았을 게다.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내려주는 햇살에 움이 트고 싹이 돋고 내리는 빗방울에 살이 찌며 마디가 굵어지고 꽃을 피우고 가지는 하늘 높이 뻗어 오른다. 공평한 하느님과 부처님의 손길이 빠짐없이 구석구석 이 세상의 모든 생명에게 차별없이 은혜를 베푼 까닭이다. 우리 인생도 그렇게 보이는 손길과 보이지 않는 손길들이 두루두루 연결되어서 살만한 것이다. 억겁을 통한 인연으로 만난 귀한 친우 사이이니 그저 감사함에 믹스 커피 한 잔 쏘겠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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