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서연 (옥천읍 장야리)

딸아이는 긴 치마를 참 좋아한다. 그 중에도 발목까지 내려와서, 계단이라도 오를라치면 꼭 밟히고 마는 아주 기인 치마를 좋아한다. 그 좋아하는 놀이터며 키즈카페에 갈 때도, 어린이집에서 야외활동을 해야 할 때도 고집을 꺾지 않는다.

"하운아. 뛰고 놀 때는 긴 치마가 자꾸 밟혀. 그러면 하운이도 넘어질 수 있고, 하운이가 좋아하는 치마가 더러워지고 찢어지게 돼. 오늘같은 날은 짧은 치마를 입자."

한참 동안 진땀을 빼다가, 결국에는 이 긴 치마의 안위가 위협받는다는 사실을 일깨워줘야만 한발 물러서는 것이다.

"하운아, 하운이는 왜 긴 치마를 좋아해?"

"친구들이 긴 치마를 입어야 예쁘다고 해."

"하운이 옷인데 왜 친구들이 좋아하는 걸 입으려고 해?"

"친구들이 예쁘다고 해 주는 게 좋아. 짧은 치마나 바지 입으면 선생님이랑 친구들이 밉다고 해."

말은 잘도 하지만 친구들이, 특히나 선생님("어머니, 긴 치마는 활동하기에 불편해서요. 활동 있는 날은 되도록 바지 입혀서 보내주세요.")이 그런 말씀을 하실 리 없다. 이것은 순전히 본인의 선택에 대한 책임을 미루는 것이다. 그래도 어물쩡 넘어가준다.

"엄마도 맨날 긴 치마 입으면서 왜 나는 못 입게 해?"

나도 집에서 긴 고무줄치마를 즐겨 입기 때문이다. 어쩌면 자꾸 긴 치마를 입겠다는 것도 나 때문일지 모른다.

고무줄치마가 잠옷이나 일상복으로 여간 편한 게 아니다. 맵시를 신경쓸 필요도 없거니와 적당히 몸만 끼워 넣으면 되니 입기도 쉽다. 내가 입는 긴 치마는 꾸밈없는, 편안한, 일상, 이런 단어들에 더 가까웠다.

아이는 나와 정반대다. 자기는 '공주님 같은' 긴 치마를 입겠단다. 반짝이 구두와 드레스를 어찌나 좋아하는지. 딱 요맘때 여자아이들이 다 거쳐가는 시기지만, 이놈의 공주병이 끝나기는 할까 싶다.

긴 치마면 무조건 좋다면서도 정작 그 긴 치마를 입는 제 엄마한테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 엄마가 공주님같이 하고 다니면 좋겠어."

나는 "엄마는 지금도 공주보다 예쁘거든?" 하고 너스레를 떨지만, 요 작은 '공주 심사위원'은 그냥 넘어가주는 법이 없다.

"엄마는 뾰족구두도 안 신고 입술도 안 빨갛잖아."

"그래? 엄마가 화장도 하고, 예쁘게 다니면 좋겠어?"

"응."

"그렇게 하면 엄마 뽀뽀 많이 해줄 거야?"

"응. 백 번!"

그러면 귀가 얇은 엄마는 미용실이라도 가야 하나, 또 고민하는 것이다.

내가 언제부터 '예쁜 공주님'을 싫어했더라? 분명 대학 새내기 때는 화장도 하고 예쁜 옷도 입었었다. 동기들이 방학마다 한 단계씩 진화한 모습으로 돌아오는 것과는 달리, 나는 한 학기만에 열의를 잃어버렸다. 그야 당연히 예쁘면 좋지만, 예쁨에 비례하는 불편함이 그보다 더 싫었기 때문이었다.

치마와 머리카락은 바람에 날린다. 화장은 자꾸만 여기저기 묻어나고 지워진다. 앉고 일어날 때마다 자세와 맵시에도 신경써야 한다. 아니 매번 손빨래를 해야 하는 옷이 있다고? 이건 매번 드라이를 맡겨? 수정화장? 화장은 아침에 한 번 하는 거 아냐? 나는 특별히 내면을 가꾸지도 않으면서 외모에 신경쓸 줄은 더더욱 몰랐다. 그래서 아예 내려놔버렸다. 페미니즘이니 하는 데에는 관심이 없었지만, 아마 사람들은 내가 운동가인가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학생일 때에야 교복이 있었고, 나 스스로도 옷에 관심이 없는 데다 심지어 고등학교 때까지 내 옷은 거진 물려받은 것들이었다. 금방금방 크는 초등학생 때는 말할 것도 없다.

그래도 그때까지는 아직 예쁜 옷에 대한 열망이 있었다. 나는 엄마에게 항상 망토를 사달라고 졸랐다. 동화 속 공주님들이 나들이 갈 때 꼭 망토를 입었기 때문이다. 하나쯤 사줄 법도 한데, 엄마는 어쩐지 결코 지갑을 열지 않았다.

결국 망토가 어울리지 않을 나이가 됐다 싶었던 내가 먼저 포기했으니 엄마가 이긴 셈이다.

아이가 옷투정을 한다는 얘기만 나오면 엄마는 핀잔을 놓는다.

"너희가 애한테 너무 선택권을 줘서 그렇지. 맨날 이거 할래 저거 할래 물어보고. 엄마는 너희 그렇게 안 키웠어. 그냥 이거 입어라 하고 줬지."

