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르신 생애사 연대기] 아날로그 카메라 필름의 마지막 한 컷은 남편과 나의 환한 웃음이어라
[어르신 생애사 연대기] 아날로그 카메라 필름의 마지막 한 컷은 남편과 나의 환한 웃음이어라
  • 옥천닷컴
  • 승인 2021.03.26 1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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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뜰 이연자 시민기자

성인경(1939년생~ 82세) 

 

먹구름 틈새로 내리쬐는 환한 햇살에 눈이 부셔 실눈을 뜨니, 꽃망울이 팡팡 터지라고 불어오는 따뜻한 봄바람에 콧노래를 절로 흥얼거리네. 복지관이 ‘천연제품’수업을 오픈해서 남편과 함께 등록해서 출석하고 있으니 봄처녀 봄총각으로 단장하고 출석 짝꿍으로 이것저것 다 배우는 즐거움에 행복하다. 우리의 고단했던 젊은 시절은 마치 씨앗이 어두운 땅에 심어져 인고의 시간을 다 채우고 나서야 비로소 움을 틔우고, 봄 햇살에 꽃망울이 최고의 시간을 기다리다 활짝 피어난 것과 같으리라. 그래 잘 살아온 우리 대단하여라! 

■ 세월의 격랑을 헤쳐 나왔다

나는 충남 아산군 도곡면에서 5남매 맏이로 태어났다. 내가 11살 때 6.25가 터지고 공주 신평면으로 피난갔는데, 유엔군이 공주 대평리 다리를 3분의2 정도 넘게 폭파시켰다. 그 다리는 양쪽 모두에게 중요한 다리로 북한도 주민들을 아버지를 포함 주민 20명을 차출해서 복구시켰다. 일을 끝내고 거산 고개를 올라올 적에 빨갱이들이 모조리 사살하라는 지령을 듣고서 산으로 뿔뿔이 흩어져서 도망쳐 나왔다. 아버지 이야기로는 삽교면 남씨네 부유한 집으로 피신해서 건넌방 농을 빼고 구들을 파서 그 뒤에서 3개월을 살았다고 한다. 살면서 처참하다는 말을 몇 번이나 쓸까. 그 3개월이 얼마나 처참했을지 두려움의 끝을 짐작할 수도 없다. 9.28수복 되면서 작은집으로 가서 동네에서 아예 이사를 나와서 우리 가족은 예산 여고 뒤에서 살았다. 

62년 23세에 3살 위 옥천 태생 김영태 총각과 결혼했다. 광산 김씨는 다 잘 생겼었는데, 남편은 한밭중학교를 떨어져서 삼성동에 있는 대전공고 기계과를 졸업했다. 나는 예산 여고를 중퇴하고 대전에 나와서 은행동에 있는 미용학원을 다녀서 자격증을 땄다. 집안이 깨어있어서 뭐라도 기술을 배워야 한다고 배웠다. 미용 재료상의 소개로 나는 옥천에서 숙식을 해 가면서 미용실에 전문 미용사로 1년 정도 있다가 남편을 소개로 만나서 결혼했다. 금구2리 하나꽃집 옆에 여정식당 맞은편에 자리잡고 있던 우리 집에서 ‘금잔디미장원’을 오픈했다. 최대한 뽀글뽀글 말아서 풀리지 않게 탄력있게 나온 아줌마 파마를 특기로 잘했다. 고데기 이야기를 안 할 수가 없네. 어디 중요한 행사가 있거나 멋쟁이들은 고데를 좋아했다. 연탄불 위에서 달구어져 치지직 소리를 내뿜는 고데기(아이롱기)를 찰칵찰칵 먼저 소리를 낸다. 하얀 연기와 함께 살짝 머리카락 나는 냄새가 나야 머리카락도 잘 구어진다. 이리저리 돌리며 누런 종이에 조금씩 머리를 잡아내 돌돌 말다가 잠깐 멈춘 다음 쭈욱 뽑아내 예쁜 컬이 나오면 나조차 기분이 좋아졌다. 미장원 다음에 시계포를 운영했다.

■ 행복한 순간을 영원히 간직하라-샛별 사진관 

친정아버지가 예산에서 사진관을 운영하셨는데 나는 아버지 어깨너머로 사진 기술을 배웠고 훈수로 배웠다. 마침 남편은 카메라 가지고 노는 것을 좋아했다. 시계포로 먹고 살다가 내가 사진관으로 전환하자고 했다. 처음에는 ‘로맨스 사진관’이라고 작명했는데 될수록 외래어 쓰지 말라고 읍에서 지도를 해서 ‘샛별 사진관’으로 바꾸어 50년간을 경찰서 앞에서 운영했다. 

