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숙제 (옥천작가회의 회원 동이면 세산리)

세상사 우리네 살림살이가 물을 떠난 물고기처럼 헐떡거리는 것 같다. 하는 짓거리는 너무도 비열하다. 이제는 도를 넘어  목숨을 걸고서 극점을 향해 달려가는, 브레이크가 파열된 급행열차 같다. 코로나로 비탄에 젖어있는 서민들은 안중에도 없다. 흡혈귀 마냥 집어삼키는 행태가 가관이다. 이것이 만인의 지표가 되어야 할, 상전 위인들의 행태다.

분노를 넘어 모멸감이 하늘까지 치솟아 있다.

땅과 집은 사유재이면서 공공재다. 만인의 기반이요, 생명의 안식처다. 고로 이것이 불안하면 서민들의 삶은 파행의 연속이다. 이것을 방조, 방관하는 정부는 무능한 정부다. 국민의 눈높이를 헤아릴 줄 모르는 위정자는 ‘촛불정신’을 논할 자격이 없다. 그렇잖아도 민초들의 삶은 코로나 환국으로  형언할 수 없는 형극의 길을 걷고 있다. 이 와중에 특정 계층만 취득할 수 있는 정보로, 국민을 기만하는 행위는 직위고하를 막론하고 엄벌백계로 다스려야 한다. 이것이 시대정신의 준엄한 명령이요, 촛불정신의 잣대다.

살맛나는 세상은 과연 어느 세상일까. 요원한 희망사항으로 그친단 말인가. 그것을 말로만 농을 삼는 정부는 결코, 역사가 용납 하지 않을 것이다. 현 정부는 결단코 부동산 문제를, 만인이 수용할 수 있는 방도로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할 경우, 국민의 신망은 분노로 화할 것임을 명심할 일이다.

옥천군의 친환경 태양광 개발 허가행위도 궤를 같이 하는 것 같다. 업자의 행태는 교활한 이리 같았고, 위정자의 처세는 무사안일, 그 자체인 것 같다. 이 마당에 골병들어 허리 휘는 것은 누구일까. 물음 자체가 가소롭다. 신재생 사업도 좋다. 그러나 우리는 먼 안목으로 볼 줄 알아야 된다. 땅을 단순한 물건으로 보면 안 된다. 땅은 농사꾼의 ‘밥줄’이다. 밥줄은 생명줄이다. 농사를 ‘작은 경제 논리’로만 잣대를 들이대서는 안 된다. 그것은 유물사관이다. 인간의 편협한 논리다. 농사는 생명과 연결된 인류자산의 마지막 보고다. 소득이 미미하다고 조상 대대로 계승된 고향의 문전옥답을, 신재생 사업인 태양광으로 난개발을 유도하는 행위는, 조상과 후손을 멸시하는 근시안적 행위다. 과연 말대로 태양광이 신재생 사업일까. 곁에 있는 감나무와 배나무가 신음하면서 말라 죽어가는 모습을 목격하면서도.

우리는 더 이상 자연을 함부로 훼손해서는 안 된다. 4대강 사업에서 그것을 뼈저리게 경험했지 않았던가. 그러함에도 농촌의 들녘을 태양광으로 뒤덮으려는 발상은, 같은 돌에 두 번 걸려 넘어지는 행위다. 비록 농지가 소득으로 연결되지 않는다 해도, 약삭빠른 셈법으로 난개발을 부추기는 행위는, 후손들을 경멸하는 후안무치(厚顔無恥)의 비열한 셈법이다. 우리네 삶이 영원할 것 같아도 그것은 추악한 욕심이다. 바람처럼 머물다 가는 길손일 뿐이다. 자연과 땅은 인간의 범주를 한참 벗어나 있다. 손을 대면 댈수록 재앙으로 다가 올 사실은 자명하다.

한 톨의 벼 이삭과 들깨 한주먹의 가치를 우습게보지 말자. 위정자들이 농심을 모르면 불통을 낳는다. 불통은 인간의 욕망이 낳는 치유 불능의 중병이다. 농사꾼은 단순한 노동자가 아니다. 그들은 위로는 하늘을 모시고 아래로는 땅을 섬길 줄 안다. 고로 농사꾼은 하늘과 땅 사이에서 생명을 보듬는 성직자다. 돈이 된다고 고향 산천을 태양광으로 장막을 쳐보자. 마지막 길엔 너도 죽고 나도 죽을 것이다. 모든 것을 물질로 계산하려는 시도는, 인간만이 노리는 전도된 편협의 논리다. 물질은 순간 변한다. 쉽게 변하는 것은 사람이 받들 가치가 못 된다. 부처님은 한결같은 논조로 평생을 설하셨다. 불쌍한 중생의 물질에 대한 집착으로 인한 번민이, 하늘 끝까지 치솟아 있음에도 만족을 모르는 까닭에. 조견 오온은 개공(照見五蘊皆空)이라고. 깨친 성인의 눈으로 보면, 세상은 모두가 무상의 덧을 벗어날 수 없는 존재라고. 만물이 이러하건데, 하물며 물질과 사람의 살림살이야 논할 필요가 있을까.