나는 그렇게 입은 옷이 맘에 든 기억은 딱히 없다. 오히려 '나도 친구들처럼 예쁜 옷을 입고 싶다'고 생각했었다.

할머니댁에 놀러 가면 사촌언니가 작아서 못 입는 원피스를 빌려줬다. 나에겐 발등을 다 덮을 정도로 긴 옷이었다.

할머니댁에만 가면 그 옷으로 갈아입고 사뿐사뿐 걷고는 했다. 현관에서 엄마의 구두도 발에 꿰어보고, 한바퀴 빙글 돌아보고... 집에 갈 때는 못내 아쉬워 옷걸이에 걸린 그 옷을 몇 번이나 돌아봤다.

엄마가 구두를 살 때, 내 사이즈가 있다는 걸 귀신같이 알고는 내 것도 사달라고 한 적도 있었다.

"어린애들은 이런 거 신는 거 아냐."

"친구들도 뾰족구두같이 생긴 거 있단 말이야. 이거 봐, 굽 낮은 것도 있다잖아. 3cm면 겨우 요만큼인데. 엄마랑 커플로 신을래. 응?"

엄마는 그 구두 대신에 당시 유행하던 젤리슈즈를 사줬다. 발에 잘 맞지 않았는지 재질 때문인지, 발이 온통 죄어서 물집이 잡혔다.

"거봐, 엄마 말이 맞지? 그런 건 불편하다고 했잖아."

그래도 그때의 나는 그 불편한 신발이나마 열심히 신고 다녔다.

도둑질도 해본 놈이나 한다고, 교복을 입으면서부터는 흥미가 다 닳아버렸는지 나서서 옷을 사는 일은 거의 없었다. 어쩌다 한번씩 엄마의 뜻을 거스르고 산 옷은 다 실패였다. "거봐, 엄마 말을 들었어야지. 입지도 않을 건데 왜 돈을 써." 그런 말이나 듣곤 했다.

그런데 엄마한테는 내가 예쁜 옷을 입지 않았던 게 어떤 자부심으로 남아있는 모양이다.

"엄마는 너네 맨날 편한 옷 입혔지. 놀이터 가고 뛰어다니고 해야 되는데 예쁜 거 입히면 뭐해? 편한 게 최고지. 애들한테는 뭐 고르라고 안 하는 게 나아. 하운이 봐라. 매일 시간을 얼마나 잡아먹니?"

그러면서도 지금의 나한테는 예쁜 것 좋은 것 좀 입고 다니라고 성화다.

"화장도 좀 하고, 젊은 애가 어째 그러니? 애 있다고 아주 아줌마가 다 돼서는..."

그러면 딸아이도 옆에서 따라한다. 맞아! 아줌마야! 나는 '그럼 내가 아줌마지 뭐 아가씬가?' 하며 웃는다.

몇 해 전에는 엄마가 겉옷을 사준다고 날 데리고 나갔다. 요즘 무스탕이 유행이라나, 안감으로 복슬복슬 털이 달린 옷을 이것저것 입어봤다. 하지만 엄마의 표현에 따르면 '애도 아니고 맨날 티쪼가리에 잠바떼기나 입는' 내가 갑자기 무스탕 같은 걸 걸친다고 어울릴 턱이 없었다.

"이거 어때? 이건 좀 괜찮은 거 같지 않아?"

"엄마... 아무래도 무스탕은 좀 아닌 거 같아."

"왜? 요즘 이런 게 유행이라니까?"

"그건 알겠는데 이건 나한테 너무... 어른 옷 같잖아."

"뭐래, 너 어른 맞거든?"

결국 어떻게든 얼추 어울린다 싶은 것을 찾아내 사기는 했다. 그렇지만 그 옷을 옷장에서 꺼내는 데에는 시간(그리고 엄마의 잔소리ㅡ"기껏 비싼 거 사줬더니 왜 안 입고 다녀? 예쁜 것 좀 입고 다니라고 큰돈 주고 샀구만!")이 좀 걸렸다.

나는 아직 내가 어린애인 것 같다. 티쪼가리에 잠바떼기가 어울리는, 뾰족구두 같은 건 어림도 없는, 엄마가 골라주는 옷을 입는 그런 어린애. 20살이 되자마자 갑자기 어른이니까 예쁜 옷을 입으라니, 난 아직 지금 내 모습에도 적응이 안 됐단 말이야. 그런 나도 가끔 그 옷을 입을 때는 꼭 어른이 된 것 같다. 어린시절 몰래 엄마 구두를 신을 때처럼 조금은 조마조마하고, 또 조금은 설렌다.

요 쪼그만 녀석도 가끔 내 신발에 제 발을 집어넣고 신이 나서 내게 자랑을 한다. 긴 치마를 입고 팔랑거리다 어른들에게 '아가씨가 다 됐다'는 둥 하는 소리라도 들으면 쑥스러워하면서도 입꼬리가 주욱 올라간다.

"엄마. 나 이렇게 입으니까 큰 언니같지."

의기양양해서는 씨익 웃는 얼굴에다가 침을 뱉을 수도 없고. 아침마다 옷으로 씨름하는 시간들이 지금은 정말 힘들지만, 네가 어른이 됐을 때 예쁜 어른옷이 어색하지 않게 도와줄 테지. 티쪼가리에 잠바떼기 입은 엄마에게 제 할머니처럼 잔소리도 할 거라고 생각하면 웃음이 난다.

"하운아, 오늘은 뭐 입을래?"

그래서 오늘도 나는 내 발로 싸움터에 들어가고야 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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