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홍용 안남 화인산림욕장 대표

세계에서 전쟁을 제일 잘 하는 나라는 미국이고, 전투를 제일 잘 하는 나라는 베트남 이라고 한다.

또한 세계에서 무기를 제일 잘 만드는 나라는 미국이고, 무기를 제일 잘 다루는 나라는 베트남이란 우스개 아닌 정설로 세계인에 각인되어 왔다.

그 증거로 세계 최강의 미국을 이기고, 프랑스를 항복 시킨데다 중국군을 몇번이나 퇴각시켜 얼씬도 못하게 한 전력이 있기 때문이다.

필자는 말레이시아에서 수입해 오던 피아노용과 가구용 고무나무를 인건비 상승으로 보다 인건비가 저렴한 베트남으로 2007년 7월 수입선을 바꾸었다.

호치민시에서 북동쪽으로 약 30km 떨어진 가구단지가 조성된 비엔호아(Bien Hoa)지역으로 옮겼다.

근처에 호텔 이름이 기억하기 쉬운 “사이곤 호텔(Saigon hotel)” 이라서 단골로 삼아 수년간 다니며 수입 알선을 했다.

이곳은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군 최대의 기지로, 주월미사령부 및 비엔호아 미공군기지가 있던 곳이다.

어느날 대만(Taiwan) 거래처인 에드워드 린 사장이 현지인을 대동하고 와 꾸찌터널이 얼마 멀지 않으니 안내해 주겠단다.

미군기지 바로 발밑에 장장 200 여km나 되는 터널이 마치 거미줄 처럼 얼키고설키게 하고, 위장의 달인들인 베트콩의 위장술에 미군당국은 발견도 못하다가 전쟁이 끝난 후에야 비로소 실체를 알고 경악했다고 한다. 지금은 120km만 남아 있어 관광자원으로 활용하고 있었다.

터널 안에는 병원, 발전소, 우물, 회의실, 식당, 무기고, 공동침실까지 완비된 난공불락의 요새로 만들어 놓았다.

입구는 성인 남자가 겨우 비집고 들어갈 정도이나 안으로 들어 갈수록 넓고 미로로 여러 곳으로 연결 되어 있었다.

처음에는 열대 특유의 습하고 더운 열기로 숨이 막히고 땀이 비오듯 했지만, 안으로 깊이 들어가니 시원하여 견딜만 했다.

그러나 이 터널을 판 노동력과 열의가 너무나 대단하여 숙연해지고 가슴이 미어왔다.

정글속 위장 통로를 이용하여 시도때도 없이 번개처럼 나타나 일격을 가하고 바람처럼 사라지는 전술에 미군은 손도 쓸새 없이 일방적으로 당하기 일쑤였다. 그 대표적인 것이 쩐반짜 사령관의 지휘아래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의 합작으로 실시된 1968년 1월 구정 대공세 였다.

자고로 동양인들은 땅굴 파기에 능하고, 서양인들은 우세한 무기를 앞세워 물량전으로 승부를 걸었다.

필자는 여행과 역사에 남다른 취미가 있는데다, 직업상 나무수입 관계로 태평양 열대우림지역과 아열대지역 섬들을 다니면서 태평양의 여러 격전지를 직접 보고 관찰할 기회가 많았다.

싱가포로의 센토사섬의 포대시설은 물론 박물관에 밀납인형으로 전시된 야마시타 장군이 퍼시발 영국군 사령관에게 항복에 “Yes 아니면 No”를 택해 답하라고 거만하게 겁박하는 모습은 보는 이를 분노케 한다.

일본군의 석유선점이 된 수마트라의 팔렘방(Palembang)유전, 보르네오(현:카리만탄섬)의 바리크파탄 유전, 술라웨시섬(셀레베스섬)의 유전지대도 답사해 보았다.

일본군과 미군이 사활을 걸었던 과달카날(Guadalcanal)섬에서 그날의 함성도 들을 수 있었고, 솔로몬제도의 해전의 잔해도 생생히 볼 수 있었다.

필리핀의 레이테섬과 마닐라 근교의 “죽음의 바탄 행진”의 현장을 비롯한 포로수용소 자리도 가 보았다.