지나간 시절에는 중요한 기념일에 잘 차려입고 사진관에 가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백일, 돌,  입학과 졸업, 환갑 그리고 미리미리 영정사진까지 찍어두는 사람도 있었다. 당시에 증명사진을 한 번 찍는데 기억에 50원인가 했었다. 특히나 환갑잔치는 집안에 경사 중에 경사여서 동네 잔치가 벌어졌다. 성대한 잔칫상을 배경으로 단아하게 환갑사진을 찍어서 인화해서 대청마루에 액자를 걸어서 두었다. 대청마루나 안방 벽 제일 높은 곳에 기념 사진들이 액자에 담겨 소중하게 전시했었지.

가장이나 삼촌 등 사우디아라비아에 취업해서 돌아온 집에서는 외제 카메라가 한 개씩 있었다. 학생들이 소풍이나 수학여행을 가서 직접 찍은 사진 필름 한 두통을 들고 우리 사진관 문을 두드리며 인화해 달라고 했던 추억도 이제 기억의 한 켠에 남아있을 뿐이다. 어떤 필름은 앵글이 흔들려서 초점을 못 맞춰서 어설픈 것도 있고, 필름을 완전히 되감기도 전에 뚜껑을 열어서 빛이 들어가서 애써 취한 포즈의 사진들이 시커멓게 나와서 울음을 터뜨리는 학생도 있었다. 옥천에 중고등학교 대부분의 졸업 앨범을 우리 사진관에서 다 만들었다. 그게 우리의 자랑이기도 하다. 이제는 아무리 눈을 씻고 봐도 사진관이라고는 찾을 수가 없다. 누구나 휴대폰을 들고 뚝딱 사진을 찍을 수 있고 알록달록 아름다운 칼라사진을 수십 장 담고 있다. 모두 다 트로트 가수처럼 노래도 잘 부르고 모두 다 사진사인 것처럼 사진도 잘 찍는 시대이다. 

■ 남길 것도 가져갈 것도 없이 깔끔하게 마무리하리라

4남매 모두 다 4년제 대학을 나왔다. 큰아들이 초6때 서울로 전학시켜서 아현초등학교를 나왔다. 큰아들을 서울로 보낸 이유가 옥천중학교를 나오면 학군제 때문에 외지로 못 나가서 농고에서 전환한 옥천공고( 지금 과학대학자리)만 가고 대전도 못 나갔다. 우리 사촌 동생이 서울 아현동에 마침 살고 있어서 6학년 1학기 때 내 보냈다. 고려대 화공학과 들어가서 4년 장학금 받고 프랑스에서 박사를 따고 현재는 사업체를 운영하고 있다. 큰딸은 한남대 불어불문과를 졸업하고 은행에서 근무하다 결혼해서 서울에서 병원 사무장으로 있다. 작은딸은 목원대 피아노과 전공해서 피아노 음악학원을 운영하고 있다. 막내아들도 사업을 하고 있다. 자식이 다 잘 됐으니 우리는 성공이다. 

세월이 흐르고 사진관도 찾는 사람들이 점점 줄어들었다. 먹고 살기 힘든 시대를 열심히 힘을 합쳐서 살아왔다. 나름대로 기술을 갖춘 전문 기술인으로 시대의 흐름을 타면서 자식들을 다 가르쳤다. 힘이 빠질 때쯤 사진관이 몰락하였지만 대신에 허리가 휠 만큼 힘들거나 잠을 못 이루는 걱정거리도 함께 없어졌으니 인생 살아볼 만하다. 2007년 3월에 마지막 손님을 보내고 사진관 문을 닫았다. 이제 우리 컴퓨터나 한 번 배워보자 하고 남편과 나란히 항상 같이 수업을 들었다. 우리처럼 서너 팀이 다니고 있다고 알고 있다. 이만하면 행복하다. 나는 발목부터 머리끝까지 볼링(새로 끼워서)해서 잘 살고 있다. 어느 날 남편에게 문제가 생겼다. 운전하는데 사시처럼 중앙선이 두 군데로 갈리는 증상이 나타나서 신경외과를 방문했다. MRI 찍어서 2013년에 건양대학교에서 발견했다. 양성 종양이 백회에 박혀있어서, 말하자면 빠릿빠릿 머리가 돌아가지 않는다. 2.3센티 종양인데 사이버 수술로도 안된다고 들었다. 잘못하면 사망할 수 있다고 해서 수술은 안 하고 약 조금 먹으면서 어지간하면 버티고 있다. 그래, 같이 사는 거야 하고 마음을 탁 비워냈다. 열심히 절에 다니다가 2012년도 인공관절하던 당시 천주교로 귀의해서 나는 안젤라, 남편은 안셀모이다.

우리 내외가 함께 헤치며 살아온 인생의 굽이굽이마다 기쁨, 슬픔, 행복, 미소, 추억, 아름다움, 밝음, 환함, 사랑, 기적, 감사가 ‘기억의 폴더’에 차곡차곡 저장되어 있다. 다음 세상에서도 같은 폴더에서 같은 기억을 소환한다면 또다시 만나서 남편과 아내로서 사랑을 나누리라.

폴더 제목은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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