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르신 생애사 연대기] 지난 추억, 우리 삶에 별처럼 아름다운 그림자
[어르신 생애사 연대기] 지난 추억, 우리 삶에 별처럼 아름다운 그림자
  • 추억의 뜰 정여림 시민기자
  • 승인 2021.04.02 14:2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1942년 김 순자 

 

화사한 봄꽃들이 허리를 숙여 꽃 터널을 만드는 아름다운 4월이다. 그 꽃을 닮은, 아직도 새초롬한 소녀의 모습을 간직한 어르신 “지금은 주름이 세월을 말하고 있지만 나에게도 꿈 많은 여고시절이 있었다오” 라고 수줍은 미소를 건네신 어르신. 딸로 여자로 아내로 엄마로 할머니로 살아온 어르신의 향기에 흠뻑 취했다. 봄날의 꽃향기도 그 향연이 아름답지만 만리를 가는 사람의 향기가 으뜸이다. 

■ 유년의 뜰, 가난했지만 불우하지 않았다 

1942년 군서면에서 태어난 나의 어린 시절은 별 뾰족한 수가 없었다. 아버지는 남의 논을 소작하고 있었고 오빠들도 나뭇짐 지고 식장산을 넘어 대전 인동시장에 나가 돈 몇 푼 손에 쥐고 들어오는 게 우리 집 수입의 전부였다. 7남매의 막내였던 나는 가난한 집이지만 부모님사랑, 오빠 언니들 사랑을 넘치게 받았다. 밥 안 먹어도 배부르다는 말을 어릴 때부터 알고 자랐다.

다른 집은 아들들부터 챙겼지만 우리 집은 막내인 나부터 챙겨주는 특별한 가풍의 집이었다. 어머니는 틈만 나면 홍두깨로 밀가루를 밀어 칼국수를 해주셨다. 어머니가 홍두깨를 미는 날이면 옆에서 거들고 싶었지만 예쁘게 커서 귀하게 대접받으라고 그냥 바라만 보라고 하셨다.

7남매가 다 먹으려면 칼국수도 가마솥에 끓여야 했다. 김이 모락모락 오를 때면 침을 꼴깍 넘기면서 솥뚜껑 열리기만을 기다렸다. 쌀 밥 구경이 어려울 때라 불어터진 칼국수를 먹는것도 호강인 때였다. 오빠들은 칼국수가 뜨거운지 유난히 후루룩 소리를 내면서 칼국수를 한참을 식혔다가 먹었다. 그때는 그 이유를 왜 몰랐나 몰라. 오빠들은 일부러 칼국수를 탱탱 불려서 먹었다. 찰기 없는 밀가루는 후루룩 두 번만 불면 어느새 부풀어 올라 대접에 한 가득이었다.

다들 후루룩 소리를 내면서 칼국수를 먹고 죽향국민학교에 다니고 있을 때 마을에 살던 아저씨들이 어느 날 팔뚝에 완장을 차고 다니기 시작했다.

■ 6·25전쟁, 숨죽인 마을 

죽향국민학교 2학년이던 나는 어른들의 불안한 모습을 보면서 무슨 일이 났을까 궁금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6·25 전쟁이 일어난 것을 알았다. 마을에서 허드렛일을 하고 있던 아저씨들이 어느 날부터 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인민군이 마을에 와서 어린 나는 집에만 있었고 부모님과 오빠들의 겁에 질린 표정만 보면서 두려움에 떨었다. 밤에 부모님들이 주고받는 귓속말에도 예민해져 있었다. 동네 누가 죽었다느니 총살을 당했다느니 듣기만 해도 무시무시한 이야기들 뿐 이었다. 

■ 내 인생의 알토란같던 학창시절

얼마의 시간이 지나고 나는 다시 친구들과 어울려 학교에 다니기 시작했다. 죽향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옥천여중에 입학을 했다. 죽향국민학교는 친구들 여덟 명과 어울려 다녔지만 옥천여중은 동네에서 나와 은순이만 같이 다녔다.