‘물질과 경제적 수치’로 안위를 삼으려고 발버둥을 치기에 인간의 역사는, 병통(病痛)의 수레바퀴를 벗어나질 못한다. 이것을 미연에 아시고 노자 할아버지는 인간의 미래를 경고했다. 인간의 병통은 분별에서 발단한다. 분별은 만물의 영장인 인간만이 가진 중병이다. 만물지간에 제일 독한 놈이 사람이라고. 이 중병인 분별을 짓는 병만 없애면 인간의 영혼은 대자유인이 된다. 삶과 죽음, 꿈과 생시도 둘이 아니다. 이 경지가 바로 무심의 경계다. 농사꾼의 마음자리도 이곳에 접해 있다. 이 경지에 처하면 모든 것이 하나로 보인다. 귀하고 천함이 하나요. 잘나고 못남도 하나다. 유식하고 무식함도 하나다. 하나를 자꾸만 둘로 나누려고 몸부림을 치는 것이 인간의 짓거리다. 둘을 하나로 보려고 빙그레 웃는 웃음이 농사꾼의 무심의 경지요, 하늘의 섭리 길이다. 이들은 한 개체의 소멸에 달관해 있다. 인간도 자연의 관점에서 보면 한 개체의 일부분일 뿐. 더도 덜도 아니다. ‘누가 주인공인가’ 사람만이 만물의 주인공이라는 발상은 오만이요, 교만의 추태다.

결코 한 치 앞도 제대로 재단할 줄 모르는 인간은 주인공이 아니다. 우리는 그저 왔다가 스쳐 가는 바람이며, 백 년 과객이며, 나그네일 뿐이다. 고로 도도하게 소용돌이치는 물줄기의 영원한 흐름 속에 스며들어야만 될, 한 방울의 물방울의 존재가 바로 우리네 살림살이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흘러가는 물이 그러하듯, 자연의 운행에 스스로를 맡겨서 살아가라고, 그 길이 생명을 스스로 북돋우는 유일한 섭생의 길이라고, 노자 할아버지는 옛적에 이미 간곡하게 강조하셨다. 고로 땅은 인위적으로 경솔하게 손을 대면 안 된다.

안남면 주민들에게 힘찬 응원의 박수를 드리자. 장하시다. 아니 눈물겨웠다. 그분들은 순한 농심으로, 아니 무심의 경지로 위정자의 가슴에 경종을 울렸다. 말로만 유희하는 ‘국궁진력(鞠躬盡力)의 위민행정’의 공허한 메아리를, 여지없이 질타하는 매서운 회초리를 들었다. 이것이 바로 강함이 부드러움을 당할 수 없음의 반증이다. 이 또한 동학의 혈맥이 아닐까. 이 시대정신이 바로 ‘촛불정신’이 아니고 무엇일까. 풀은 늦게 누워도 먼저 일어나고, 늦게 울어도 먼저 웃는 방법을 알기에 가능했으리라. ‘누가 주인공인가’ 민초들은 묻지 않는다. 그들은 무심의 경지를 걷는 농군이기에 약하다. 그러나 쉽게 포기하지 않는다. 바람 앞에서도 흔들리고 쉽게 눕지만 결코 좌절과 포기를 모르기에, 쉽게 울음을 웃음으로 바꾸는 비법을 가지고 있다. 결코 ‘주인은 누구일까’, 묻는다는 자체가 우문이 아닐까.

빈손이 거대한 불통의 손을 따습게 잡고 말한다.

“제발 마음 편히 농사만 짓게 해 줘유!!!”

이 절규가 불통의 벽으로 막히는 세상은 주권재민이 실종한 비운의 통사다. 힘내시라, 안남면 주민들이시여!!! 이제는 임들의 소망대로 묵묵히 밭을 갈아, 마음껏 씨를 뿌려 하늘의 뜻대로 수확의 기쁨을 맛볼 수 있기를. 임들이 주장했던 소박한 ‘씨앗’들이 잎새가 되고, 줄기가 되어 힘찬 물줄기를 이뤄 농촌이 존재함으로 도시가, 건재할 수 있음을 입증하게 될 그날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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