북 마리아 제도의 괌전투로 유명한 괌섬,히로시마·나가사키 원폭투하 B-29 발진기지인 티니안섬, 반자이(만세) 절벽으로 더 잘 알려진 사이판섬도 몇차례씩 갈 기회가 있었다.

세계 3대 격전지로 이름을 올리고 성조기 게양 사진으로 유명해진 이오지마섬(硫黃島), 미군을 81일간이나 발을 묶어 두면서 카미카제 특공전을 벌였던 태평양의 최대 격전지인 오키나와는 거의 매년 가는 곳이다. 이오지마와 오키나와는 땅굴작전으로 미군의 희생을 강요한 악명 높은 곳이다.

연합군의 폭격으로 폭삭 주저앉은 이태리의 몬테 카시노(Monte Cassino) 수도원, 오디 머피(이등병에서 중령으로 진급하기 까지 혼자서 적군을 640 여명을 사살한 명사수로 미군 사상 최다 훈장을 받고, 제대후 배우로 서부영화 33편에 출연. 자서전격인  ‘To Hell and Back(지옥의 전선)’은 영화화 되었다.)의 신화의 서막을 올린 안치오(Anzio) 전투 현장과 시실리섬의 팔레르모(Palermo)에서 패튼 장군의 발자취도 더듬어 보았다.

아이젠하워를 영웅으로 만든 프랑스의 노르망디(Normandie) 해안에서 그날의 포성을 들을 수 있었고, 덩케르크(Dunkelque)에서 연합군의 긴박한 철수의 절규도 들을 수 있었다.

독일 코블렌츠에서 본(Bonn)행 기차를 탔다가 기차가 정차한 역을 무심코 보니 “레마겐(Remagen)”역이었다.

전기에 감전된 사람처럼 카메라를 들고 급히 뛰어 내려서 이곳 저곳 철교를 촬영 하고 영화로 보았던 “레마겐의 철교”의 각 장면을 회상해 보았다.

너무나 오랫동안 레마겐에서 지체하여 본에서 짐을 찾느라고 몇시간 수고를 했다.

베트남군은 1954년 라오스로 가는 군사요충지인 디엔비엔푸(Dien Bien Phu)에서 땅굴작전으로 프랑스군을 항복 시키고, 1968년 17도선 DMZ 바로남쪽 케산(Khesanh)에서 땅굴작전으로 무려 6개월간 미해병대와 공방전을 벌였다. 그러나 미해병대는 우리는 프랑스와 다르고 제2의 디엔비엔푸를 기대 말라며 막강한 공군력을 동원하여 유유히 명예로운 철수를 한다.  6.25 때 주일 미군 기지에서 출격한 폭격기들이 귀환 하면서 남은 폭탄을 연습용으로 애꿎은 독도에 투하하여 지금도 독도는 탄흔 투성이다. 우리의 독도 처럼 북폭에 나선 미군기들이 귀로에 잔여 폭탄을 연습용으로 투하한 곳이 석회암지대인 빈목마을이다.

빈목터널이 자리한 곳은 베트남의 17도선 DMZ 바로 위의 벤하이강 근처에 있다. 연일 퍼붓는 폭탄에 견디다 못한 주민들이 1965년부터 1972년에 이르기까지 깊이 30m 땅굴을 파고 60 여가구가 공동 우물, 각 가구 거주방, 유치원, 진료소, 심지어 조산원 까지 설치하여 살며 아닌 밤중에 홍두깨를 피해 오면서 그간 아이들이 19명이나 태어났었다고 했다.

필자가 베트남의 고도(古都) 후에(Hue)를 관광하고 디엔비엔푸와 케산, 빈목터널을 보고 느낀 것은 인명을 무시한 땅굴작전은 너무나 많은 대가를 요한다는 것이었다.

꾸찌터널을 보면 미국이 진 이유를 잘 알 수 있는데, 우리도 각처에서 우리 발밑으로 야금야금 파내려오는 대남 땅굴에서 자유로울 수 없어 유비무환 정신이 절실함은 필자만의 기우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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