어머니는 교복입고 학교 가는 나를 바라보시며 “예쁘다 예쁘다” 하셨다. 내 뒷모습이 작아질 때까지 나를 쳐다보고 계셨다. 나는 뒤돌아보지 않아도 어머니가 학교에 가는 나를 넋 놓고 바라보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어느새 눈물이 주르륵 흐르며 혼자말로 “어머니 고맙습니다.” 라고 매일 나에게 말했다.

학교에 다니면서 행복했지만 인생의 갈림길에 서게 되었다. 나의 고교진학은 우리 집에 뜨거운 감자가 되었다. 셋째 오빠만 대전으로 나가 학교를 졸업하고 도청에 다니고 있었다. 다른 오빠 언니들은 모두 학업을 중단했었다. 다들 머리가 좋았지만 나뭇짐 지는 집안형편에 감당이 불가능 했다.

아버지께서 “순자야 집에서 살림배우다가 시집가도 좋겠구나”

아버지 생각은 내가 얌전히 있다가 살림배우고 스무 살 즈음 시집가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어머니께서 “안돼요, 제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순자는 공부 시킬 거에요.”

아 어머니, 나도 어머니 말씀에 기운이 나서 학교에 보내달라고 눈물을 흘렸다. 아버지는 내 의지를 꺾을 수 없어서 나는 고등학교에 진학하기로 결정됐다. 언니 오빠들에게는 너무 미안했지만 공부를 하고 싶었다. 오빠가 먼저 대전에 나가 있어서 오빠 자취방에서 고교시절을 보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직접 밥상을 차리고 도시락을 싸서 학교에 갔다. 어머니 손길이 닿지 않아 간간이 외롭고 슬펐지만 어려운 환경에 대전으로 고등학교를 보내주신 부모님과 언니 오빠 생각을 하면 공부에 전념해야 했다.

고등학교라는 한고비 산을 넘고 대학에 들어갈 시기가 되었다. 3년은 금방 지나간다. 다시 내 운명을 결정해야 할 때가 왔다. 아버님은 한숨부터 쉬셨다. 아버지 한숨의 의미를 알고 있던 나는 더 이상 집안에 부담이 되고 싶지 않았다.

대학진학을 포기하고 옥천으로 돌아와 학교 서무과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 인생의 또 다른 골목에서 나를 기다리던 행운들 

00국민학교에 근무할 때 나를 유심히 보시던 교장 선생님이 어느 날 

“김 양 내가 중매 설까 하는데 착실한 총각이 있어. 학교 선생이야”

스물두 살이던 나는 쑥스러웠지만 존경하는 교장 선생님이 중매를 서신다면 믿어도 될 것 같았다. 선 자리에 나가보니 교장 선생님의 사모님이 나와 계셨다. 남자는 교장 선생님의 둘째 아들이었다. 그렇게 나는 교장선생님의 며느리가 되었다. 운명 같은 만남이었다. 남편도 영동에서 교편생활을 하고 있었다. 당시는 교사들이 다들 쥐꼬리만한 월급에 너무 힘들었지만 세월이 좋아져 고향에서 잘 먹고 잘 사는 할머니가 되었다. 내 생일날이면 우리 4남매와 손주들까지 열두 명이 둘러앉아 생일 축하 케익을 자르고 손주들은 서로 목청 높여

“사랑하는 할머니 생신 축하합니다"를 외친다.

돌아보면 가난한 어린 시절이었지만 사랑받고 자랐고 어려운 여건에서 대전 나가서 공부도 했다. 평범하고 착한 남편 만나서 소박하게 살아 왔다. 가진 것은 많이 없지만 손주들 용돈 주는 손은 가볍지 않다. 이만하면 내 인생은 100점이다. 과거를 떠올리면 낡은 사고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다. 추억처럼 힘이 되고 아름다운 그림자가 있을까.

간간이 여고시절 사진을 들여다보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늘 곁에 있는 아름다운 그림자, 누가 내 나이를 묻는다면 나는 항상 같은 대답이다. 

“내 마음나이는 열아홉 살이에요” 

이 기사를 후원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