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홍용 (안남 화인산림욕장 대표)

김희로 사건은 노년층들에게는 널리 알려진 사건으로 그 당시 한일간에 대단한 반응을 불러일으킨 민족적, 정치적, 역사적인 문제가 혼합된 쇼킹한 사건이었다.

김희로는 1928년 권씨와 박씨 사이에 부산에서 태어나 세살때 생부인 권씨가 죽자, 생모인 박씨가 김씨와 재혼함에 따라 김희로란 이름을 갖게 되었다. 태평양전쟁 전에 일본 시즈오카(靜岡)현 시미즈시(淸水市=현 靜岡市 淸水區)로 건너가 초등학교 5학년을 중퇴한 최하층 극빈자 생활을 하며 온갖 차별과 멸시를 몸으로 느끼며 문제아로 성장하게 된다. 거듭된 사업 실패와 절도, 사기, 강도죄로 경찰서를 자주 드나들면서 이혼에 따른 충격으로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는 처지였다.

평소 지인들과 자주 드나들던 시미즈시의 “밍크스”라는 카바레는 야쿠자들의 온상으로 그들과도 금전관계로 얽혀있는 사이였다.

1968년 2월 20일 오후 8시반경 밍크스 카바레에서 채권자의 의뢰를 받은 야쿠자들이 빚독촉을 하며 “汚い朝鮮人(더러운 조선놈)” 이라고 야유를 하면서 갖은 욕설로 모욕을 주자 격분한 나머지 주차장에 세워둔 차에서 사냥용 라이플 총을 갖고와 갑자기 7~8발을 난사했다. 그중 6발을 맞고 야쿠자 지역 두목이 그 자리에서 즉사했고, 중상을 입은 부하도 결국 사망하게 된다.

김희로는 그대로 카바레를 유유히 빠져나와 남알프스의 오이가와(大井川) 최상류인 후지미야 온천여관에 들이닥쳐 가족 및 투숙객 16명을 인질로 삼아 경찰과 대치했다.

김희로는 실탄 1,200발과 다이나마이트 13뭉치를 갖고와 언제든지 불을 붙여 던질 수 있도록 화로를 다이나마이트 가까이 갖다 놓았다.

NHK를 비롯한 TV, 라디오는 물론 온갖 매스컴이 총동원 되어 24시간 생중계로 앞다투어 열띤 취재경쟁을 벌였다.

당시 조일신문(朝日新聞)기자로 후일 수상이 된 호소가와(細川) 씨도 기자단에 섞여 취재했다.

김희로 씨는 일약 영웅으로 부상하여 그는 TV와 매스컴을 아주 능수능란하게 활용하여 자기 주장을 강력히 피력하였다.

재일한국인 차별상을 만천하에, 그것도 TV를 통해 일본 방방곡곡 생중계로 방영케 하면서 인질도 조금씩 풀어주는 여유도 보였다.

시미즈 경찰서의 고이즈미(小泉) 형사는 김희로와 사사건건 악연이 있어 수년간 괴롭혀 온 악질형사라고 지목하여 그간의 잘못을 사죄하라고 압박하여 경찰 역사상 언론앞에 사죄하는 전무후무한 초유의 굴욕을 안기게 했다.

어느 짓궂은 TV 시청자는 전화로 인터뷰 하면서 다이나마이트를 던져 보라기도 하고, 총을 공중에 난사해 보라고까지 했다.

김희로는 다이나마이트를 한 뭉치씩 던지기도 하고, 연발로 10여발을 공중 난사하는 쑈아닌 쑈도 벌였다

경찰이 장갑차까지 동원하고 무장경찰을 투입하자 간헐적으로 몇발씩 위협사격도 하면서 다이나마이트도 던지곤 했다.

그러나 88시간의 인질극은 기자를 가장한 무술경관을 기자단에 투입하여 취재중에 김희로를 제압함으로 끝을 맺는다.

2월은 가와네(川根) 온천지방이 가장 추운 시기로 연(延)경찰병력 2만명을 투입하고, 무장경관들이 현장을 겹겹이 에워싸며 철통같은 현장 경비를 가능케 한 것은 얼마전 등장한 라면이 일조했다.

일본 경찰 역사상 한 사건으로 단기간에 연 2만명 이상이 동원된 것은 김희로사건에 이어 김대중납치사건이 두번째이다.

너무나도 잘 알려진 김대중사건은 1973년 8월 8일 도쿄 한복판 그랜드 팔레스 호텔에서 주일대사관 김재권 공사의 진두지휘로 이루어졌는데, 그는 모든 책임을 지고 가족을 데리고 미국으로 망명했다.

김재권 공사의 아들이 성김(Sung Kim)으로 재미교포중에 최고의 공직에 있으며, 망명 당시는 초등학교 3학년생 이었다.

그는 LA 검사로 일하다 국무부 한국과장을 거쳐 6자회담 미국 수석대표, 한국, 필리핀, 인도네시아 대사를 거쳐 현재는 동아태 차관보 대행이다.

그런데 일본정부는 아직까지도 김희로의 총기 구입 과정과 다량의 실탄 출처를 함구하고 있다.

일본은 총포상에서 사냥총 및 단발 라이풀 총도 구입하여 사철 자기집에 보관하고, 경찰에서 시근장치를 한 후 수렵철에 꺼내 사용한다.

레밍톤이나 브라우닝 같은 산탄총은 3발만 들어 가도록 개조했으며, 총포상에 3발탄창 카빈총이 32만엔(약320만원)으로 적혀 있어 깜짝 놀랐다.

김희로가 사용한 총이 사냥용 라이플 총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자동,반자동이 되는 망원조준경이 장착된 카빈 M2였다.

카빈과 엠원(M1) 소총은 자위대 무장을 위해 미군으로부터 라이센스를 얻어 1947년 豊和(Howa)공업이 생산한 것으로 민간 수렵용은 실탄 3발들이 탄창만 사용할 수 있다. 김희로는 어떻게 하여 30발 탄창과 M2 카빈을 갖게 되었고, 다량의 실탄을 갖게 되었는지 지금까지도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한국전쟁이 장기화 되자 미군은 호와공업에 엠원, 카빈소총 생산을 대량으로 주문하고 부품도 의존하게 된것은 역사의 아이러니일까...?

필자는 약 50여년간 500번 이상 방문한 일본 도시는 시즈오카시가 유일한데 시내에서 고작 2시간 거리인 김희로사건 현장은 가보지 못했다.

2015년 9월 13일 거래처인 사와무라(沢村) 사장과 함께 김희로 사건의 현장인 후지미야 여관이 있던 스미다쿄(寸又峽) 온천장에서 1박 하면서 당시의 상황을 자세히 청취할 수 있었다.

현지 이웃주민 이노우에 씨에 의하면 김희로 씨는 여관 가족들에게도 매우 예의 바르게 예우 한데다, 모든 인질들에게 겸손하게 행동하여 무섭지 않았다고 했다. 양옆, 뒷쪽으로 깎아잘린 절벽같은 2,000m 이상 산들이 병풍처럼 첩첩이 둘러싸인 산촌이 사건 이후 다년간 유명세가 붙어 최고의 호황을 누린데다, 자기들 고장을 전국 명소로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고 김희로를 추켜올렸다. 후지미야 여관(현재는 영업않음)에서 보니 탄도학적으로도 최적의 장소를 택했음을 알 수 있었다. 이곳 스미다쿄 온천은 아람드리 편백, 삼나무가 빽빽히 들어선 최고의 청정지역 온천향 이었다.

김희로는 강제출국조건으로 31년만에 출소후 1999년 9월 영주귀국하여 부산 시의원에도 도전했었으나 낙선했고, 1990년대 초에는 유인촌이 카리스마 연기를 잘 보여준 “김의 전쟁”으로 국민들의 의분을 달래주면서 저술과 강연으로도 바쁜 나날을 보내기도 했었다.

그러나 재혼과 이혼을 하면서 사기, 월담(강도), 불륜, 살인미수죄에 연류되고 결국 생활고까지 겹쳐 2016년 3월 26일 전립선암으로 향년 82세로 한많은 생을 마감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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